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계약서의 사인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먼저 민경이 계약서에 사인했고, 문자영은 그다음 날 사인했다.
문자영의 경우 할머니와 함께 계약서 내용을 확인했다.
물론 계약서 내용에 관한 설명은 재석이 이야기해 줬다.
“으아, 이제 영화 시작하기 전까지는 외근 별로 없겠네.”
하지만, 외근 별로 없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였다.
“사장님.”
“팀장님, 이거 뭡니까? 그리고 갑자기 웬 사장님.”
평소 주명진은 사장님 소리 안 하는데 갑자기 시작했다.
“한 번 해봤어, 어떤 느낌인지 보려고.”
주명진은 그 말을 하며 내민 건 소속 연예인들의 출연 스케줄이었다.
“이야, 많습니다.”
“민경 씨 덕분이지. 찾는 사람들이 많거든.”
“흐음, 여기 7월 달에 스케줄 하나 비워 주세요.”
“왜?”
“팬 미팅 겸 쉬는 날로 잡게요. 그리고 7월에 휴가 일정도 잡으라고 하시고요.”
“아직 회사 휴가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진 않을 텐데.”
“휴가는 보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쉬는 기간을 만들어야죠. 그리고 직원들 문화생활도 준비해야죠.”
“직원 복지 생각하는 거냐.”
“당연한 거죠. 휴가나 문화생활 없이 한 해를 넘기는 건 직원들에게 좋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돈이 꽤 나갈 텐데······.”
“그 정도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휴가 안 가는 사람에게는 돈으로, 갈 사람은 가는 걸로 말이죠.”
“돈도 없는데 직원들 휴가비를 줄 돈이 있냐?”
“지금 없지만, 금방 생깁니다. 그리고 회사 차릴 때 돈도 조금 남았고요.”
“너, 월세 살잖아.”
“큭!”
재석이 회사를 차렸지만 현재 월세살이 중이다. 다행히 월세가 싸서 살 만했다.
“꼭 전세로 가서 그 소리 안 나오게 할 겁니다.”
“직원인 내가 전세 살아. 사장님이 분발해야겠어.”
주명진의 가슴 아픈 한마디에 기필코 월세살이를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휴가비 안 줘도 되니까 너무 걱정 마. 지금 회사 사정 뻔히 아는데 그거 가지고 돈 달라는 사람 이 자리에는 없다.”
“반드시 그 전에 회삿돈이 넘쳐 날 겁니다.”
“그러기에는 회사 차린 시간이 너무 짧다.”
주명진의 말이 맞았다. 민경이 이리저리 일하며 돈을 벌지만, 돈 나올 구멍이 한정적이었고, 들어가는 기본적인 돈을 생각하면 재석의 손에 떨어지는 액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거 바뀝니다. 그리고 이번에 한일 월드컵 열리니까 거기에 따른 경기장 표도 살 겁니다.”
“진짜? 하지만, 경기 좌석 비용이 적지 않던데.”
“걱정 마세요. 이건 휴가와 별개로 진행 됩니다.”
“회사 세운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돈 쓴다.”
“걱정 마십시오. 회사 아주 잘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 상황도 하루빨리 바뀔 거고요.”
“그래, 빨리 바뀌어서 편하게 휴가비 받고 싶다.”
이미 재석은 조금만 기다리면 돈이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기다리세요. 좋은 소식 알려 드릴 테니.”
“재석아, 회사를 급하게 차리긴 했는데 고사 안 지내냐?”
“······.”
드라마 일정과 다른 사람 계약 회사 준비한다고 순식간에 지나가서 회사 차리고 개업식도 안 했다.
“이런 이런, 얼굴을 보아하니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어째 그걸 안 하나 했다.”
“말 나온 김에 바로 준비하죠.”
“때늦은 개업식?”
“네.”
재석은 이날 개업식 준비한다고 바쁘게 뛰어다녔고 소속 연예인들도 연락받고 급하게 달려왔다.
고기와 떡, 막걸리를 들고 재석이 사무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민경의 얼굴이 보였다.
“오빠!”
민경은 재석이 들고 있는 짐을 하나 받아들면서 소매를 걷어붙이며 일을 도왔다.
사무실 책상을 한쪽에 밀고 음식을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꽃 배달 왔습니다.”
“꽃?”
“어, 빨리 왔네.”
재석보다 민경이 먼저 앞으로 달려가면서 사무실 문을 열자 화환이 하나 떡하니 들어왔다.
“뭐야?”
“개업식 하는데 이런 거 하나 있어야죠.”
“넌, 무슨 돈이 있어서 이거 샀어?”
재석은 민경에게 뭘 이런 걸 샀냐 했지만, 급하게 준비한 개업식 날 그래도 민경이 이런 거 신경 써 주는 모습이 너무나 고마웠다.
“잔소리하면서 입꼬리가 귀에 걸렸네요.”
