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48화 (48/152)

49화

재석은 엄마의 일기장의 메가폰을 잡은 감독과 민경, 이렇게 셋이서 자리를 함께했다.

“오, 이렇게 보는군요.”

김재한 감독은 재석과 민경을 보고 너무나도 좋아했다.

“이야, 한쪽은 윤 감독님이 인정한 작가고, 한쪽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 임민경 씨.”

“자, 작가요?”

재석은 작가라는 말에 조금 어리둥절했다.

“농담입니다. 소속사 사장님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김재한은 가벼운 농담으로 사람 당황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전작들을 생각하면 이런 농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감독님이 이런 농담을 하실 줄이야. 역시 충격적인 그녀의 감독님이십니다.”

“하하하, 뭘요. 그 영화 찍고 참 세상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느꼈었죠.”

충격적인 그녀. 한 신인을 스타로 만들었던 영화이자, 민경과 영화를 찍었던 차인혁이 주인공이었던 영화였다.

“아무리 시나리오를 다른 곳에서 가져왔더라도 그걸 살리는 건 감독님의 몫입니다. 거기서 크게 히트를 치셨으니 대단하신 거죠.”

“저는 말입니다. 하나 더 크게 노리고 싶습니다. 젊은 사장님이 윤 감독님 입에서 덕 좀 봤다고 할 정도면 저도 덕 좀 보고 싶습니다.”

김재한 감독도 큰 욕심이 있는 모양인지 높은 곳을 노리고 있었다.

“저 역시 그러고 싶습니다. 민경이가 더 잘나간다면 저에게도 아주 큰 이득입니다.”

“그럼, 대본을 받으셨으니 손을 좀 봐 주시죠.”

“감독님이 원하시니 저도 기쁜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물론 현장 상황에 따라 촬영 중 내용이 변경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야기가 더 편하겠네요.”

둘의 이야기에 민경은 끼어들 틈이 없었지만, 가만히 있어도 이득이 되는 상황이었기에 입 다물고 자리를 지켰다.

“그럼 오늘 식사도 하면서 한잔하실까요?”

“하하하, 그러시죠.”

“민경 씨도 함께?”

“예, 술은 많이 마시지 못하지만······.”

“괜찮습니다. 여배우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몸 관리 힘들어집니다. 건강하게 지내면서 영화 촬영 때 열심히 달리는 겁니다.”

“호호호, 감독님 당연한 말씀을요. 저 열심히 할게요.”

민경이 열심히 한다는 말에 감독은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정말 기운이 납니다.”

민경의 파이팅은 주변 사람을 즐겁게 만들었다. 이날 많은 술은 마시지 않았고 분위기만 즐겁게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 재석은 회사 업무를 처리하면서, 동시에 대본 수정도 곧바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여기서······.”

재석은 연출뿐만 아니라 대사 한 줄마저 더 업그레이드를 시키고도 단 하루 만에 수정을 끝냈다.

“음,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금방이네.”

완성된 수정 대본은 곧바로 감독에게 직접 전달했다.

“벌써?”

김재한 감독은 2주를 보고 있었다. 고작 하루 만에 작업을 끝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저도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습니다. 일단 확인 한번 해 주시죠.”

“어렵지 않지.”

감독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대본을 쭉쭉 넘겼다. 그는 수정된 내용을 머릿속에 그리며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였다.

“캬! 충무로에 떠도는 소문이 헛소문은 아니었어.”

감독은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는 한마디 했다.

“내용 아주 좋아요. 정말 소속사 사장 말고 작가도 같이해 보는 건 어때요?”

“작가는 안 합니다. 저희 식구들 작품 아니면 손 안 댈 겁니다.”

재석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사람이 날 뭘로 보고 작가를 하라는 거야. 내가 그렇게 호구로 보였어?’

작가 일도 같이하게 되면 김재한 감독이 은근슬쩍 다음 작품 수정을 재석에게 맡길 터였다. 그걸 미연에 차단한 것이다.

“참 아쉽네요.”

