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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혁과 계약했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아직 이름이 없어서 겨우 입시 연기 하나둘 하던 사람이 이제는 재석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계약한 연기 선생님이 되었다.
다음 날부터 바로 문자영과 신지경의 연기 수업이 시작됐다.
두 사람의 출발선이 달라서 신지경은 연기의 기초부터 시작했고, 문자영은 좀 더 연기를 깊이 있게 가르쳤다.
작은 사무실에서 수업을 할 순 없었고 안준혁이 소속된 극단에 양해를 구해 장소를 빌려 수업하기로 했다.
주명진은 재석이 생각보다 빨리 연기 선생을 구했다는 말에 대단하다고 여겼다.
“연기 선생 빨리도 구했어. 아주 빨라. 난 며칠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팀장님, 시간은 금입니다. 해야 할 거 빨리 처리해야죠. 그리고 민경이 회사에서 하는 오디션도 합격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아, 민경 씨 아는 사람?”
“그리 깊게 아는 사이는 아니고요.”
“선배님, 충무로에서 오디션 일정 받아 왔습니다.”
민철의 말에 주명진이 고개를 돌렸다.
“충무로?”
명진은 갑자기 충무로 오디션 일정이 왜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지금 충무로 일정은 왜 찾는 건데. 권진우 영화 출연시키게?”
“아니요. 민경이가 출연할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진짜?”
“네.”
“리스크가 좀 있는데.”
“지금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민경이의 이미지와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면 한번 해 볼 만하죠.”
민경의 이미지는 청순이다. 거기에 걸맞은 영화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그럼, 가을 시즌 영화?”
여름에는 호러 블록버스터 같은 좀 거침없는 영화가 나오지만, 가을과 겨울이 되면 사람 마음 따뜻하게 하는 영화들이 주류를 이룬다.
“여름 영화 시나리오는 내년에 갈 거고 제가 원하는 건 가을 영화입니다.”
말이 가을 영화지 지금 영화 오디션을 찾으면 촬영은 여름이다.
재석이 원하는 영화 대본은 지금쯤 이미 나와 있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민철을 시켜서 충무로 오디션 일정과 대본을 받아 오라는 거였다.
“선배, 근데 이거 너무 많은데요.”
가져온 대본이 50개나 된다. 이 안의 모든 영화가 개봉하는 건 아니다. 잘해 봐야 10개 안팎의 대본만이 영화로 나갈 뿐이다.
“따로 민경이가 영화를 고른다는 소리는 안했지?”
“물론이죠. 그러지 않아도 GU가 망한 뒤에 흩어진 배우 중에 제일 많이 관심받는 사람이 민경 씨인데.”
“그래, 소문 잘못 퍼지면 그대로 아웃이야.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재석은 정말 극비라고 할 정도로 소문을 차단하고 있었다. 대본을 받아올 때 구실이 신인 배우를 영화계에 데뷔시키고 싶다는 거였다.
“이거 민경이에게 다 줄 거야?”
“네, 줄 겁니다. 대본 이해력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대본을 가장 많이 보는 게 그 정답이죠.”
“필요하긴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많이 주는 건 시간을 너무 뺏을 건데······.”
“갑자기 많이 읽으라고 하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서 대본을 본다면 훨씬 좋겠죠.”
“좋은 일이다.”
재석의 말에 주명진이 동의했다.
“저, 진우 형한테도 이 대본 보게 해 줄 수 있나요?”
“물론이지. 한 사람이 이걸 다 보는 건 무리야. 하루에 하나씩 가져가서 대본을 읽게 하는 게 중요하지.”
민철도 그렇게 대본 하나를 집어 들었다. 권진우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럼, 나도 하나 가져가야 하나?”
“가져가시기 전에 팀장님은 대본을 먼저 읽어 보세요. 내용과 모르는 단어들을 미리 확인한 뒤에 가서 설명해 주세요.”
“이거 졸지에 대본 공부하게 생겼네.”
아역 연기자에게 매니저는 약간의 선생님 역할도 어느 정도 해 줘야 했다. 그 적임자로 주명진이 딱이었다. 재석보다 긴 시간 매니저 생활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고 아이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훨씬 능숙했다.
“뭐, 팀장님 밑에 사람 더 생기면 일이 수월해질 겁니다.”
“수월해지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지금 상황에서 재석이 직원을 한 명 더 늘리는 건 곤란하다. 두 아역들이 하는 일이 지금 당장은 미비하기 때문이다.
“신지경은 어린이 프로그램에 잘 적응했습니까?”
“눈치가 빠르던데. 적응력이 대단해. 거기서 일하는 스태프들 반응도 나쁘지 않아.”
“그럼 그 프로그램은 언제까지 할까요?”
“어린이 프로그램 특성상 대략 1년이야. 그리고 그 안에 아이들 성장 속도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길게 하고 싶어도 못 해.”
주명진의 말에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지적은 아주 정확했다.
