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한정구는 재석의 말을 듣고 조금 의아해했다. 외국으로 이게 영화가 간다고 해도 그리 큰돈은 안 된다. 아직 한국 영화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냥 해 달라고 하는 거 아닙니다. 돈을 깎지만, 한 가지 조항과 한 가지의 부탁이 있습니다.”
“먼저 조항부터 이야기하시죠.”
“조항은, 해외 판권에 일부 수익을 얻고 싶습니다. 돈을 깎은 만큼의 수익이죠.”
“그럼, 부탁은 뭡니까?”
“제가 데리고 있는 아역 배우를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습니다. 거기에 아역에 해당하는 배역이 있더군요.”
“그걸 아시면 오디션 보게 하시지는······.”
“그게 사정상 때가 늦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게 출연료를 깎으면서 얻고 싶은 내용의 전부입니다.”
한정구는 뭔가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디 외국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그것도 영화계의 거물을 말이죠.”
“아뇨, 없습니다. 그냥 이 영화가 해외에 진출할 거 같습니다. 뭐, 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그럼, 그 아역이 누구입니까?”
“문자영이라는 아역입니다. 이전에 드라마도 출연했고 중간에 회사를 이전하면서 저한테 오게 되었죠.”
“아, 그 아역 배우 할머님에게 손찌검을 한 소속사가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배우 아닙니까?”
“맞습니다.”
“아하, 그 아역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에 나온 것도 봤고요. 나름 좋은 연기를 펼치는 아역이라 기회가 된다면 출연시키고 싶었는데, 이 회사에 소속되어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한정우는 문자영의 연기력이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 정도는 제힘으로 해결 가능한 부분입니다. 계약서 내용도 그렇게 돈을 깎으셨으니 그만큼의 조항 변경은 가능합니다.”
재석은 한정구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재석이 그 돈 못 받을 것 같으면 이런 말도 안 했겠지만 미래는 다르다.
‘해외 판권은 국내에서 버는 돈보다 액수가 크지.’
재석도 민경이 나간 영화가 얼마만큼의 이익을 벌어다 줬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국에 있는 좋은 성적을 거둔 영화들의 판권이 알게 모르게 판매되었었다.
언뜻 돈 액수의 차이가 얼마 안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아니다. 현재 민경이 출연한 드라마 눈꽃연가를 생각해야 한다.
회귀 전에는 나가도 액수 차이가 안 났을 거지만, 지금은 다르다.
‘해외로 가면 민경의 인지도가 달라진다. 동시에 인지도가 높아진 뒤의 액수 차이는 상당히 나지.’
이미 큰 그림을 위해 재석이 움직이고 있는 거다.
“근데, 정말 이유를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정도로 원하신다면 해 드리죠. 한두 푼을 깎으면서 원하시는 게 아니니까요.”
한정구는 재석의 제안이 타당성보다는 뭔가 수상하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남들은 쉽게 포기하기 힘든 액수를 포기하면서 다른 조항을 넣으려고 하는 게 우습기도 했다.
‘뭔가 좀 찜찜하지만, 그 정도 조항 넣어주지. 돈 아꼈군.’
하지만, 나중에 피를 토하며 후회하는 쪽이 누구인지 곧 알게 될 터이다.
“그럼, 완성된 계약서를 가지고 보도록 하죠.”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한정구 제작자님.”
*****
재석은 한정구를 보낸 뒤에 민경에게 계약 조건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민경은 깜짝 놀랐다.
“진짜 억 단위예요?”
“그래 억 단위이야. 나중에 회사에 오고 세금까지 정산하면 액수가 좀 줄겠지만, 그래도 억 단위라는 건 변하지 않아.”
“아, 정말 내가 억 단위 돈을 받게 될 줄이야.”
아직 돈이 들어온 건 아니지만 민경에게는 신비한 일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드라마가 끝나면 천만 단위의 돈을 받았다. 물론 억을 버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영화 한 번에 억 단위가 왔다 갔다 하는 배우가 된 거다.
“민경아, 너 아직 네 인기를 실감 못 하지?”
“뭐, 실감할 일이 있나요.”
“그래, 크게 실감은 안 나겠지.”
차라리 못 느끼는 게 좋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연예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모르고 사는 것과 같았다.
“다른 배우들도 하는 팬 미팅이라는 거 한번 해 보고 싶어요.”
“그거하고 싶으면 일단 스케줄부터 정리해야 해. 일정도 잡아야 하고. 요즘 너 찾는 사람들이 몇 인줄 아냐.”
“오빠, 회사 차렸는데 저 때문에 회사 돈벌이가 아주 잘되네요.”
“그래서 너무 고마워. 동시에 내가 너한테 아주 잘할게.”
“진짜죠?”
“물론이지.”
“그럼, 다음에 만취하면 안 돼요.”
