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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이 강하게 나오는 모습에 보디가드는 곤란한 모습을 보이다가 뒤로 물러섰다.
“이쪽으로 오시죠. 위에 연락하겠습니다.”
재석과 민경은 잠시 옆으로 빠졌다. 하지만, 그 뒤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민경이 왔다는 걸 보고 놀라면서도 동시에 시선을 그쪽으로 주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들어가기에 앞서 민경에게 말을 거는 이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임민경 씨 맞으시죠.”
“예, 맞아요.”
“전, 디자이너 이상홍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제 쇼에 모델로 한 번 나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그건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는데.”
“제가 매니저입니다. 저한테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 매니저분이랑 같이 왔군요. 화면에서만 보다가 실제로 보니 너무 아름다우신데, 제 쇼에 출연시키고 싶습니다. 혹시 안 되겠습니까?”
재석은 저 패션쇼 안은 찜찜했지만, 이렇게 일거리 주는 사람은 반가웠다.
“아, 언제 계획하십니까? 차후에 일정이 있어서 정확한 날짜를 말씀해 주신다면, 저희가 일정 확인을 통해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재석은 스케줄 이야기를 꺼내자 이상홍은 웃으며 말했다.
“아직 날짜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연말에 계획하고 있습니다.”
“연말이라면 아직 저희도 잡혀 있는 계획은 없지만, 대충 작품 하나 정도 선택하고 하고 있을 때네요. 그리고 그때라면 연말 시상식인데 그 시즌만 아니라면 충분히 참여 가능할 겁니다.”
“연말 시상식 그건 최대한 피해서 연락을 드리죠.”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제 명함입니다.”
“저도 드리죠.”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나중에 연락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디자이너는 보디가드에게 초대장을 보여 주며 들어갔지만, 그 뒤를 이어 민경에게 다가온 사람도 있었다.
“저기 사인 한 장만······.”
“예, 해 드릴만한······.”
민경이 해 주고 싶어도 테이블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 그럼 나중에 안에서 좀 해 주세요.”
“예.”
슈퍼스타가 된 민경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건 기본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보디가드가 다시 다가왔다.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결국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녀에게 다가오려던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사람들에게 지정석이 있었다.
“이래서 매니저 보고 들어가지 말라는 거였군.”
지정석은 매니저가 끼어들 요소가 없다. 애초에 그걸 배제한 구성이었다.
“왜요? 지정석이라도 옆에 의자 하나 놓으면 되잖아요.”
“비슷하지만, 테이블 세팅을 보면 예쁘게 숫자가 정해져 있지?”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 네 옆에는 아마 널 굉장히 궁금해 하는 인간들이 있을 거야. 조심해. 아마도 너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일 거야.”
“그건 좀 부담인데요.”
“아니, 막상 그들이 너에게 말을 거는 건 절대로 부담을 주지 않을 거야. 천천히 그리고 재미있게 할 거야.”
재석은 왜 찜찜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저 자리가 딱 넷. 민경을 제외하면 셋 전부 다 남자겠지?’
“근데, 같은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이 누굴까요?”
“다들 남자. 그리고 한 기업 회장들의 자식들이지.”
“와우, 대단하네요.”
“오늘 아마 돈지랄의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저 보려고 이러는 걸까요?”
민경은 살짝 그 부분에서 기대하는 것 같지만, 재석이 한마디 했다.
“정말 너 하나 때문에 이런 걸 했을까?”
재석이 되묻자 민경은 스스로도 너무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을 보니 대충 감이 오는 모양이네. 그리고 이야기해 보면 다 좋은 사람들 같을 거야. 그러면서 결혼은 딴 여자랑 하지.”
“정말 그래요?”
“쉽게 이야기해서 자신의 부를 나눌 생각이 전혀 없는 이들이지. 그리고 결혼하면 너 연기 관둬야 해.”
연기를 관둬야 한다는 말에 민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직 하고 싶은 열정 가득한 상태인데 그걸 못 한다고 하니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건 좀······.”
“재벌집 며느리는 그런 거야. 모든 걸 포기하고 집에서 내조만 해야 하는 사람.”
