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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과 민경은 예능 프로 작가님과 사전 인터뷰를 가지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해피 작가 이지연이라고 합니다.”
“작가님, 안녕하십니까.”
“근데, 매니저님이신가요?”
“예, 제가 담당 매니저입니다.”
“오빠, 직함 하나 더 있잖아.”
민경은 재석을 놀리듯 묻자, 이지연 작가는 재석의 무슨 직함이 더 있는지 궁금했다.
“매니저님, 새로 직함이 생기셨나요?”
“직함은 아니고, 제가 새로 회사를 차려서 그런 겁니다.”
“아! 그럼 새로 차린 회사에 이런 분과 계약하신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와아, 대단하시다. 정말 운 좋으시네요.”
“호호호, 그렇죠. 오빠 운 좋은 줄 알아야 해.”
재석은 그 말을 듣고 그냥 웃기만 했다. 운은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좋았다.
‘그래, 회귀하고 첫 출근한 날 민경을 선택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운이 좋다고 봐야겠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래의 기억과 그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 그 자체가 ‘운이 좋다.’ 이거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호호호, 그럼 매니저님이 아니라 대표님이라고 불러 드려야겠네요.”
“아니요. 사장 직함은 다른 일을 할 때 써야 할 직함이고, 지금은 민경이 매니저로 온 거 맞습니다.”
“그럼, 먼저 프로그램 진행부터 말씀드릴게요.”
이지연 작가는 대략적으로 촬영이 어느 정도 걸리는지,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 알려 줬다.
“그런데 질문 내용은 어떤 게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흐음, 저희들이 준비한 질문이 있긴 하지만, 그건 대략적인 거고 MC들이 개인적으로 묻는 질문들까지는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대본도 대략적으로밖에는 없고요.”
이지연의 말은 대략적인 순서, 그 안에 몇 가지 핵심적인 걸 빼면 MC의 재량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의 진행이 이때부터였나.’
예능에 점점 핵심 내용을 제외하고는 대본이 빈약해지는 시기가 찾아오는 시대였다.
“이렇게 하면 촬영이 길어지지 않습니까?”
재석이 묻자 이지영 작가는 순순히 수긍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방송을 재미나게 만들기 위함이에요. 다른 건 없습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민경이 이미지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면, 전 다 좋습니다.”
“걱정 마세요. 최대한 민경 씨를 최우선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사전 인터뷰가 끝나자 다음은 촬영 날짜에 맞춰서 방송사에 찾아가면 되는 일이다.
***
촬영 당일 민경은 대기실에서 프로그램 콘셉트에 맞게 이미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깔끔하게 마친 뒤였다.
“준비되셨습니까?”
“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촬영장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민경은 따라 움직였다.
“근데, 방송사 안으로 들어온 건 처음이네요.”
지금까지 민경은 여러 작품을 했지만, 직접적으로 방송사 안으로 온 적은 없었다.
“아, 그랬던가?”
재석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다.
“오빠, 매니저가 그걸 기억 못 하면 어떻게 해요.”
“방송사에 찾아오는 것보다 출연한 드라마 시청률과 작품이 더 중요해서······.”
재석의 말에 민경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 살짝 민경은 궁금해졌다.
“제 생일 며칠이에요?”
“11월 23일, 그 정돈 기억하고 산다. 네 키는 대충 알고 쓰리 사이즈는······.”
즉답이었다.
“아, 그만요.”
민경은 쓰리 사이즈 이야기가 나오자 재석의 입을 막았다.
“오빠,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요. 남들이 들으면 오해해요. 쓰리 사이즈라니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네. 언제 그건 알았어요?”
재석은 입을 막은 민경의 손을 가만히 치우면서 입을 열었다.
“그건, 몰라.”
“뭘 모른다는 거예요?”
“쓰리 사이즈, 모른다고 말하려다가 네가 입을 막았어. 코디는 알겠지만, 난 몰라. 여배우라 그런 정보는 기억하지 않는 게 배려 차원에서 좋다고 생각했거든.”
“······.”
민경은 가는 동안 재석이 평소에 얼마나 배려해 주고 있는지 알았다. 회사 안에 있으니 민경의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알 수 있지만, 일부러 묻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민경은 잠깐 걷는 속도를 늦추더니 재석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며 걸었다.
“하여튼.”
민경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둘은 곧 촬영이 준비되고 있는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민경이 안으로 들어가며 인사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쏠렸다.
“민경아!”
민경과 같이 이번 영화에 출연했던 이영주가 나왔다.
“어머, 영주 언니.”
민경은 영화 촬영이 끝난 뒤에 이영주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동안 못 본 사이에 얼굴 환해졌네.”
