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오사카 여행을 하면 할수록 재석은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아니, 자리만 비우면 남자가 오냐.”
“글쎄요. 지금 버린 명함만 해도 벌써 열 장이 넘네요.”
“명함만 열 장이냐. 전화번호 물어본 사람은 몇이야?”
“몰라요. 무슨 말을 하는지 기본적으로 모르니까.”
민경은 배시시 웃으면서 재석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오빠, 불안하죠?”
“크흠.”
불안했다. 여기서 어떤 남자 놈에게 채 갈까 봐. 내년이면 한류스타가 돼서 아시아를 주름잡는 여배우가 되는데, 그걸 망치는 요인이 생기면 그것만큼 조심스러운 것도 없다.
“얼굴에 다 쓰여 있네요. 나 불안해 죽겠다고.”
“에휴, 그래 불안하다. 네가 남자에게 마음을 주면 거기로 갈 거고, 사람 마음이 정해지면 거기로 흘러가는 거 어떻게 막겠니.”
“할아버지가 손녀 걱정하는 것처럼 온갖 걱정을 다하네요.”
“그럼 걱정 안 되겠냐.”
“걱정 마요. 난 말 안 통하는 남자하고는 안 만나니까.”
“어디 유럽의 초절정 미남이 나타나도 그런 말 할 수 있겠어?”
“진심이에요. 말 안 통하는데 어떻게 연애를 해요. 아무리 멋져도 전 대화가 안 되면 못 해요.”
민경은 진심인지 거의 확신을 하고 있었다.
“오빠, 저 믿으세요. 제가 오빠를 믿는 것처럼.”
다른 누구도 아닌 의리녀 민경이다. 그녀의 말은 곧 믿음이었다.
“그래, 지금까지 네가 나에게 보인 모습은 의리와 믿음이었지.”
그러다가 재석은 배에서 기이한 신호가 잡혔다.
“크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배 아파요?”
재석의 낯빛이 무척이나 어두워져서 민경은 바로 알아차렸다.
“아, 빨리 다녀와요. 나중에 더 큰일 나기 전에.”
재석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러면서 당부를 했다.
“또 남자 만나면 그때는 너 내 팔짱 끼고 내가 남자 친구 행세할 거야.”
재석은 딴 놈들이 아예 딴생각을 못하게 애인 행세를 할 생각이었다.
“오빠, 저 나중에 시집은 갈 수 있어요?”
“10년 후에 보내 줄게.”
“아이고, 할아버지. 이 어여쁜 손녀 굽어 살피세요. 남들은 시집보내고 싶어서 안달이라는데 여기 이 할아버지는 절 붙잡고 안 놔주네요.”
둘은 한 편의 꽁트를 했지만,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 간다.”
“네.”
재석이 화장실로 가기 무섭게 한 남자가 민경을 보고 달려와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대화가 통하는 남자였다.
그는 처음에는 일본어를 했다가 민경이 쏘리 쏘리 하며 거절을 하자 그는 곧바로 영어로 이야기했다.
“영어 할 줄 아세요?”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민경은 더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는 곧바로 한국어로 대답했다.
“어떻게 하지?”
이 남자는 한국어가 들리기 무섭게 한국어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 한국분이시군요.”
“어······.”
순간 민경은 멍해졌다. 영어는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한국어가 튀어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거다.
“저기 괜찮으세요?”
“아, 네.”
흔들리는 정신줄을 붙잡으며 민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그녀의 낯가림이 나타난 거였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세요?”
“아, 아니요.”
“같이 온 일행이 있으신가요?”
“예, 있습니다.”
민경은 재석이 왜 빨리 안 나타나는지 마음이 다급해졌다.
“저기, 죄송하지만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저기서 봤는데 너무 아름다우셔서 꼭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남자는 애절한 표정으로 민경에게 구애를 했고, 민경은 그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탓에 거절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바로 그때, 재석이 나타났다.
“누구신데 제 여자 친구에게 이러십니까?”
“네?”
재석이 갑자기 끼어들며 하는 말에 그 남자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 찰나에 민경이 재석의 팔에 팔짱을 꼈다.
“여기 제 남자 친구예요······.”
민경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재석을 잡고 있는 그 손은 아주 굳건했다.
“아······ 그, 그러시군요. 일행이 애인인 줄은······.”
“한국분이신가요?”
“아닙니다. 일본인입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잘하시는군요. 꽤 오래 배우셨겠네요.”
