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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이 끊긴 사태 이후, 재석은 그 뒤로 한동안 술을 절제하며 살았다.
이날은 민경이 광고 촬영을 찍기 위해 촬영 현장으로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다.
“오빠, 난 기억해요.”
“그래, 알고 있다.”
재석에게는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지만, 별일 없었다는 게 좋았다. 서로 약점이 생긴 셈이어서 민경이나 재석이나 입을 다물기로 했다.
“서로 죽을 때 까지 비밀이다.”
“걱정 마요. 별일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할게요.”
재석의 표정은 심각했지만, 민경은 뭔가 모르게 즐거웠다. 마치 혼자만의 재미난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는 게 너무 좋은 모양이었다.
“오빠, 근데 이거 끝나면 다른 일은 뭐예요?”
“목표는 영화다. 그쪽에 진출해서 드라마, 영화 양쪽에서 너의 이름을 남기는 거지. 근데 너 노래 잘하냐?”
노래라는 말에 민경은 고개를 힘차게 가로저었다.
“노래 못해요.”
“그래······.”
민경은 회귀 전에도 노래에 관해서는 전혀 시도하지 않았었다.
‘만약 노래까지 잘했으면 뮤지컬까지 접수 가능한데 말이야.’
“진짜야? 왠지 검사하고 싶은데.”
진심으로 궁금한 점이었다. 친구들과 노래방을 갔어도 한참 전에 갔을 건데, 아직도 민경이 노래하는 걸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오, 오빠.”
당황하는 얼굴을 보니 진심 노래에 관해서는 특별히 좋은 기억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알았다. 노래에 관해서는 묻지 않을게. 다만, 회사 회식 자리에서 한 번쯤 노래방 같은 곳에 가서 노래를 부를 순 있지?”
“뭐,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다만 노래 잘 못 부르니까 큰 기대는 부담돼요.”
“걱정 마. 그 자리는 뭔가 검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노는 자리잖아.”
“진짜죠?”
“내가 너한테 거짓말해서 돈이 나오겠냐.”
“알았어요.”
민경은 재석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건지 아닌지 살짝 의심했지만, 지금까지 재석의 행동이 신뢰감을 줬기에 때문에 두 눈 딱 감고 믿기로 했다.
“오빠, 다음 작품은 뭐예요?”
“영화 하나 골라 봐라. 나와 있는 시나리오나 대본이 있으니까.”
민경은 영화라는 말에 살짝 긴장했다. 드라마야 이제 몇 작품을 해서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장르라서 걱정이 앞선 거였다.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마. 드라마 현장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단히 큰 차이는 없어.”
“진짜요?”
“물론. 조수석 보관함 열어 봐.”
민경은 재석의 말대로 그 보관함을 열자 그 안에는 대본이 하나 있었다.
“충무로에서 뿌려진 대본 중 하나야. 한번 읽어 봐.”
“젊은 날의 소설?”
“멜로 영화야. 한번 봐 봐.”
재석은 편안할 때 보라는 의미로 말한 거였지만, 민경은 바로 대본을 펼치며 그 내용을 읽어 나갔다.
‘바로 읽네.’
재석은 민경이 대본을 읽는 동안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광고 촬영장에 도착해서는 민경은 잠시 대본에서 눈을 뗐지만, 손에서 놓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민경이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이 인사를 해 줬다.
“아, 오셨습니까.”
광고 촬영을 위해 사진작가가 다가왔다.
“어머, 작가님이 굉장히 멋지시네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민경은 립 서비스가 상당히 섞인 멘트를 던져 줬고, 사진작가는 그 말에 과장되게 웃으면서 좋아했다.
“그럼, 준비 끝나는 대로 오세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네.”
민경은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촬영에 임했다.
민경은 광고 촬영이 쉬는 시간마다 대본을 읽어 갔다. 재석은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에 말을 걸지 않았다.
대본을 다 본 뒤에 민경은 재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대사가 천생 여자 느낌이 강하네요.”
“어떤 배역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심정은이요.”
“어떤 역을 할지 정한 거야?”
“내가 오빠를 모를 줄 알아요. 이 영화가 좀 괜찮을 것 같으니까 밀어 넣으려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 안에 넣은 걸 보면 바로 느낌 와요.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제가 할 수 있고 사람들 눈에 확 들어올 만한 역을 찾잖아요.”
“크흠.”
재석은 헛기침하면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다.