“전 결혼은 해도 일을 그만두고 싶진 않아요. 물론 아이를 키우는 데 집중하는 시간을 꼭 가질 거고요.”
“그리고 난 의심이 가. 저 자리에 모인 이들이 정말 널 며느리고 맞이하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하룻밤 재미 삼아 노는 장난감으로 생각해서 불렀는가 말이야.”
재석의 무서운 말이 민경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일단, 상대의 의도가 별로 좋지 않아. 그런데 내 자리는 어디야?”
재석은 기본적으로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임시로 마련한 자리가 한쪽 구석에 의자만 덩그러니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 자리에는 민경의 얼굴이 겨우 보이는 자리였다.
“쯧, 망했군.”
하지만, 얼굴이 보인다는 게 다행이었다.
“하아, 이럴 때는······.”
재석은 품속에서 뭔가를 하나 꺼냈는데,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물건이라 다른 사람들 눈에 쉽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걸 가만히 이마를 손으로 집는 척하면서 자세를 잡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봐도 재석의 행동은 그냥 주먹으로 이마를 바치고 있는 걸로 보였다.
민경은 자리에 앉고 나서도 저 멀리 재석이 있는 자리를 확인했다.
멀긴 하지만 재석이 보였는데 그가 말아 쥔 손으로 이마를 받치는 모습과 함께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바로 자?”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매니저가 한껏 이 자리 위험한 느낌 든다면서 말해 놓고, 자는 모습을 보이는 게 어이가 없었다.
“저 오빠가.”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바로 옆 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멋진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민경에게 인사를 건네자 민경은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민경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면서 속으로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오빠가 봤으면 눈 더럽다고 한마디 했을 얼굴이네.’
아니나, 다를까 재석은 입을 열었다.
“눈 참 더럽네. 눈깔을 확 파서 간장에 찍어 먹고 싶을 정도로.”
재석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주먹을 쥐고 있던 손에서 뭔가 살짝 반짝였다.
“비싼 돈 주고 포켓 스코프를 산 보람이 있네.”
재석은 이날 만일을 위해 준비한 포켓 스코프를 샀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가장 작은 걸 샀는데 그게 제일 비쌌다.
“확실히 비싼 값을 하는구나.”
재석은 멀리 있는 민경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서 보일 정도로 굉장히 좋았다.
남들이 보기에 재석은 여전히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이 아니라 민경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뚜벅뚜벅.
순간 재석의 근처로 누가 오는 소리가 들리자 재석은 황급히 자는 척을 했다.
재석은 실눈으로 살짝 누가 지나가는지 보고는 그들이 보디가드라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 조용히 눈을 떠서 그들의 뒤통수를 슬며시 봤다.
‘저기로 가네.’
보디가드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정해진 위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재석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그러면서 재석은 혹시 몰라서 조심스럽게 관찰을 다시 시작했다.
재석이 관찰하기 무섭게 민경의 옆에 또 다른 남자가 자리했다.
“반갑습니다.”
“예.”
“늦었네.”
“그래, 늦었다.”
남자 둘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임민경 씨.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네요.”
하지만, 민경은 속으로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설마 남은 자리도 남자야?’
재석이 말한 대로 점점 흘러가는 게 불안한 민경이었다.
“저기 실례지만 다들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예, 전 이런 사람입니다.”
한 남자가 내민 명함에 민경은 헛웃음이 나왔다.
“기인모직 이사, 최민준?”
민경은 최민준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놀라기보다는 그냥 무관심이었다.
‘오빠 말한 대로 흘러가네. 저 앞에 남자가 앉고 다른 두 사람 소개받고 뭐, 연락처 받거나 일거리 받거나 혹은 그러는 건가.’
현실이 너무 드라마처럼 흘러가니까 민경에는 그 어떤 감흥이 오질 않았다. 각본대로 흘러가는 드라마 대본처럼 느껴진 거였다.
“딱, 카메라만 있으면 드라마 해도 되겠네.”
“갑자기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시는 겁니까?”
“정말 놀라서요. 아직 서른 안 되신 것 같은데 맞죠?”
“그렇습니다. 아직 서른 안 됐습니다.”
민경은 그 말에 살짝 웃으면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뒤에 있던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요.”
