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39화 (39/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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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갑내기의 첫 촬영장에 권진우와 그 뒤로 재석과 민철이 양손 무겁게 물건을 들고 스태프들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재석은 소속사 사장이지만, 이런 일을 마다하지 않고 다른 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눴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잘 드시고 혹시 더 필요하시면 또 드리겠습니다.”

재석과 민철은 사람 숫자에 맞추지 않고 더 많이 준비해서 나눠 줬다.

준비한 건 약밥이었다. 작은 주먹밥 형태로 만들어서 나눠 줬다 포장도 깔끔하게 해서 나눴기에 포장된 비닐을 벗겨 내고 간단하게 먹으면 되었다.

“오, 이거 맛있는 건데.”

“이거 직접 준비한 것 같은데······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영화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준비한 겁니다.”

재석은 아주 능수능란하게 대답하면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쪽인가?’

재석은 약밥을 나눠 주기 위해 단역 혹은 조연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 안에서 많은 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도중 재석이 나타나자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재석은 직접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인사와 함께 나눠 주다가 그가 찾던 사람과 시선을 마주쳤다.

“이야, 굉장히 잘생기셨네요. 키도 크시고,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재석의 물음에 그의 대답이 나왔다.

“예? 주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혹시 임민경 씨 매니저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에 TV에 나온 걸 봤습니다.”

“아, 예능 프로를 보셨군요.”

재석은 주유가 먼저 알아봤다는 게 너무 기분 좋았다.

“주유는 혹시 본명입니까?”

“아닙니다. 활동명입니다.”

활동명이라면 재석이 아는 그 사람이 맞다.

“아, 그럼 혹시 소속사가 있으십니까?”

“예, 있습니다.”

“아쉽네요. 멋지게 생기셔서.”

재석은 아쉬운 표정을 하며 뒤돌아섰다. 마치 다음 기회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이 아니면 저 사람을 얻을 수가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유야, 오늘 촬영 끝나면 바로 광고 촬영이야.”

“예, 알겠습니다.”

“근데, 너 꼭 연기해야겠냐?”

재석의 귀에 ‘꼭 연기해야겠냐.’ 라는 말이 들리자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매니저 형, 아시잖아요. 저 연기 좋아하는 거.”

“하아, 알기야, 알지. 광고만 찍고 살아도 돈 더 많이 버는데, 꼭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일 잡아 주고 있지.”

‘커피 왕자님이 연기를 먼저 하고 싶다고 했었다?’

“사장님도 그렇게 싫어하는 걸 끝까지 밀어붙이는 너도 참 대단하다.”

“연기만 할 수 있게 해 주면 저 다른 거 다 할게요. 광고 하라면 하고 다른 거 하라면 할게요. 근데 꼭 연기는 하고 싶어요.”

“너, 이번이 조연 마지막인 건 알지?”

‘조연이 마지막?’

재석은 조연이 마지막이라는 말에 주유의 속사정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런 속사정이 있다면 내가 파고들어 갈 여지가 있어.’

재석은 기회라는 듯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듣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안 주시나요?”

약밥을 원하고 있는 다른 단역 연기자의 말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저쪽 이야기가 재미있게 들려서요.”

재석은 시선을 저쪽에 두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게 아쉬웠다.

“하아, 그리고 오늘 데려다주는 건 되는데 다시 돌아가는 건 너 알아서 해. 회사의 다른 땜빵 해야 해서.”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재석은 순간, 기회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파고들 틈을 찾았어.’

매니저가 배우를 내팽개치고 간다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도 없지만, 주유와 소속사 간의 사정 때문이라도 현재의 그의 사정이 별로 안 좋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광고로 돈이 잘 벌리고 있다는 게 문제인데.’

돈도 못 버는 상황이라면 주유도 저런 말 못 했을 거다. 하지만, 연기만 할 수 있다면 다른 것도 다 하겠다는 말에 절실함이 느껴졌다.

이 당시 주유는 연기자로 데뷔한 것보다 모델로서의 인지도가 빠르게 상승했던 시절이다. 큰 키에 모델처럼 완벽한 비율, 기묘한 매력을 가진 외모. 비주얼 측면에서는 아주 멋진 사람이지만, 데뷔 초창기에는 잘나갈 듯하면서도 안 나가고 있었다.

단역과 조연들이 재석이 나눠 준 약밥을 간식으로 다 먹은 뒤에 촬영장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 한번 갑시다. 액션!”

감독의 액션 소리에 다들 숨죽이고 있었다.

핑! 딱! 핑! 딱!