“예, 그렇습니다. 전 이만 바빠서······.”
그 남자가 사라지자 민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빨리 오사카를 벗어나야지, 이거 남자들이 이렇게 꼬이나.”
“오빠, 미안해요.”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예쁜 게 죄지.”
재석의 예쁘다는 말에 민경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그럼요. 저처럼 예쁜 여자한테 남자는 항상 꼬이기 마련이죠.”
“아이고, 그 잠깐 사이에 기가 산다, 살아.”
“오빠, 가요. 가는 동안 애인 대행이죠?”
“그래, 꼭 그렇게 하자. 남자들 너무 꼬인다.”
민경의 재석의 옆에 딱 붙어서 숙소로 갔다.
숙소에 들어가서는 각자의 방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오사카 일정을 끝낸 뒤.
“오빠,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도쿄로 다시 돌아갈 거야. 거기서 간단히 쇼핑하고 일정을 끝낼 거야.”
“아쉽네요. 벌써 가야 하다니.”
“걱정 마. 기회는 또 있으니까. 도쿄에 가면 한인 타운에서 한식이나 먹을까?”
“네!”
한인들이 몰려 있는 오쿠보에 있는 한식당에 찾아가자, 그곳에서 일하는 교포들이 민경을 보고 난리가 났다.
“어서 오······.”
주인부터 그 안에서 식사를 하는 교포들의 시선이 민경을 향하고 나서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
다들 일순간 뇌정지가 찾아온 거였다. 그다음 행동은 놀람이었다.
“이, 이게······.”
“이, 임, 임민경이다!”
“에에에!”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말들 이때 당시는 한인 식당에는 교민과 한국인을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일본인이 없었다.
“자리 있나요?”
재석의 한마디에 가게 주인이 달려 나왔다.
“이, 이쪽으로 오세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재석이 민경에게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
“어떻게 할래?”
“뭘요?”
“사인이나 사진을 찍어 달라는 사람이 나오면 말이야.”
“해 드려야죠.”
재석은 민경의 승낙이 떨어지자 식당 안에 있는 이들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임민경 씨 매니저입니다. 혹시 사인을 받고 싶으신 분 있으시면 종이와 펜을 가져와 주세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분 한정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게 주인부터 얼른 달려 나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식사 끝나시고 사진 한 장 괜찮으시겠어요?”
“예, 물론이죠.”
재석의 말에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종이와 펜은 가게 주인에게 빌려서라도 가져왔다.
“줄을 서세요.”
졸지에 민경은 사람들에게 사인과 악수, 그리고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사람도 달려 나와 사진을 찍을 정도였다.
재석과 민경이 식사를 끝낸 후 계산을 하려니까 주인이 통 크게 말했다.
“돈 안 받아도 됩니다.”
그 말에 민경과 재석은 미안해졌다.
“아니, 그러지 마세요. 나중에 말 나오면 골치 아픕니다.”
“여기 일본이에요. 한국이 아니니까 소문날 걱정 없어요. 그냥 가세요.”
“그럼 그냥 갈 수 없으니까 가게에 홍보될 만한 걸 해 드리고 갈게요.”
“아이, 무슨······.”
“괜찮습니다. 민경아.”
“오빠, 뭐 하면 돼요?”
“바깥에 나가서 어서 오세요, 몇 번만 하자.”
“그래요.”
둘은 밖으로 나가서 힘차게 외쳤다.
“여기로 오세요. 여기 음식이 맛있답니다!”
그 단 한 번에 한국어를 아는 사람들이 다 시선을 돌렸고, 민경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 임민경이다!”
민경은 자신을 알아본 이들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이 안에서 식사를 하실 분 한정해서 사인을 해 드려요.”
아주 즉흥적으로 꺼낸 건데 반응은 좋았다. 순식간에 그 식당에 손님이 가득 차 버렸다.
그 뒤에 사장님의 표정이 한껏 밝아져서 너무 좋았다.
“민경아 돌아가자. 밥값 했다.”
한인 식당은 민경이 교포들에게 인기가 있음을 검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데 저 이곳에서도 꽤 인기 있네요. 교민들 한정이지만.”
“아니, 난 네가 일본에서도 충분히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오사카에서 들러붙은 남자 숫자만 봐도 그렇지.”
“오빠,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마지막에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알아요?”
“그래도 통하는 걸 알았잖아.”