“아, 죄송합니다. 워낙 예쁘신 분을 옆에 두고 있어서 말이죠.”
예쁜 여자가 있다는 말에 민경이 살짝 웃었지만, 그 웃음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말씀 감사합니다. 근데, 예쁘다는 말, 제가 듣고 싶은 분이 따로 있어서요.”
따로 있다는 말에 두 남자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설마, 누구 만나는 사람 있으십니까?”
“그럼 있죠. 연예인이라고 해서 연애하지 말라는 말 없잖아요.”
“그, 그렇죠.”
민경이 그 이야기를 끝내기 무섭게 다른 남자가 또 왔다.
‘진짜 남자가 왔네.’
민경은 마지막 올 사람이 왔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아무것도 손대면 안 된다는 걸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자리에 사람이 다 앉게 되는 사이에 민경은 눈앞에 있는 남자들과 이야기하면서도 절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하고 있는 테이블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나왔지만 먹지 않았다.
“왜 안 드세요?”
“여기 오기 전에 이미 배부르게 먹어서요.”
“그래도 한번 드셔 보세요. 호텔 최고 셰프가 준비한 음식입니다.”
당연하게도 민경은 먹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재석이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이 자리가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님을 몰랐을 것이다.
‘여기 계속 있어야 돈을 받겠지?’
민경은 이미 이 일로 인해 받는 돈이 크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을 거다.
‘그런데 아직도 자나?’
그녀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재석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걸 보았다.
‘어휴, 어제 잠 좀 많이 잤으면 여기서 졸고 있지는 않을 거 아냐.’
아직 재석의 손에 뭐가 있는지 잘 몰라서 그녀는 살짝 오해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일 열심히 하는 건 알지만, 자리에 앉기 무섭게 졸 정도라니. 하여간······.’
민경은 눈앞에 있는 남자들이 보건 말건 고생하는 재석이 안쓰러우면서도 열심히 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생겼다.
그 미소를 본 남자들이 민경의 기분이 좋아진 걸 확인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까?”
“할아버지 생각이요. 지금도 절 너무 예뻐해 주시거든요.”
할아버지라는 말에 남자들 반응은 ‘손녀를 귀여워할 수 있지.’라는 반응만 있었다.
문제는 그 할아버지가 몸은 굉장히 젊다는 게 문제였다.
민경은 그 뒤로 음식에 손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자리를 했다.
쇼를 보고 나서도 마지막에는 모델들을 향해 걸어가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모델들 앞에서 옷을 고르는데 마치 마네킹을 보는 것처럼 보고 있었다.
“이거 좋네, 저것도 좋고. 이거랑 저거랑 저거 그리고 저거.”
그 여자는 남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쇼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 신영이는 꼭 저렇게 옷을 골라야 해?”
“몰라, 냅둬. 사람이 입고 있는 상태에서 골라야 한다잖아. 너희들은 안 골라?”
“고를 거야.”
남자들은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인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
민경은 이들이 옷을 고르는 행태를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얼마 있지 않아서 남자들이 위로 올라가 옷을 고르러 올라간 사이에 재석이 조심스럽게 자리에 일어나 민경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민경아,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민경은 어느새 다가온 재석을 보고 놀라면서도 얼른 따라나섰다.
“이때까지 자고 있었어요?”
“무슨 소리야, 잤다니. 난 이걸로 널 계속 보고 있었는데.”
재석이 손을 펼치자 작은 포켓 스코프가 눈에 들어왔다.
“망원경?”
“이걸로 몰래 보고 있었다.”
“그럼 미리 말을 했어야죠. 전 오빠가 자는 줄 알았는데.”
“가자.”
재석의 말에 민경이 앞장서며 나가자 보디가드들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자리에 돌아가 주시죠. 아직 쇼는 안 끝났습니다.”
보디가드 한 명이 아주 딱딱한 투로 말하자 민경이 명함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분이 절 로미노 호텔로 오라고 해서 지금 먼저 가려는 길인데요. 방은 이미 스위트룸을 잡았다고 했어요.”
“아, 그러시군요. 죄송합니다.”
그녀의 말에 보디가드는 길을 비켰고 그 뒤로 재석과 민경을 붙잡는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