“커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 그런지 헛기침만 나왔다.
“너무 티 나요.”
확실히 티가 났다. 이럴 때는 민경이 재석을 신경 써 주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준비가 다 끝나자 저녁이 되었다. 소속 연예인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그 외에 찾아온 손님 한 명이 있었다.
“윤 감독님!”
“이야, 오늘 개업식? 이거 너무 늦은 개업식 아닌가.”
“이거 연락은 드렸지만, 찾아오실 줄은 몰랐는데······.”
“찾아와야지. 중요한 곳인데. 여기에 가장 핵심이 있는데. 꼭 찾아와서 얼굴 비춰야지.”
민경을 데리고 있으니 찾아왔다는 걸 돌려 말한 거지만, 재석은 상관없었다.
“지금은 한 명이지만, 미래는 모릅니다.”
아직 이들은 모른다. 이후에 들어올 사람 그리고 이후에 재석에게 발목이 잡힐 사람들을 말이다.
“뭐, 그리 욕심이 많아. 다른 사람들은 임민경처럼 대단한 배우 한 명 잡으면 그 사람 얼마나 잘 관리하는지 그게 문제던데, 전 매니저는 다르네.”
“앞으로 제 회사는 민경이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사람들로 넘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제발, 그렇게 되길 기원하지. 험난한 길이 되겠지만. 솔직히 나도 이곳저곳 가서 협상하고 접대하는 거 여간 곤혹한 게 아니야. 한 명 만나서 유명 배우 서너 명씩 받을 수 있다면 정말 좋지.”
“꿈이 너무 크신 거 아닙니까? 저야 찾으면 되지만, 그런 배우 출연시키려면 제작비부터 오버입니다.”
“하하하, 걱정 말게. 그때는 든든하게 총알 준비하고 나오지.”
“심히 걱정됩니다. 그러다 방송사에서 제작 지원 못 받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때는 우리 전 매니저가 투자해 주겠지. 유명 연예인 많으면 투자 지원할 만하잖아. 그때 되면 돈도 많이 벌었을 테고.”
“아니, 남의 돈으로 촬영하고 돈 버실 생각이십니까?”
“뭐, 어떤가? 어차피 서로 이득 보는 건 똑같은데.”
윤정호 감독의 말에 재석은 잠시 할 말이 없었다.
‘이 감독님, 가만 보니 도둑놈 심보잖아.’
그나마 어떤 인간들처럼 속내를 숨기고 다가오는 것보다는 훨씬 깔끔하긴 하다. 그리고 속을 내보인 만큼 어디서 속여 먹을 것도 없다.
“하아, 좋은 대본이 있다면 하죠. 하지만, 좋은 대본 안 들고 오시면 어림도 없습니다.”
“당연하지. 내 돈으로 시작해도 좋은 시나리오 아니면 시작을 하지 않아. 남의 돈이면 더더욱 확실해야지.”
“그럼, 좋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재석은 한쪽에 마련된 자리에 윤정호 감독을 앉게 했다.
좀 더 늦은 시간이 되자 아역 배우들이 보호자와 함께 대동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이거 축하드립니다.”
신지경의 아버지가 재석과 악수를 나누며 늦은 개업식을 축하했다.
“이거 작지만, 선물입니다.”
“뭘 이런 걸 다 준비하셨습니까.”
“사무실 공기가 탁할까 봐. 공기를 깨끗하게 해 줄 식물을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재석은 화분을 받아 들자 그 옆에 있던 최민철이 얼른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재석은 그 화분을 넘겼다.
“저쪽에 앉으세요.”
“사장님!”
“어이구, 귀여운 분이 오셨네. 요즘 프로그램 출연은 좋아?”
“좋아요. 정말 재미있어요.”
새로 출연하는 어린이 프로가 좋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어린이 프로그램은 즐거운 느낌이 강해서 분위기에 민감한 아이들은 바로 그 느낌을 타고 행동한다.
“그래도 그 촬영은 올해까지인 건 알지?”
“예? 올해만요?”
“한 해마다 아이들이 성장을 하니까, 같은 나이의 사람들로 바꾸거든. 그러니 너도 어쩔 수 없단다.”
“뭐, 아쉽네요.”
“걱정 마. 곧바로 재미난 일을 찾게 해 줄 테니까.”
“사장님, 기대할게요.”
신지경과 그의 부모님은 빈자리로 갔고, 그 뒤에 문자영과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님, 여기까지 오시는 데 힘드셨을 텐데, 쉬시지 왜 힘들게 나오셨습니까.”
“사장님, 아직은 힘이 넘칩니다. 손녀가 장성할 때까지는 움직여야지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래도 오시느라 힘드셨을 테니 저쪽에 앉아서 쉬십시오.”
재석이 직접 안내하며 문자영의 할머니를 자리에 앉게 했다.
“끙.”
자리에 앉기 무섭게 할머니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슬슬 힘드실 때도 됐는데 무리하시네.’