“그럼, 1년 뒤에는 연기 수업과 병행해서 모델 활동으로 돈 좀 벌어야겠네요.”
“아마도.”
주명진도 그럴 거라는 예상만 할 뿐이었다. 워낙 연예계가 변수가 많아서 막연하다는 느낌으로만 생각했지만, 재석은 이미 미래가 창창한 이들을 데리고 있었기에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곧 있으면 민경이 드라마 촬영이 끝납니다. 광고주들 연락은 없습니까?”
“있지. 새로운 회사로 번호를 쫙 뿌린 효과가 났는지 광고주들 연락이 쏟아진다. 근데 바로 계약하자는 곳이 많은데 어떻게 하냐?”
“드라마 촬영 일정과 배우에게 휴가가 필요하다 하면서 일정 최대한 뒤로 미뤄 두세요. 연락도 다 돌리고요. 저도 함께하죠.”
재석은 민경의 일정을 일부러 늦춰서 광고주들의 마음을 애태우게 할 계획이었다.
“몸값 올리기냐?”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할 겁니다. 목표 액수는 지금보다 딱 두 배로 뛰면 움직입니다.”
“두 배는 너무 빨리 도달하겠는데.”
“그 정도가 적정선입니다. 그 이상을 노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일부 광고주들이 떨어져 나갈 겁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재석의 지시가 끝나기 무섭게 각자 전화기를 들고 연락이 온 광고주들에게 촬영 일정 이야기를 들먹이며 일정을 뒤로 미뤘고 동시에 이런 말도 했다.
“아, 죄송하게도 민경 씨가 너무 바빠서 그쪽 일을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화 내용은 간단하다.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닌 모호한 대답이 담긴 내용.
광고주들도 연예인들의 몸값 올리는 작전을 모를 리 없다. 하나, 다들 알면서도 시비 걸지 않는 건 그런 스타들에게 준 돈보다 돌아오는 이익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수십 배에 해당하기 때문에 충분히 감수하는 거다.
광고주 중엔 곧바로 가격을 두 배를 부른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잠시 회의를 좀 하겠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돈 두 배로 부른 곳이 꽤나 많네.”
재석도 곧바로 두 배로 부르는 이들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두 배는 너무 싸다니깐.”
“그럼, 기한을 정합니다. 딱 한 달간, 두 배 받고 그 뒤로 가격 더 올립니다.”
“그럼, 몸값 팍팍 오르겠네.”
직원들과 재석은 두 배를 바로 부른 광고주들과 스케줄을 잡기 시작했다.
“재석아, 너 안 가냐?”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재석은 급하게 민경을 데리러 움직여야 했다.
*****
드디어 마지막 촬영이 끝나자 윤정호 감독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으흐흐흐.”
“감독님, 그렇게 좋습니까?”
“좋다마다. 세상 사람들이 내가 회사 차렸을 때 윤정호는 끝났다 했지만, 결과는 어때. 난 당당히 죽지 않았다고 보여 줬고, 내 실력 어디 가지 않았음을 알렸지.”
“물론이죠. 감독님은 방송사를 나오고 나서 홀로 일어서셨죠.”
재석은 윤정호 감독을 칭찬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오늘 한잔하나?”
드디어 드라마가 끝났으니 쫑파티를 하는 날이었다.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어허, 섭섭하게 빼는 건가?”
“빼긴요. 전 그런 거 없지만, 민경이 술자리 끝나면 누가 데려다줍니까.”
“거, 저쪽에 남자들 많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늑대 새끼들은 위험합니다.”
이제 유명 여배우가 된 사람이라서 함부로 누군가가 채 가기라도 하면 위험하다.
“아, 이런, 좋다 말았네.”
“그래도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뭔가? 내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지.”
“근처에 호텔 하나, 모텔 하나 잡아 주세요.”
“호텔은 배우 줄 거고, 모텔은 전 매니저?”
“아주 잘 아시네요.”
“됐어. 내가 호텔 방 두 개 잡아 줄게.”
윤정호는 곧바로 근처에 있는 호텔 방 두 개를 잡아 주고, 재석과 민경을 데리고 쫑파티를 함께하게 되었다.
이날 윤정호는 돈을 쓰긴 했지만,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으하하하!”
재석과 함께 술잔을 기울인 윤정호는 그렇게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문제는 재석이 감독과 술을 마신다고 과음해서, 다음 날 필름이 다 끊겼다는 점이다.
*****
“으윽!”
눈을 뜨고 처음 느낀 건 머리가 깨질 듯이 괴롭다는 거와 아침 햇살이 침대가 있는 곳까지 비추고 있다는 거였다.
“아이고.”
재석은 입고 있는 옷을 봤다.
“그대로 쓰러졌네.”
어떻게 해서 호텔 안으로 들어와 그대로 침대에서 뻗은 모양이다.
“기억은 없는데 별 탈은 없었던 모양이네.”
하지만, 별 탈이 없진 않았다.
“으으으.”