“어허, 그거야. 그때뿐이잖아. 윤정호 감독 아니었으면 그때 안 먹었어. 다음엔 절대 안 먹어. 윤정호 감독급 아니면 나 절대로 안 먹는다. 대한민국에 그런 감독 이제 없다.”
재석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몇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윤 감독님 정도면 몇 명 더 있잖아요.”
“어허, 윤정호 감독님이 얼마나 잘나갔는데. 히트작이 몇 개인데. 여러 감독님 있지만, 그 감독님만큼은 아니지. 대충 영화로 천만 관객 동원하면 모를까.”
“한국에서 어떻게 천만 관객을 찍어요.”
“그 정도는 되야. 좋지.”
재석의 말에 민경은 절대로 재석이 만취하는 꼴을 못 볼 거라 생각했다.
“좋아요. 천만 넘으면 만취해도 되요.”
“그래, 좋지. 난 네가 꿈에서라도 그런 영화 한번 출연해 봤으면 좋겠다.”
“아마, 저 늙어 죽을 때까지 그럴 일 없을걸요.”
아직 한국에 천만이란 단위를 찍는 건 지금까지 없었다. 하지만, 재석은 알고 있다.
‘민경아, 아쉽지만, 내년부터 그게 시작이다.’
한국 첫 번째 천만 영화가 내년에 개봉된다. 그 영화는 민경이 끼어들 틈이 없는 남자들만의 영화다.
‘천만 영화 대부분 여배우가 활약할 만한 영화가 많지 않아.’
하지만, 미래에 잘나가는 여배우 중에 천만 혹은 그 근처에 간 작품 하나 있고 없고 차이는 무척이나 크다.
“후후.”
재석은 민경이 혼자 한 약속이 바로 골칫거리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사람이 만취하는 건 살면서 많지 않다. 미래에 나올 한국 천만 관객 영화 수보다 만취할 순간이 더 적을 거다.
“오빠, 웃지 마요. 뭔가 불길해요.”
“아니야, 그냥 너랑 이런 약속을 한 것 자체가 좋아서.”
“치, 말이나 못 하면······.”
다음 날, 재석은 회사에 계약서에 날아올 줄 알았는데, 온 건 이한성 감독의 전화였다.
“아, 감독님.”
-다른 게 아니라.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아역 배우를 만나라고 하던데요.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십니까? 만나야 할 아역 배우가 학교 끝나야 하거든요.”
-뭐, 시간만 알려 주시면 그때 알아서 찾아가죠.
“아, 그러지 마시고 제가 그곳에 다시 찾아가죠.”
문자영은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재석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조금 놀랐다.
“사, 사장님.”
“지금 차 타라. 가면서 설명할게.”
재석은 그렇게 문자영을 차에 태우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자영의 표정은 한껏 들뜨기 시작했다.
“사장님, 그럼 저 영화 출연하는 거예요?”
“그래, 출연하게 될 거다. 그러나 먼저 영화를 찍기 전에 감독이 직접 너의 연기를 확인하려고 할 거야. 영화에서 오가는 돈이 크다 보니 연기자의 연기력도 어느 정도 받쳐 줘야 하거든.”
“하지만, 대본도 못 받았는데.”
“대본은 여기 있다.”
재석은 준비된 대본을 건네줬고 짧게 말했다.
“거기에 있는 수연이란 역만 봐라. 주인공의 여동생이고 딱 아역이다.”
“알았어요.”
문자영은 대본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민경과 다르게 경험이 좀 더 있는 아이였던지라 대본의 내용을 다 읽고 금방 대본 내용을 파악해 버렸다.
“흐음, 배역은 좋네요.”
재석은 자영이 대충 파악한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겼다.
“대본에 있는 연기를 시킬지 아니면 다른 걸 시킬지 모르지만.”
재석은 이한성 감독이 있는 곳으로 가서 감독을 만났다.
“오오!”
이한성 감독은 문자영을 보자마자 감탄하면서 입을 열었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감이 안 왔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예쁜 소녀네요.”
예쁘다는 말에 문자영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그럼, 연기를 보시겠습니까?”
“아니요. 볼 필요 없습니다. 다른 방송에서 출연한 걸 이미 봤습니다. 연기 실력이 꽤 괜찮더군요.”
이한성 감독은 문자영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혹시 대본은 읽어 봤니?”
“사장님이 보여 주셔서 봤어요.”
“그래, 네가 해야 할 역이 뭐라고 생각하니.”
“음, 일단, 첫 느낌은 누나 같은 여동생이요.”
“맞다, 정확해. 내가 바라는 것도 그거다. 분명 여동생이지만, 누나 같은 여동생.”
이한성 감독이 원하는 대답을 곧바로 들어서 그런지 표정은 굉장히 상쾌했다.
“제작사에서 괜히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네요. 아역 오디션을 봤지만 마음에 드는 아역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고민이 사라지네요.”
이한성 감독은 곧바로 결정을 내렸는지 문자영을 향해 한마디 했다.
“내 연출하는 영화에 나와 주지 않을래?”
“지, 진짜요?”