뚜껑 있는 라이터의 뚜껑을 한 손가락으로 튕기며 열었다 닫았다가를 반복하며 첫 장면이 시작되었다.

권진우가 시작부터 라이터를 들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이 숨을 빨아들이는 순간 표정이 찡그려졌다.

“컷!”

감독의 컷 소리가 나기 무섭게 권진우는 거친 기침 소리를 냈다.

“콜록콜록!”

일평생 비흡연자로서 살아온 권진우에게 이런 담배 연기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준비한 금연초인데도 불구하고 어렵네.”

“아, 아닙니다. 더 하면 익숙해질 겁니다.”

권진우는 지금 이 중요한 기회를 날려 먹을까 봐 다급하게 말했지만, 표정은 이미 별로 좋지 않았다.

감독은 약간 한심한 듯이 권진우를 보며 말했다.

“그럼, 시도 한 번 더 해 보고 결정하죠.”

감독의 말이 권진우에게는 사형 선고와 같았다.

“감독님, 잠시 배우가 심신의 안정을 위해 딱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이때, 재석이 끼어들며 감독에게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조감독, 5분 이따 하자.”

감독은 직접 재석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조감독을 불렀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재석은 바로 권진우에게 다가갔다. 진우는 전과 다르게 굉장히 압박감을 느끼는 듯했다.

‘이런 상태로 연기하면 곤란해.’

이대로 가면 수많은 NG를 낼 수 있다.

“권진우 씨, 괜찮습니까?”

“예, 이제는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연기 때문에 곤란하실 수 있을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영화 대박 납니다. 대본이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상하기로 관객수 500만짜리 영화입니다. 제 감이 정확하다는 건 이제까지 경험으로 아실 겁니다.”

“물론이죠. 여러 대본을 보고 좋은 드라마 찾아낸 거야, 알죠.”

“이번에도 촉이 옵니다. 이 영화 대박이라는 거. 그래서 제가 러닝 개런티 계약을 요구한 겁니다. 물론 그쪽에서도 받아들였죠. 어차피 저희에게 줄 돈, 그리 크지 않으니까요. 거기에 권진우 씨, 민경이만큼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습니까?”

권진우는 승부욕이 강하다. 특히 연기자로서 인기를 얻고, 연기로써 인정받는 걸 좋아한다. 민경이처럼 스타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원하고 있다.

“이 영화, 대본만으로 성공할 영화입니다. 스타의 자리가 코앞에 있는데 이런 담배 피는 연기 하나 때문에 굴복할 순 없죠.”

“물론입니다.”

권진우의 눈빛이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시죠.”

재석은 권진우를 뒤로하고 감독을 향해 다가갔다.

“감독님, 준비 됐습니다.”

“벌써요?”

“주인공 눈을 보고 판단하시면 될 겁니다.”

감독은 재석의 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돌려 권진우를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권진우의 눈빛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음?”

담배 피는 신을 찍고 난 뒤에 권진우는 조금 곤란해 하는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 따윈 없었다.

“사장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효과는 빠르네요.”

“그래도 연기 끝나고 콜록거리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카메라 도는 동안에만 멀쩡하면 됩니다.”

감독도 카메라 밖에서 기침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였다.

“그런 거라면 권진우 씨가 잘 참고 버틸 겁니다.”

재석은 그리 말하고 저 뒤로 빠졌다.

“자, 그럼 다시 한 번 갑시다.”

감독의 말에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다시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셨지만, 전처럼 기침 따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빛이 더 독기가 가득하게 바뀌었다.

“컷! 권진우 씨, 눈에 너무 힘 들어갔어. 좀만 여유롭게 합시다.”

“콜록, 콜록! 예, 감독님 알겠습니다.”

여전히 기침했지만, 권진우는 카메라가 도는 동안에는 아주 멀쩡했다.

그리고 촬영의 회를 거듭하면 할수록 금연초의 연기에 익숙해지면서 표정도 더 좋아졌다.

첫 촬영에 권진우의 상대역인 주유 역시 연기를 꽤나 잘했다.

영화가 로코라서 그런지 약간의 과장이 있었지만, 그것도 나름 재미 요소였다.

“이때도 괜찮게 하기는 했네.”

재석은 권진우도 열심히 하는 걸 봤지만, 그래도 주유 쪽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다.

‘어디, 촬영 끝나고 어떻게 되는지 좀 봐야지.’

재석은 더 이상 자리할 이유가 없었지만, 주유를 얻기 위해 이 정도 기다리는 거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지.’

지금 당장 소속사가 있지만, 속사정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재석이 빼앗을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다.