침대 밑에서 부스스한 머리의 한 여인이 일어났다. 다행히 옷차림은 어제와 똑같았다. 벗은 흔적 따윈 없었다.
“야, 민경아, 네가 왜 거기서 일어나.”
“으으, 오빠 때문에 내가 진짜. 아이고.”
민경은 허리를 두들기며 고통을 호소했다. 거기에 민경의 화장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눈 화장은 번져서 눈 주변이 시커멓게 변했고 입술은 립스틱이 다 퍼져서 입술이 평소에 세 배는 돼 보였다.
“근데 왜 여기 있는 거야. 그것부터 설명해!”
재석은 혹여 누가 민경과 함께 호텔에 들어온 걸 봤을까봐 노심초사하며 다그치자 민경이 입을 열었다.
“오빠, 인사불성 돼서 내가 데려왔는데. 아이고, 이 몸으로 데려온다고 얼마나 힘들었어. 오는 내내 나한테 우리 보물, 우리 보물. 아우, 진짜 그 말만 아니었으면 내가 오빠 버렸는데.”
“그게 전부야? 근데 넌 왜 여기서 잤는데.”
“나? 나도 술 많이 취해서 더 이상 어디 못 가고 밑에서 잤어. 너무 힘들어서.”
민경도 술을 적게 마신 건 아니라서 술 취했는데 만취한 인간 버리고 갈 수 없어서 힘들어도 데려왔고, 데리고 와 보니 피곤해서 그녀도 침대 밑에서 잤다는 거다.
“뭐, 다른 일 없었어?”
“없었어. 있었다면 오빠가 내 얼굴 막 손으로 문지른 거 말고는······.”
“진짜?”
재석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혹시라도 무슨 문제라도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다.
“없었어. 특별한 일. 오빠 옷을 보면 알잖아. 그나마 그렇게 술 마시고도 토하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 중이야.”
“그럼, 다행이고.”
재석은 민경의 말을 다 듣고 살짝 안심했다. 정말 특별한 일이 없어서 말이다.
“그리고 고맙다. 나 챙겨 줘서.”
“뭘, 이 정도는 해야지.”
민경은 별거 아니라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나 먼저 얼굴 씻고 밑에서 기다릴게. 너 편하게 씻고 나와라.”
“알았어요.”
재석은 먼저 화장실로 가서 가볍게 세수하고 정말 밖으로 나갔다.
재석이 나가자, 홀로 남은 민경은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다 얼굴을 보곤 깜짝 놀랐다.
“히익!”
화장이 엉망이 되어 있는 상태로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고, 동시에 화장이 번져서 엉망이 되어 버린 이유도 기억이 난 것이다.
*****
늦은 밤, 재석은 만취한 상태로 민경의 어깨에 기대어 호텔로 갔다.
“민경아, 내가 말이야. 널 만난 걸 정말 운이라고 생각해? 아니야. 주 팀장이 프로필 보고 신인 연기자 챙기라고 할 때, 딱 보고 알았어. 이 여자다. 내 평생 다시없을 배우.”
“진짜로?”
“엉, 내가 평생 다듬고 다듬어서 보석으로 만들어야 할 배우. 이런 보물.”
재석은 민경의 볼에 얼굴을 부비면서 징그럽게 하자 민경이 질색했다.
“으으으, 그만.”
“으흐흐, 민경아. 난 널 아시아 최고의 배우로 만들 거야. 그걸 위해 내가 윤정호 감독에게 그렇게 공을 들였다. 그 깐깐한 윤정호 감독에게 말이야.”
“근데, 오빠는 윤 감독님이 이런 드라마 쓸 줄 알았어?”
“대본만 봐도 딱 나와. 이게 잘될 건지 그리고 민경이 너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지금의 민경이가 연기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새로운 역이 오면 그걸 할 가능성이 있는지, 어렵더라도 할 만한 작품인지 그걸 보는 거지.”
재석은 만취했는데도 신기하게 혀 꼬임이 없었다. 대신 몸은 흐느적거리고 있어서 상당히 많이 취했다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우리 보물이 연기력이 더 늘면 젊은 나이에 더 다양한 역을 할 수 있어. 이런 것도 가능해 젊은 나이에 이혼녀가 되는 역할이라든지 아니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 역할이라든지.”
재석이 술 취해 주절거렸지만, 민경이 정말 미래에 맡게 되는 역이다.
“······.”
“민경아, 우리 보물은 꼭 그렇게 될 거야.”
재석은 이후에 말이 없어졌다. 몸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오, 오빠, 안 돼. 여기서 쓰러지면!”
“미안······.”
결국 재석은 민경의 품으로 쓰러졌고 성인 남자의 몸을 버티지 못하고 민경도 옆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민경은 끝까지 재석을 방에 데려가서 침대에 눕혔다. 그대로 돌아가려는데 너무 힘들어 잠시 쉬었다 가자는 생각에 잠깐 누웠다가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