“이거 할게요. 근데, 대본이 저한테 온 거 맞아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네 앞으로 온 건 아니야.”
“에이, 좋다 말았네.”
“우리한테는 오히려 좋아.”
재석이 좋다는 말에 민경이 의아해했다.
“영화는 대부분 유명 배우들에게 대본이 들어가잖아요.”
“그런 경우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얼굴을 찾기 위해서 오디션을 보기도 해. 하지만, 이 자리는 분명 민경이 너를 위한 자리야.”
“아니면요?”
“내 눈이 삔 거겠지. 오로지 너를 스타로 만들겠다는 일념에 이게 맞는지 아닌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민경은 재석의 이야기를 듣자 조금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려는 그의 말이 가슴 아프게 들린 거였다.
“오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말아요. 저도 같이해 왔잖아요.”
재석은 민경을 한 번 보더니 웃었다.
“그래, 같이했지. 이 뒤에도 같이할 거고,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계속 같이할 거야.”
재석이 주먹을 불끈 쥐자 민경도 같이 따라 했다. 마치 전우애를 다지는 것처럼 말이다.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촬영 재개하겠다는 말에 민경은 대본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일 끝나고 자세히 알려 줘요.”
“알았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이 영화를 찍을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스케줄이 끝나자 곧바로 회사로 가는 차 안에서 민경은 궁금한 걸 물었다.
“여기 감독님이 유명해요?”
“아닐 걸. 충무로는 감독의 인지도와 관계없는 경우가 많아. 어차피 좋은 시나리오 들고 찍으니까. 그 감독만의 색깔은 있겠지만, 그 이상은 없어.”
“그럼, 영화보다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보면 되겠네요.”
“그렇지. 어차피 영화는 제작사 끼고 하는 일이니까.”
물론 영화라는 게 상황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이 개봉도 못 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일도 있었다.
‘뭐, 민경이가 스타가 됐으니 영화가 쉽사리 엎어지진 않겠지.’
영화사의 제일 고민은 티켓 파워를 보여 줄 인기 배우다. 재미난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대중들에게 통하는 인지도 있는 배우를 절실히 원했다.
“근데, 이거 저한테 온 거 아니면 직접 찾아가야 하나요?”
“그래도 되고 다른 걸로 관계자를 만나도 되고.”
“다른 걸로?”
“아주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날 수 있지. 너도 해 봤겠지만, 오디션이란 방법으로.”
“네?”
*****
어느 맑고 화창한 날 민경과 재석은 이한성이란 감독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감독은 민경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워하고 있었다.
“저······ 커피가 입에 맞으십니까?”
“네, 좋네요.”
민경은 지금까지 겪어 온 감독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 상전 대접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이렇게 오실 거면 차라리 저희 쪽에 연락을 취하시지, 왜 오디션장을 직접 방문하셨는지요.”
“아, 그게 저희가 전화로만 하는 것보다 직접 찾아오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요.”
민경과 재석이 오디션 날 가장 마지막 순서로 참석했음에도 오디션장은 난리가 나 버렸다. 유명 여배우가 직접 오디션장에 찾아왔다는 게 문제가 된 것이다.
나중에 오디션 관계자가 찾아와 민경과 재석을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하고 난 뒤에 오디션이 진행되었다.
오디션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 감독이 다른 이들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민경과 직접 만나러 온 게 지금 이 자리였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민경은 먼저 사과부터 하면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저희 쪽에 어떤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감독은 민경이 이 영화에 어떤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감독님, 솔직히 대본을 봤습니다. 그리고 이 대본에 나와 있는 심정은이란 역할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감독은 살짝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듣자 얼굴 표정이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감독님, 민경이는 무척 바쁩니다. 그 바쁜 사람이 없는 시간 쪼개서 헛소리하려고 오진 않습니다.”
재석이 민경의 대답을 대신 말하면서 상황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었다.
“제가 그럼 당장 제작사와 연락을 취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전화하고 오세요.”
감독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제작사와 연락을 취했다. 전화한 지 2분도 안 되서 감독이 다시 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계약하자고 합니다.”
“계약은 감독님이 직접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제작사에서 사람이 나오는 겁니까?”
“제작사 쪽에서 사람이 갈 겁니다.”
“그럼, 나중에 이쪽으로 연락 주시라고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민경의 오디션을 봐 주시겠습니까?”
오디션 이야기가 나오자 감독의 표정이 더없이 좋아졌다.