“일본 여자들이 질투하는 소리 들리네요.”
“질투하라지.”
재석은 내일 한국에 돌아가서 민경의 영화 관객이 얼마나 되는지 대략적으로 추산할 작정이었다.
‘아직 전산으로 완벽히 관객 숫자가 파악되지 않는 시기라 영화관에서 대략적 숫자만 추산되는데 잘될지 모르겠네.’
재석은 몇 년 뒤 미래의 기술이 그리웠다. 지금도 그 기술은 존재했지만, 아직 영화관에는 적용되지 않은 상태였다.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관객 수보다는 많아야 돼.’
재석이 기억하기로 대략 160만 정도였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 나온 정보라서 완전하진 않았다.
‘딱 200만 되도 이득인데 말이야.’
늘어난 숫자만큼 민경의 인지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될 거다.
“하아, 한국으로 내일 가야 한다니 너무 슬퍼요.”
“원래 여행이 그런 거지. 출발할 때는 기대를 가지고 출발하고, 돌아갈 때는 아쉬움만 잔뜩 남지.”
“그래도 일본 여행은 오빠 덕분에 정말 재미있게 보냈어요. 혹시 바라는 거 있어요?”
민경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재석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잘 놀았는데 뭘 바라겠어.”
“오빠, 오늘도 영감님 같아요. 마치 내일 죽을 사람처럼.”
“에이, 무슨 재수 없는 소리.”
“늘 느끼는 거지만, 오빠 심장은 너무 늙었어. 나 같았으면 비싼 거 뜯어내려고 하겠다.”
“난 널 얻어서 너무 좋아.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
“진짜요?”
“난 지금 행복하다.”
재석은 정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실히 영감님이야. 아니면 해탈한 인간이거나.”
“뭐?”
재석이 버럭 소리를 쳤어도 민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했다.
“회사 차린 거 보면 욕심 무지하게 많을 텐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비싼 돈 들어가는 것보다 난 사람 마음을 얻으면 더 좋더라.”
마음을 얻는다는 소리에 민경은 재석의 어깨를 툭 쳤다.
“이미 내 마음은 가져갔잖아.”
“푸하하하.”
재석이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내 회사에 왜 따라왔겠냐.”
“그러니까 당당하게 다녀야 해. 이 스타 임민경을 데리고 있는 남자니까.”
민경은 재석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오빠, 마지막 날인데 술이나 거하게 한잔?”
“좋다! 마시자.”
재석과 민경은 가까운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가게 문이 닫을 때까지 있었고, 문 닫을 때가 되자 나와서 술을 파는 곳에 찾아가 술병을 정말 무섭게 사 가지고 와서 숙소에서 마셨다.
“으헤헤헤.”
여행 마지막 날이라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셔 댔다. 몇 시까지 마셨는지 기억이 없고, 눈을 떴을 때 아침 10시였다.
재석이 숙소를 빠져 나오자, 민경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민경아, 나 어제 얼마나 마셨냐?”
“에휴.”
“그 한숨 소리를 들으니 정말 많이 마신 모양이네.”
“오빠.”
“왜.”
“기억 전혀 안 나죠?”
“하아, 전혀······.”
“에휴, 필름 끊길 때까지 안 마신다고 약속해 놓고 이렇게 마시다니.”
약속을 중시하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이 약속은 언제 어디서든 중요했었다.
“아, 이런. 약속을 어기고 말았네.”
아직 천만 관객 영화도 안 나온 때다.
“괜찮아요. 저도 기분 좋게 마셨으니까요.”
민경이 의외로 쿨하게 넘어갔다.
“진짜? 그럼 다행이고. 다음에는 이러지 않겠다고 꼭 약속하마.”
“저랑 있을 때는 괜찮아요. 다른 곳에 가서 그러지 말아요.”
오히려 민경은 자신의 앞에서는 괜찮다면서 관대함을 보여 줬다.
“오, 민경아. 혹시 이런 말 해 줄 수 있냐?”
“어떤 말이요?”
“짐은 관대하다.”
“네?”
미래에 나올 영화의 한 장면의 대사를 읊어 달라는 거였다.
“오빠, 아직 술 덜 깼죠?”
“아마도?”
“그럼 말하지 말고 공항으로 가요 오늘 한국 가야 해요.”
첫날은 민경이 재석을 졸졸 따라다녔지만, 돌아갈 때는 재석이 민경을 졸졸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