문자영의 할머니는 문자영이 성인이 되기 전에 고향으로 내려간다. 사고 이후 몸이 눈에 띄게 약해지시기 때문이다.
더 이상 운신하시기 어려울 만큼 육체적 한계에 도달하자, 손녀가 할머니의 몸 상태를 걱정해서 보내게 된다.
“오, 자영아, 여기서 얼굴을 보는구나.”
“아, 윤 감독님.”
윤 감독과 문자영은 눈꽃연가 전 드라마에서 잠시 호흡을 맞췄다. 벌써 시간이 좀 된 드라마지만, 아직은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전에 있던 소속사에서 나와서 이곳으로 왔구나.”
“사장님이 새로 소속사를 차려서 왔어요.”
“하긴, 전 매니저, 아니 이제는 전 사장인가······. 어찌 되었든 능력 있는 친구라서 일거리 못 따는 상황은 안 나올 거야. 그래서 뭐 하나 잡았어?”
“얼마 전에 영화 계약 하나 하긴 했어요. 비중은 별로 안 크지만.”
“어허, 비중이 문제가 아니야. 얼마나 현실감 있게 연기를 하냐에 차이일 뿐이지. 그걸로 영화를 본 관객이 널 기억하게 되는 거지. 저기 있는 민경이가 그냥 스타가 됐겠니? 절대로 아니야. 그만큼 연기에 대해 무수히 많은 노력을 한 결과란다.”
윤정호가 문자영의 연기관에 대해 꽤나 진정성 있게 대해 줬다.
“아직 네가 아역이지만, 성인이 되는 건 몇 년 남지 않았다.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니게 되면 연기에 대한 관객들의 싸늘한 시선이 던져질 거다. 그걸 아역일 때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한다. 그래야 성인이 되어서도 훌륭한 연기자가 된단다.”
윤정호는 이 기회에 좋은 아역 배우를 확실히 탈바꿈시켜 주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좋은 기회가 만들어졌어.’
원래 연기를 대하는 자세가 좋은 문자영이었다. 아직 어린 치기가 좀 남아 있었지만, 이제 그 부분이 깔끔하게 사라지게 만들었다.
재석은 미소를 지으면서 준비하다가 개업식을 시작하려고 했다.
“자자, 개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한쪽에 돼지머리가 떡하니 있고, 재석이 가장 먼저 나서서 술을 돌리고, 절을 하고, 약간의 이벤트적인 목적으로 돼지 입에 돈을 꽂아 넣었다.
“이야, 나도 개업식 한 지 몇 개월 안됐는데 여기서 또 새로 개업하는 사람을 보니 동질감 느껴지네.”
재석이 할 일 다 끝내고 뒤로 물러났고, 직원들도 뒤이어 차례를 이었다. 그다음은 손님인 윤정호의 차례였다.
“내 차례군.”
돼지머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다가가 술 따르고 절하고 돼지머리에 돈도 올려놓았다.
“늦었지만, 개업 축하하네.”
윤정호는 재석에게 다가가 손을 굳건하게 잡아 줬다.
“그리고 다음 작품도 함께하길 기대하지.”
“알겠습니다. 그것보다 일본 에이전시 소개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러지 않아도 내가 알려 주려고 왔네. 이쪽에 연락하게. 일단, 메일을 보내서 하게.”
재석이 받은 건 메일 주소 하나가 전부였다.
“혹시 어떤 사람인지 간략하게 들을 수 있나요?”
“일단 여자고, 나름 실력 있다는 게 전부야. 교민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네.”
“그럼, 영어로 이야기해야겠네요.”
“뭐, 그쪽도 영어 잘하니까.”
당연히 재석도 영어를 할 줄 안다. 전생에 한류 바람으로 위를 노리는 매니저치고 영어 못하는 매니저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메일 보내고 이야기 나눠 봐야겠네요.”
“하지만, 진짜 일본에 진출을 하려는 건가?”
“지금 당장은 안 합니다. 이리저리 확인을 해야죠.”
재석은 겉으로는 확인해야 한다면서 말을 아꼈지만, 속으론 무조건 진출이었다.
‘민경이가 일본어를 좀 배워야 하는데 말이야.’
그게 아니면 거기 가서 딱히 할 게 많진 않다. 그래도 일본에서 같이 뭔가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새로운 활로를 노릴 수 있다.
‘어쩌면 안 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일본에 연연할 필요가 없지.’
그래도 눈꽃연가가 일본을 강타하지만, 다른 국가에서도 눈꽃연가를 모르진 않는다. 일본만큼 유명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감사까지야. 드라마 잘나가는데 가벼운 부탁 아닌가. 솔직히 이것보다 더 큰 부탁을 했어도 들어줬을 거야.”
윤정호는 약속을 지켰다.
이제 재석이 일본 에이전시 측에 연락을 보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