재석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촬영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수고하셨습니다.’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주유는 촬영이 끝나자 다들 차에 오를 때 혼자 터덜터덜 걸어갔다.

“후우.”

주유는 혼자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촬영장을 걸어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유 씨!”

뒤돌아선 주유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아, 재석 씨.”

“혼자 가십니까?”

“예, 매니저가 회사에 급한 일 때문에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혼자 집에 가는 길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저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집에 갈 생각입니다.”

“권진우 씨와 같이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쪽은 매니저가 따로 있고, 일 끝나고 집에 쉬러 가는데 제가 옆에 있어 봤자 휴식에 방해만 될 뿐이죠.”

“네? 하지만, 소속사 사장님인데······.”

“일 끝나고까지 사장님 노릇 하고 싶진 않네요.”

“전에 방송에 비춰졌던 모습이랑 비슷하네요.”

“뭐가 비슷하다는 거죠.”

“약간······ 평소에 자주 쓰지 않는 말을 자주 날리시는 거.”

“······.”

방송사에서 별명을 만들어 주는 바람에 이상한 선입견이 생겨 버렸다.

“뭐, 어찌 되었든 오늘 일 끝났는데, 저녁이나 같이 먹으러 갈까요?”

“네? 하지만······.”

“걱정 말아요. 더치페이나 이런 거 해 달라고 하지 않으니까.”

“그런 게 아니라······.”

“촬영할 때는 그렇게 열심히인데, 이렇게 대화하는 모습은 꽤나 자신감 부족이군요.”

매니저가 연기 그만하면 안 되겠냐고 할 정도로 사람 기를 죽여 놓고 있었다. 주유는 데뷔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시작부터 조연을 꿰차고 있다.

‘솔직히 조연 정도만 되도 회사에서도 좋게 볼 수 있는데 대놓고 구박을 하니 사람 기가 죽지.’

‘잘한다, 잘한다.’ 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상황을 만들었으니 주유는 지금의 소속사에 대한 불만이 많을 거다.

두 사람은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주유라는 이름을 들으면 꼭······.”

“주유소 생각나시죠?”

“네, 맞습니다. 그 이름에 사연이 있습니까?”

“예명으로 부모님 성을 따서 이름을 만든 겁니다.”

“깊은 뜻이 있었군요.”

커피 왕자님 예명의 뜻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은 모르는 척 해 주는 거다.

재석은 이제 서론은 적당히 들었으니 본론으로 넘어갔다.

“미안하게도 제가 약밥을 나눠 주면서 불미스런 이야기를 좀 듣게 됐습니다.”

“아, 매니저와 하는 대화를 들으셨군요.”

“그렇게 됐습니다. 근데 왜 연기자에게 연기를 그만두고 광고를 찍으라고 하는 겁니까?”

“그게, 제가 처음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게 광고 쪽이라서 그런 겁니다. 연기와 다르게 광고 쪽에서는 제가 인기가 많은가 보더라고요.”

무척이나 쑥스러운 듯 주유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광고 쪽에 일이 잘되면 상당한 돈벌이가 될 텐데요.”

“그게, 저한테 떨어지는 돈이 얼마 안 되더라고요. 아마도 싼값에 광고를 찍는 모양이에요.”

“어떤 광고에 출연했습니까?”

“아, 그러니까······ 의류 쪽에 세 개 나갔고 화장품, 주류, 금융 쪽에 하나······ 그 외에도 세 개 더 나갔네요.”

“컥! 데뷔한 지 얼마나 됐죠?”

재석은 주유가 광고 쪽에서 꽤나 활약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연기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서 이 정도면 광고계의 루키다.

“연기를 시작한 지 이제 2년째입니다. 실제로는 1년 조금 넘었고요. 민망합니다.”

‘분명 메인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신인이 이 정도면 굉장한 거야. 연기로 빛을 못 보고 있었는데, 저 우월한 외모로 광고계를 주름잡고 있었구나.’

재석은 ‘될 놈은 된다.’라는 인간을 눈앞에 보고 있으니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대단하네요. 신인이 광고계를 주름잡을 정도라니.”

“아니에요. 돈도 석 달에 한 번이나 받는 수준인걸요.”

“석 달에 한 번?”

이상했다. 그만큼 찍은 광고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저 정도 찍었으면 큰돈은 아니더라도 매달 생활비는 충분히 나온다.

“네, 딱 백만 원 나오던데요.”

“그게 진짜입니까?”

“예, 저 같은 신인은 이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을 봤나!’

재석은 회귀 생활을 통틀어 매니저 생활이 30년 이상이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돈 빼먹는 인간들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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