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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민경은 차 안에서 선물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자 그 안에 백 하나와 봉투 하나가 있었다.
“어, 어.”
민경은 그 백을 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명 브랜드의 가방이 떡하니 들어 있는 거였다.
“뭐야, 뭐가 들었어.”
“가, 가방이요.”
그녀의 떨리는 음성에 재석은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했다.
“그거 어디 갈 때 사용하라는 거네. 그것도 공식 석상에서 말이야.”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거기서 공짜로 그거 줬겠어. 다 홍보해 달라는 거지. 그럼 다음에도 또 주겠다, 이거야. 평상시에 사용하는 건 화면에 한 번 나온 뒤에 사용해라 이거지.”
재석의 말을 들은 민경의 표정은 인상을 쓰면서도 금방 표정이 바뀌면서 좋아했다.
“뭐, 그렇게 고민할 거 없어. 나갈 만한 공식 행사에 참여해서 한 번 보여 주면 돼. 다른 건 뭐야?”
“상품권이요. 얼마야?”
“이, 이백이요.”
“흐음, 그걸로는 딱 하나 사면 사라질 건데.”
“네? 무슨 옷이 그렇게 비싸요!”
“흔히 말해 명품이란 것들 가격은 욕 나올 정도지. 뭐, 그만큼 사람들이 알아주긴 하지. 물론 가치의 문제는 각기 다른 거라서 의미가 없지만.”
“그렇게 비싼 옷은 몇 번 입는 것도 겁나겠네요.”
민경은 돈은 벌었지만, 그런 옷을 사 입진 않았다.
“원래 명품이란 사치품이지, 사치라는 이름에 걸맞은 물건. 살다 보면 그런 물건이 꼭 필요할 때가 있지만, 때가 되면 그런 물건이 의미가 없어지기도 해.”
“오빠, 이럴 때 보면 꼭 나이 든 할아버지 같아요. 친구들이 애늙은이라고 안 놀려요?”
“크흠.”
재석은 살짝 헛기침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아직 몸 나이는 서른도 안 됐지만, 하는 짓이 영감님 같아서 민경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 한 번 했다고 삐졌어요?”
“아니야······.”
“얼굴 보니까 삐진 것 같은데.”
“크흠, 아니야.”
재석은 삐지지 않았다. 잠시 허를 찔렸을 뿐이다.
“스케줄이나 하자.”
재석은 할 말 없으니 그렇게 말했지만, 민경은 재석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으흐흐.”
저 웃음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모르지만 나쁜 의미가 담겨 있진 않았다.
재석은 조금 찜찜해하면서도 스케줄을 진행했고 패션위크 기간 동안 꽤나 심심하지 않은 일정을 보냈다.
****
민경은 받은 상품권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당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어.”
“이걸 어떻게 써야 행복할까 고민 중이에요.”
그녀의 고민은 참으로 쓸데없는 고민이다. 그냥 가서 물건 사면 끝인데 말이다.
“저 좀 나갔다 올게요.”
“왜, 백화점 가서 확인하려고?”
“네.”
민경은 그렇게 사무실을 빠져나가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돌아왔을 때는 재석이 퇴근하려고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뭐야, 여기 왜 왔어. 집에 가야지.”
“오빠, 내일 시간 되요?”
“네 스케줄 없으면 오후 일정 그렇게 안 바빠.”
“그럼, 오후에 상품권 써요.”
“내가 짐꾼이냐?”
“짐꾼은 아니고 운전수.”
민경은 장난스럽게 말했고 재석은 갑자기 무슨 운전수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재석은 민경이 왜 운전수라는 건지 이해했다.
“이걸로 주세요. 개수는 말이죠.”
민경은 백화점 혹은 해당 부티끄에 들어서기 무섭게 거침없이 원하는 상품을 말하고 그 개수도 이야기했다. 물건 배달은 회사로 지정해 놓고 말이다.
“오빠, 다음 장소로 가요.”
“너, 상품권을 선물 사는 걸로 다 쓸 생각이야?”
“뭐, 어때요. 공짜로 받은 거고 해당 브랜드 말고는 쓸 일이 없잖아요. 저 혼자 쓰면 좀 미안하고 그러니까, 아는 지인들에게 옷이나 양말 같은 거 보내려고요.”
이미 아는 이들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 할지 이미 계산을 끝내 놓은 상태라서 거침이 없었다.
사이즈에 특별히 구애받지 않는 양말은 색상별로 정말 수백 켤레를 구매했다.
남성 여성 구분이 있는 경우 선물 받을 사람에게 일일이 물어보기까지 했다.
단, 재석에게는 물어본 게 없었다.
“근데, 난 안 물어보냐?”
“오빠는 나중에 할 거니까 벌써부터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선물이 있어?”
“물론이죠.”