“언니는 촬영 잘 끝났어요?”
“나야, 잘 끝났지.”
영주의 시선이 민경의 옆에서 스튜디오를 바라보고 있던 재석으로 향했다.
“매니저 사장님이랑 같이 왔네. 아주 붙어 다니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야.”
“어머, 언니.”
민경은 이영주가 이상한 소리 할까 봐 입단속을 시켰지만, 장난기가 발동한 영주의 반응은 더 짓궂었다.
“매니저 사장님.”
이영주가 재석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아, 예.”
재석은 어정쩡하게 다가왔다.
“꼭 나한테만 저렇게 오더라. 내가 무섭게 생겼나.”
“언니가 장난이 심해서 그런 거잖아요.”
“호호호, 내가 언제.”
촬영장에서 둘의 연기는 항상 심각했지만, 촬영장 밖에서는 활기찬 둘이었다.
‘미래에 죽을 사람.’
사람은 다 죽지만, 젊은 나이에 죽는 사람에게는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이영주는 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미래에 자살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참 찜찜해.’
재석은 이영주를 처음 봤을 때 조금 놀랐다. 아니 잊고 있었던 사람을 만나서 말이다.
한번 고민하게 되었다.
‘죽게 될 사람을 살리면 어떻게 될까?’
분명 미래의 일이 바뀐다. 아니, 민경의 일도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관리되는 사람과 관리 안 되는 사람에 대한 구분은 명확히 하고 있었다.
이영주는 관리 안 되는 인물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그러던데 꼭 저한테 다가오는 건 어려워하시네요.”
“아, 아닙니다.”
민경은 재석이 이영주를 만날 때의 반응이 사뭇 평소와 다름을 느꼈다.
그러면서 민경은 재석을 한 번 툭 쳤다.
“오빠, 나랑 있을 때랑 달라. 많이 부끄러워해.”
그녀는 내 사람이라고 생각한 재석이 영주에게 대하는 반응이 다른 듯하자 시기심이 생겼다.
“부끄러워하는 거 아닌데.”
하지만, 민경의 눈에는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맨날 영감님처럼 하더니 지금은 소년이네.”
민경의 반응은 무척 날카로웠다. 마치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어머, 민경아. 너 오늘 날카롭다. 마치 애인 빼앗긴 것처럼.”
“누, 누가요.”
민경의 반응은 당황 그 자체였지만, 그걸 본 이영주는 그녀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민경은 화들짝 놀라면서 손사래를 치며 강한 부정을 나타냈다.
이영주가 웃으면서 다시 민경에게 속삭이자 민경이 갑자기 차분해지면서 둘의 반응은 다시 평상시로 돌아갔다.
‘뭐라는 거야?’
여자들의 반응을 일일이 파악하는 건 너무 어려워서 재석은 오히려 신경을 꺼 버렸다.
잠시 뒤, MC들과 함께 민경과 영화를 찍었던 남자 주인공 차인혁이 들어오자, 모두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차인혁이 잠깐 MC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에 촬영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하하하.”
해피의 두 MC중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신종엽이 시작부터 크게 웃었다.
옆에 있던 지효민이 궁금증을 표했다.
“아니, 왜 웃으세요.”
“왜 웃다니요. 당연히 즐겁죠. 이전에는 시커먼 남자들만 있다가 향기 나는 아름다운 여성들과 있으니 말이죠.”
“저도 여자잖아요.”
“에헤, 효민 씨는 매일 봐선지 너무 익숙해져서 관심 밖이고, 옆에 계신 이영주 씨나 임민경 씨는 아주 그냥.”
종엽이 남심에 불을 지르는 두 여성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럼, 저는요.”
같은 게스트인 차인혁이 직접 묻자, 신종엽은 너무 생략된 반응을 보였다.
“아, 예.”
너무 상반된 반응에 여자들은 웃음보가 터지면서 아주 즐거워했다.
“민경 씨, 이번에 영화 출연도 했지만, 이전에 했던 드라마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너무 좋으시겠어요.”
민경이 찍었던 눈꽃연가 이야기가 나오자 쑥스러워하면서도 싫어하는 내색을 하진 않았다.
“그 작품이야, 워낙 유명하신 분들이 있고 전 그저 숟가락만 얻었을 뿐이에요.”
민경은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신종엽은 달랐다.
“에이, 그래도 기분 좋으면서.”
“호호호.”
그 말에 결국 민경은 입을 가리며 숨길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또 이영주에게 물었다.
“저쪽이 너무 웃음이 터져서 영화 이야기를 못 할 것 같으니 영주 씨에게 물어볼게요. 이 영화 어떤 영화인가요?”
“이 영화는······.”