“그래, 너만 한 아역 배우 찾기 힘들단다. 그리고 이미지도 꼭 맞고.”
이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재석을 바라보았다.
“전 사장님, 영화에 두 사람 꼭 출연시키게 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감독님이 원하시니 꼭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크랭크 인은 언제로 잡힌 겁니까?”
“5월 말입니다.”
“빡빡하네요. 가을에 개봉하는 거 맞습니까?”
“예, 이미 일정도 다 잡혀서 제작자님이 이거 엎자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갑니다.”
“그럼, 이야기 진행이 쉽겠네요. 지금 학교 다니는 자영이의 일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 그건 걱정 마십시오. 촬영은 전반부, 후반부로 나뉘어 진행하게 될 겁니다. 후반부 촬영은 전혀 다르게 촬영이 진행하는 거라 일정도 뒤로 밀립니다.”
이미 촬영 일정 계획이 다 잡혔는지 감독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그럼 일정이 따로 겹치거나 하지 않겠군요.”
“예, 전혀 겹칠 일이 없습니다.”
문자영과 임민경의 스케줄이 전혀 따로 놀게 되어서 어떤 의미로서는 다행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을 같이 관리해야 했는데 다행이군.’
배우들마다 서로 다른 스케줄 일정 때문에 사람을 한 명 더 써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아직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럼, 다음에는 촬영장에서 보도록 하죠.”
“네, 전 사장님. 가세요.”
감독의 배웅을 받으며 재석은 차를 다고 돌아갔다. 확실히 감독은 재석에게 잘 보여야 일이 잘 풀린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역시 이한성 감독은 약간 굽신거리는 느낌이 있어.’
그렇다고 정말 감독으로서 역량이 없진 않다. 미래에 개봉된 영화를 봐도 충분히 능력 있는 감독이라는 걸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사장님, 이제 저 출연하기 시작하면 학업은 어떻게 되나요?”
“아마, 방학 다 돼서 촬영 시작하니까 막상 학업에는 지장 없을 걸.”
5월에 찍어서 8월까지 진행되는 촬영이지만, 민경은 그 촬영 일정의 절반만 활약한다.
‘남은 기간은 좀 편히 쉬면서 다녀도 되겠네.’
민경이 원하는 팬 미팅 일정도 한번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팬 미팅을 잡을 여유가 생겼으니 일정도 잡아야겠어.’
재석은 며칠 뒤 두 장의 계약서를 받게 되었다. 하나는 임민경의 계약서였고 하나는 문자영의 계약서였다.
두 계약서에는 액수 차이가 있지만, 그걸 제외하고서는 차이가 별로 없었다.
“깔끔하군.”
문자영의 액수 역시 천만 원 단위로 나왔지만, 대학 등록금으로 쓴다면 그리 큰돈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디, 민경이 먼저 만나서 계약서 보여 줘야지.”
곧바로 재석이 민경을 찾아가 계약서를 보여 주자 정말 좋아했다. 특히 기록된 액수를 보고 말이다.
“내가 이 돈을 받는다니······.”
“아직 돈 안 받았고, 실수령금액은 절대로 그 금액 아니다.”
아무리 억 단위가 됐어도 세금과 소속사 간의 정산 과정을 거치면 확 줄어든다.
“물론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은 걸요.”
“나중에 한숨만 늘어날까 걱정이다. 그리고 나중에 세무사 고용해서 처리도 해야 돼. 너 돌아오는 5월에 종합소득세 신고해야 한다. 그때 내야 할 세금 생각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어.”
“정말, 기분 좀 내면 안 돼요?”
“미안한데 그럴 여유가 없단다. 너 작년부터 돈 벌었으니까 이번에 세금 폭탄 떨어질 거야.”
민경은 자신이 번 돈에 비해 소비가 굉장히 낮았다. 덕분에 그에 걸맞은 세금이 떨어질 거다.
“이전 회사가 파업 신고하면서 마무리 세금 정리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내가 거기 서류 미리미리 챙겨 놔서 제출하면 어찌어찌 세금 정리할 수 있을 거야.”
“그전에 회사에서는 회계 쪽 관리 안 해요?”
“이미 세무 회계 사무실하고 접촉했다. 그쪽에 우리 회사 일을 맡길 거야.”
“오빠 준비 철저하네요. 사업도 처음이면서.”
“처음······ 그래 처음이지.”
재석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 때문에 처음이라 말했지만, 처음이 아니었다. 한 번 해 봐서 회사 운영이 처음부터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게 맞았다.
“뭐예요. 그 아련한 느낌이 드는 말투는.”
“내가 언제 그랬다고.”
재석은 잡아뗐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민경은 들었고, 기억했다.
“가끔 오빠를 보고 있으면 수상해요. 그 얼굴 뒤에 나이 육십 세 되는 늙은 남자가 있을 것 같거든요.”
“야, 그러면서 내 볼은 왜 잡아당겨.”
“확인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