역시 민경이다. 하지만, 민경이 다녀간 곳에는 남성이 사용할 만한 게 별로 없다. 향수 혹은 양말, 이 정도다. 여성 브랜드에 초청된 게 많았다. 아니면 그것과 관계없거나.
하지만, 그녀가 간 곳은 다른 것도 아니고 특정 아이템이 유명한 브랜드였다.
‘모블롱?’
“여긴, 만년필이 유명한 걸로 아는데.”
“오빠도 알고 있었네요.”
“이름만 들었지 실제로 그 물건을 본 적은 없어.”
회귀 전에 이름만 들어 봤고 그 근처에도 간 적이 없었다.
“근데, 여긴 왜?”
“선물이요.”
“엥?”
민경은 자신의 개인 사비를 털어 재석에게 선물해 주려는 거였다.
“아니, 왜?”
“이건 회사를 잘 이끌어 가라는 투자자의 선물이에요.”
민경은 웃으면서 재석에게 그 비싼 만년필을 선물로 주었다.
“하아, 선물은 고맙게 받을게. 근데 이거 계약할 때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말고는 사용하기 어렵겠는데.”
“뭐, 만년필이 좀 그렇긴 하지만, 계약할 때 사용하면 일단, 폼 나잖아요. 그리고 저랑 계약할 때도 그냥 볼펜으로 썼잖아요. 얼마나 볼품없었는데요.”
“그때야, 돈이 없었잖아.”
불과 몇 개월 전 이야기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만 재석은 돈을 더 모아서 지금의 사무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오빠는 회사를 더 키울 거야?”
“물론, 더 키울 거야. 내가 만든 건물에 내 회사 직원들이 들어가서 일하고 그 안에 수많은 연예인들이 소속되어 있는 그런 소속사.”
“흐음, 그런 건물이라면 꽤나 커야 할 것 같은데?”
“많이 커야지. 층수만 10층이 넘는 그런 커다란 건물, 그 꼭대기에 내 사무실이 있는 거지.”
재석이 꿈꾸는 미래, 회귀 전에도 꿈꿨던 미래. 아직은 이루지 못했던 그 꿈이었다.
“지금의 오빠라면 한 30년 뒤에 될 걸.”
“하하하! 30년!”
말이 좋아, 30년 재석은 그 시간까지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절반도 안 되는 시간으로 이룩해 주지.’
물론 지금의 사무실을 옮기는 게 가장 우선 과제다. 돈 벌어다 줄 연예인들 숫자도 늘려야 한다. 매니저들 숫자도 중요하고 말이다.
“민경아, 이 만년필 정말 고맙다.”
“오빠가 고맙단 말 안 해도 지금 메시지 폭주하고 있어요.”
부우웅!
민경은 어떤 선물을 보낼지 이미 핸드폰으로 문자했는지, 여러 사람에게 미친 듯이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전화가 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감사의 문자가 한동안 쏟아지다가 잠잠해졌다.
그러다 다시 울리기를 여러 번이었다.
“이야, 선물 받은 것도 아닌데. 문자 폭탄이네.”
“호호호.”
다음 날에도 회사 사람들은 민경이 들어오기 무섭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어머, 정말 고마워요.”
코디인 이혜정도.
“이야, 역시 민경 씨가 회사 탑 배우야.”
주명진 팀장도 반응이 화끈했다.
“민경 씨, 정말 감사합니다. 문자로도 보냈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호호호, 뭘요.”
선물 한 번 쫙 돌린 효과는 정말 며칠 갔다. 권진우 역시 민경의 선물을 받았는데 반응이 신기했다.
“저도 꼭 돈 많이 벌면 선물 해 드릴게요.”
기이한 승부욕이 생긴 것 같았다. 뭐랄까 돈 벌어서 회사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모습이 성공한 사람처럼 보인 모양이다.
“너무 그런 걸로 승부욕을 불태우진 마세요.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이 순수해야 받는 사람도 그 순수함을 느낄 수 있거든요.”
재석은 승부욕으로 던지는 선물이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그것보다, 준비는 잘되고 있습니까?”
“예,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맡는 주인공 역이라서요.”
“기대하겠습니다. 이번에 잘만 하면 권진우 씨가 탄탄대로를 걸을 겁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잘해야 한다는 걸요.”
첫 주인공.
이걸 잘하면 진짜 스타의 길을 걷게 된다. 물론 그의 연기에 대한 승부욕은 쉽게 볼 만한 게 아니다. 민경과 같이 데뷔했지만 그 시작점이 달랐던 그에게 있어서 꼭 넘어서야 하는 산이기도 했었다.
“연기 수업도 같이 받아 보시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민철이 말하더군요. 회사에 연기 선생님이 있으니 이야기해 보라고요. 이미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다면 딱히 할 이야기가 없네요. 수업을 받으실 겁니까?”
“받고 있습니다.”
영화 계약 이후에 벌써 만났다면 재석이 따로 신경을 쓸 게 없다.
‘이제 알아서 하겠어.’