이영주가 출연한 영화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이야, 역시 신종엽이네. 흐름에 막힘이 없어.’
젊은 나이에도 이때 당시 최고의 MC로 군림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그렇게 잘 흘러가다가 영화 비하인드 이야기도 나왔고, 같이 찍은 영화 이야기만 쭉 나오다가 신종엽이 다시 민경의 이야기를 물었다.
“그런데 민경 씨, 계속 드라마만 찍다가 이번 영화가 처음이잖아요.”
“네.”
“드라마 찍을 때와 느낌이 많이 달랐나요?”
“달랐어요. 처음에는 제가 너무 신인이라 민폐를 끼치는 거 아닌지 걱정 많이 했거든요.”
“에이, 잘하던데. 드라마 보니까 너무 잘해서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나조차 모르겠던데요.”
“아니에요. 너무 떨어서 NG도 많이 냈었어요. 그때마다 매니저 오빠가 긴장을 잘 풀어 주셔서 잘할 수 있었어요.”
민경의 대답이 너무 딱딱했다. 평소처럼 톡톡 튀는 그런 것도 없고 진중한 대답만 해서 재석은 걱정이었다.
“그래요? 매니저가 얼마나 잘해 줬으면······ 민경 씨의 어떻게 긴장을 풀어 줬어요?”
“너무 닭살 돋는 말이라서 좀 말하면 창피해할 건데요.”
창피해한다는 말에 재석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젠장.’
“괜찮아요. 어떤 말을 해 줬는지 너무 궁금해요.”
“그게, 음······.”
민경이 대답을 곤란해하자. 신종엽이 나섰다.
“아, 괜찮아요. 재미없으면 편집하면 되니까. 피디님, 편집 OK?”
피디는 당연하게도 OK 사인을 보내자 민경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입을 열었다.
‘아이고, 그걸 믿냐. 이 순진한 여자야!’
재석은 이 말을 외치고 싶었지만, 저 카메라 너머로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 ‘난 너의 시야에서 겨우 몇 걸음 떨어져 있다. 멀리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안심해. 위험하면 내가 언제든지 달려올게.’라고 하셨어요.”
“으으으!”
남자들은 버터 한가득 바른 멘트를 듣자 온몸을 긁어 대는 시늉을 했지만, 여자들의 반응은 좀 달랐다.
“진짜로 그랬어요? 대단하네. 우리 매니저는 그런 말 절대 안 하는데.”
지효민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매니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좀 본받으라고 했지만, 재석은 창피해서 귀까지 빨개진 상태가 되었다.
‘아, 도망가야겠네.’
이미 저 말이 나갔으니 무조건 방송에 나간다. 예능 피디가 이런 좋은 걸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재석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순식간에 작가가 다가왔다.
“어머, 어디 가세요? 자리에 앉아 계셔야죠. 매니저님 이야기 나오는데.”
도망치는 것도 틀렸다.
그때 신종엽이 민경을 재촉하며 물었다.
“이야, 그런 버터 한가득 부은 매니저 어디 있나요?”
“저기 저쪽에······.”
민경이 손을 들어 가리키자 시선이 다 한곳으로 쏠렸다.
재석이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어서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 방송 나오는데 얼굴을 손으로 가리시다니요. 손 내리세요.”
지효민의 말에 재석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얼굴이 빨개지셨네. 자기 이야기 직접 들으니까 민망하신가 보네요.”
재석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또 그런 느끼한 말 했어요?”
“처음에만 그랬고, 다음에는 광고 촬영을 할 때였는데······ 제가 감정이 잘 안 잡혔을 때, 어릴 적 기억 중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 뭐냐, 그걸 생각하며 감정을 상기시키라고 했죠.”
민경은 꽤나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주변 반응은 달랐다.
“이야, 매니저가 열일하네. 세상에 연기자의 연기를 그렇게 도와주는 매니저 찾기 쉽지 않은데.”
차인혁은 대단한 매니저를 데리고 있다면서 칭찬했다. 그 역시 연예계에 몸담은 시간이 아주 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그만큼 그를 지나간 매니저들 숫자가 적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야, 그런 매니저 있으면 나 연기 생활하는 데 너무 편하겠는데. 어려울 때 딱딱 도움 주고.”
민경은 차인혁의 말을 듣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표정이 환해졌다.
“부럽네.”
졸지에 민경의 매니저의 존재감이 떠오르면서 아예 카메라 한 대가 재석을 잡고 있었다.
재석은 창피한지 도망가려고 했지만, 피디의 지시로 작가가 재석의 발을 꼭 붙잡고 어디 가지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거기에 카메라가 찍고 있으니 뿌리칠 수도 없었다.
‘망했다. 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