“물론이죠. 오디션을 봐야죠. 여기서 짧게나마 연습하신 걸 볼 수 있을까요?”
“네, 준비한 거 보여 드릴게요.”
민경은 곧바로 연기를 펼쳤고 감독의 연기를 보면서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아, 좋습니다. 정말 좋아요. 역시 스타가 괜히 되신 게 아닐 정도로 좋습니다.”
인기 없던 시절의 민경에게는 들을 수 없는 아첨이었다.
‘확실히 감독의 반응이 열렬한 팬이라고 생각될 정도야.’
“그럼, 계약이 성사되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연락할 명함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감독은 떨리는 손으로 재석과 명함을 교환했다.
“이한성, 이름이 꽤 좋네요. 입에 착착 감기고요.”
“아닙니다. 평범한 이름입니다.”
이한성 감독과의 만남은 민경을 데리고 있는 재석이 그만큼 위에 올라섰다는 점을 보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차 안에서 민경이 이한성 감독에 대해 이야기했다.
“감독님이 너무 저자세인데요.”
“처음이라 그럴 거야. 그리고 민경이 너처럼 스타를 데리고 영화를 찍는다는 게 정말 좋아서 그럴 수도 있지.”
“처음이요?”
“그래, 딱 봐도 나 처음 감독합니다. 이런 느낌 들잖아.”
“뭐, 뭔가 어설퍼 보이긴 했는데······.”
“그래도 입봉작으로 선택됐고, 거기에 너도 솔직히 이야기해서 이 대본 괜찮아 했잖아.”
“그거야, 그렇죠. 근데 감독님이 이 작품이 처음이라니······.”
“전에도 말했지만, 감독이 처음이라고 해서 일을 못하진 않을 거야. 너도 감독들 밑에 있는 조감독 혹은 조연출들 봐서 알지만, 다 감독 밑에서 힘들게 배워서 올라온 이들이야.”
재석은 민경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확실히 그러겠네요.”
“우리는 계약서에 나온 대로 이행을 잘해 주면 되는 거지. 물론 액수가 안 맞으면 살짝 심기가 불편해질 수 있지만.”
하지만, 제작사에서도 민경 정도 되는 스타가 온다는 건 정말 환영할 일이기에 충분한 배팅을 할 것이다.
*****
다음 날, 재석은제작사 사람과 이미 만나고 있었다.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이런 사람입니다.”
“제작자 한정구?”
제작사의 실질적인 운영을 하는 핵심 인물이 재석을 만나러 온 것이다.
“아니, 이렇게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인기 스타 임민경 씨가 출연할 영화 아니겠습니까.”
눈꽃연가에서 민경의 인기는 절정을 찍었고, 드라마에서 나왔던 빨간 목도리가 없어서 못 파는 사태를 불러일으킨 완판 배우가 되었다.
“그럼, 민경 씨의 출연료 협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 보도록 하죠.”
“그러죠.”
“출연료는 2억 5천 어떠십니까?”
한정구는 현재 민경의 출연료를 이 정도로 보고 있었다. 아무리 잘나가는 인기 스타가 됐지만, 아직은 그 한계점이 있었다.
‘이 아저씨 협상 질질 끌지 말고 바로 사인하라는 거군. 액수를 크게 불렀어.’
아직 한국 방송계는 내수용이다.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극히 일부. 한류 열풍이 불기 전과 후의 액수를 비교하면 거의 한류 열풍 전의 최고 가격이다.
‘민경이가 찍은 영화는 지금부터 늦던 빠르던 무조건 해외로 간다. 여기서 지금 돈 많이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중에 판권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 궁금하십니까?”
“혹시 해외에 영화를 판매할 계획이 있으십니까?”
“기회가 된다면 하고 싶죠. 하지만, 한국에서 그런 영화는 일부 예술 영화나 나가겠죠.”
“뭐, 혹시나 하는 마음인데, 그 조항에 수익 배분을 넣어 주신다면 액수를 조금 낮출 의향이 있습니다. 5천 정도 깎는 거 어떻습니까?”
재석은 지금 돈을 덜 받고 미래에 돈을 더 받으려고 거래 중이었다.
“흐음, 참 수상하십니다. 마치 한국 영화가 외국으로 나간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죠?”
“못 나갈 건 없죠. 홍콩에서 나온 영화가 한국에 오는데, 반대로 생각 못 할 이유가 없죠.”
재석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