“은근슬쩍 저에게 물건 넘길 생각은 접으세요. 눈꽃연가 윤 감독님이 왜 저에게 다음 작품을 안 줬겠습니까? 제가 거절해서죠.”

“허허, 이런.”

이럴 때는 딱 잘라 거절하는 게 좋았다. 괜히 일 맡는다고 이것저것 받다 보면 정작 중요한 매니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제작사에서 재석의 통장에 돈을 보내왔다. 액수는 딱 3백만 원이었다.

“깔끔한 액수네.”

재석에게는 보너스 같은 돈이었다. 이걸 어디에 쓸까 살짝 고민했지만, 결국 급전이 필요할 때를 위해 모아 두기로 했다.

***

민경의 새 작품 계약을 하고 난 뒤에 대본 리딩을 할 때 한자리에 배우들이 모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민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때, 재석도 그 뒤에서 인사를 하면서 얼굴도장을 찍었다.

‘이야, 저기 조승준하고 조민성이 같이 있네.’

두 사람 다 미래에 최고의 배우지만, 동시에 시작부터 소속사에서 밀어주며 착실히 인기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손대기 전에 저 멀리 떠난 인간들······.’

재석을 알아본 이들은 웅성거리며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다.

“야, 왔다. 버터 매니저.”

“진짜네. 소속사 사장이라고 하던데 정말 젊어. 임민경이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네.”

“거기에 이번 영화 스토리 수정한 사람.”

“아주 깡패네, 깡패야. 임민경 데리고 있다고 아주 막 바꾸는 거 아니야?”

“수정 전 대본이랑 비교해 봤는데 대사와 분위기를 바꿨어. 각 배우들의 출연 씬 숫자는 동일해.”

“더 재미있는 거야?”

“맞아. 그래서 더 무서워.”

웅성거리는 게 재석의 귀에 고스란히 들렸다.

‘아, 시끄럽네.’

재석은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거에 조금 민감했다. 연예인 옆에 있으면 주변에 들리는 소리를 신경 안 쓸 수가 없었다.

“다들 자리에 앉아 주세요.”

분명 이 자리에서는 배우들의 관심도가 높은데, 알게 모르게 재석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지고 있었다.

대본 리딩이 시작되자 수군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하지만 재석에게 알게 모르게 시선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단순히 매니저들만이 아니라 배우들도 흥미를 보였다.

‘이거 배우가 시선 집중되어야 하는데, 내가 시선 집중이네.’

밖에 나가면 재석은 별거 없는 사람이지만 관계자들만 모아 놓은 자리에서는 관심이 무섭게 쏟아졌고, 민경은 리딩에 집중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재석에게 시선이 쏠리는 걸 눈치챘다.

리딩이 끝나고 나서 연기자들과 배우들이 우르르 빠져나갔고, 재석과 민경은 마지막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오늘 인기인이네.”

“뭘.”

“사람들이 나보다 오빠한테 더 관심이 많던데.”

“그래 봐야 일부 사람들이지.”

“오빠, 그렇게 감추지 마. 얼굴에 나 지금 기분 좋다고 써져 있어.”

재석의 표정은 정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민경처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변화가 말이다.

“크흠.”

“가요. 이제 점심 먹어야죠.”

“그래.”

그때 재석의 뒤에 누군가 다가오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직 대본 리딩을 위해 빠져나가지 않고 다가온 사람은 바로 조승준이었다. 데뷔는 고전 사극인 춘향으로 데뷔해서 여러 작품을 통해 인지도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배우였다.

물론 시작부터 연기를 잘했기에 주연을 휩쓸다시피 했다.

“전재석 씨 맞으시죠?”

“네, 근데 조승준 씨가 무슨 일로······.”

“아, 절 아시네요.”

“물론입니다. 출연하신 영화는 다 봤습니다. 연기가 훌륭하시더군요. 그런데 매니저는 어디 가고 혼자 있으십니까?”

“잠시 화장실에 갔습니다. 점심 드시러 가신다면 함께해도 괜찮겠습니까?”

재석은 조승준의 반응을 보고 ‘이 배우가 이런 성격이었나?’ 생각이 들었다.