권진우는 회사 사장 입장에서 진짜 손댈 일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럼, 영화 촬영장에서 간혹 보게 되겠네요.”
“촬영장에 오실 겁니까?”
“갈 겁니다. 당장 민경의 스케줄이 별로 없어서 회사 전반적인 일을 보겠지만, 특히 권진우 씨는 회사 창립 멤버 아닙니까. 민경이 때문에 신경 못 썼는데, 신경 써야죠.”
재석의 목적은 그 영화에 나오는 조연 혹은 단역들에게 있었다.
‘딱 한 명 있지. 미래의 슈퍼스타.’
재석은 그 사람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계약은 되어 있는지 아니면 혼자서 발로 뛰고 있는지 말이다.
“그럼, 촬영장에 자주 보게 되겠네요.”
“뭐, 민경의 스케줄이 없는 날은 자주 가게 될 겁니다. 물론 민철이 따라가지 않는 날은 없겠지만, 제가 가는 날은 촬영장에 분위기를 좀 띄우게 될 겁니다. 이를테면 먹는 걸로요.”
권진우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도 말이다.
“사기 진작이군요.”
“첫 주인공이니 힘을 줘야죠. 그래도 소속사 사장이 들어가는 자리니까요. 다른 이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죠.”
목적이 확실했고, 사람들도 다 아는 거지만 현장 분위기 제대로 띄워 주기에는 아주 좋았다.
배우의 주목도를 높이기에도 아주 좋았다.
‘딱 한 명만 잡으면 돼.’
그 한 사람이다.
물론 그는 지금 별로 인지도가 낮은 상황이다. 그래서 재석이 잡으려는 거다.
‘다른 회사랑 계약을 했을까?’
했는지 안 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하루빨리 권진우의 영화가 크랭크 인이 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판이다.
‘몸이 근질거려 죽겠어.’
하루빨리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걸 못 하니 견디기 어려웠다.
‘인내해야 해. 어차피 약간의 순서만 차이가 날 뿐. 다 내가 손에 쥘 사람들이야.’
재석은 혼자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 만날 수도 없는 일이니 기다려야 했다.
****
민경이 나오는 영화 촬영이 끝나고 편집도 끝났다. 그러자 바로 하는 일이 영화 홍보를 위해 뛰어다니는 거였다.
하지만, 배우들이 모든 행사에 다 참여하긴 불가능했고, 그중 영화사가 제시한 스케줄에 몇 개 정도만 참여했다.
“흐음.”
민경은 눈앞에 있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고민했다.
“예능 프로 나가는 것 때문에 그래?”
“한 번도 이런 방송을 한 적이 없어서요.”
“월드컵 할 때 잘도 하더니.”
“그때는 경기 보고 응원하고 골이 터지면 같이 환호하는 것 말고는 없었어요. 그게 전부였는데.”
‘이명규가 간다’의 시청률은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월드컵의 힘이지만, 동시에 민경의 등장이 그렇게 만들었다.
20대인 민경의 활기찬 에너지 분출은 사람들에게 스타들도 똑같이 월드컵에 열광한다는 걸 보여 줬다.
똑같은 감정의 공유는 민경의 인지도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줬다.
“그냥 나가서 작가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뭐, 어디서 애인 있냐. 혹시 감추고 있는 거 아니냐. 이딴 소리는 적당히 핑계대고.”
“하아, 애인 있으면 좋겠다. 진짜로 없으니까 그 말 들으면 너무 가슴 아파요.”
너무 바쁘게 지내서 연애는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어허, 지금 당장 애인이라니. 회사가 별로 크지도 않아서 한 번 스캔들 터지면 감당이 안 돼요.”
“걱정 말아요, 오빠······. 정말 없으니까.”
“다행이네, 어디 가서 스캔들 터질 걱정은 없어서 말이야.”
“에휴.”
민경은 재석의 얼굴을 보면서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기쁜 소식 하나 있다.”
“뭔데요.”
“솔로 축하한다.”
“뭐예요!”
민경은 재석에게 달려들어 가슴팍을 두들겼다. 재석은 그걸 그대로 맞았지만, 아프지 않았다.
“하하하, 걱정 마라 나도 솔로다. 솔로 천국, 커플 지옥!”
재석은 이 말이 이때 유행했는지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민경이 들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이 중요했다. 지금 재석이 솔로였고 그 동지들이 이 세상에 널려 있다는 거다.
“꼭, 애인 만들어서 복수할 거야!”
민경은 당차게 이야기했지만, 쉽지 않을 거다.
“하하하, 애인 만들기 전에 오늘 방송국 가서 작가와 이야기 나눠야 해. 바쁘다. 움직여야지.”
“아으! 얄미워!”
민경은 투덜거리면서도 재석을 따라 방송국에 가서 작가와 면담을 가졌다. 프로그램의 진행이 어떠니 저거 어떠니 하는 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