“저, 임민경 씨 팬입니다.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머, 정말요? 감사합니다. 저도 조승준 씨 나온 춘향 잘 봤어요. 연기 너무 잘하시더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조승준은 뭔가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와 말을 거는 게 아니었다. 워낙 인기 스타가 되어 있는 민경이었기에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연예인을 보는 느낌이 강했다.

“그럼 같이 나가죠. 점심 같이 먹는 거야 서로 좋은 일이죠.”

“아, 감사합니다.”

조승준은 이런 자리가 마련되어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가 함께 밖으로 나가자 그의 매니저가 따라붙었다.

“안녕하세요.”

그의 매니저의 인사를 받고 재석과 민경도 인사를 했다.

식사는 재석이 알고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거기서 식사가 나오기 전에 민경은 조승준과 서로 사인을 교환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호호, 뭘요.”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는 민경의 모습이 살짝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직 전에 찍은 영화가 있는데 그거 끝나기 무섭게 새로운 걸 찍으시네요.”

“뭐, 일을 쉰다고 좋은 게 아니잖아요. 게다가 돈이 좀 필요하거든요.”

“돈이요? 많이 버실 것 같은데······.”

“저희 집이 그렇게 잘사는 게 아니라서 부모님 집도 해 드려야 하고,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곳도 더 좋은 곳으로 이사도 해야 하고, 저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민경의 이야기에는 정말 많은 게 담겨 있었다.

조승준은 그 말을 듣고 살짝 갸웃하면서 재석을 바라보았다.

“혹시, 너무 부려 먹으시는 거 아니죠?”

“하하하, 휴가까지 확실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쉬는 날도 있고, 최대한 주말을 보장하는 삶을 지키고 있습니다.”

재석이 살짝 웃으며 대답하자 그는 다시 민경을 보았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민경의 말에 일 처리가 확실한 재석이라는 걸 조승준은 깨달았다.

“그리고 사장님······.”

“아, 제가 사장이라는 걸 아시나요?”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습니다. 민경 씨를 키우신 매니저시라는 걸요. 거기에 딸린 연기자들도 점점 잘나가기 시작했다는 것도요.”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기준에서 잘나가는 건 해외로 진출해 명성을 떨치는 겁니다. 제 꿈이 크거든요. 제 밑에 있는 배우들을 아시아 최고로 만드는 것.”

“하하, 대단한 꿈이시군요.”

조승준도 재석의 꿈에 박수를 보냈다. 물론 그는 그게 실현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뭐, 제 꿈이 막연하다고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꿈이라도 커야죠.”

“하하하, 그렇죠.”

조승준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 듯 보였다.

‘별로 내 말에 동의를 하는 표정은 아니군. 하긴 그럴 거야. 누가 한류가 불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한류 열풍이 불면, 한국 연예계는 그 덩치가 비정상적 커지게 된다. 외부 투자 비율이 높아지고 돈이 몰리면서 외국에서 한국으로 진출하려는 사람도 생긴다.

물론 아직 수년 뒤에 벌어질 일이었다.

“그 꿈,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문하신 거 나왔습니다.”

식당 직원이 음식을 내오면서 잠시 말이 끊어졌지만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고 난 뒤에 돌아갈 때, 민경이 재석에게 말했다.

“오빠, 연예인이 팬이라니 이런 느낌 처음이네요.”

민경은 좋은 감정보다 상당히 생소하다는 느낌이었다. 특별히 조승준에게 관심이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근데 팬이면 어떻게 대해야 하지?”

“그냥 동료로 대해. 그게 가장 좋은 처세야.”

“그래요? 하긴, 어차피 같이 일하는 관계니까.”

민경은 재석의 말을 충실이 따를 생각이었다.

“오빠, 오늘 저녁에 뭐해요?”

“으음. 회사 들어가 봐야겠지만, 오후 일을 정리하면 7시에 끝날 거야.”

“오, 웬일로 빨리 끝나네요.”

“네 스케줄이 별로 없으면 다른 일은 금방 끝나.”

“그래요? 딜레마네······.”

“갑자기 웬 딜레마?”

재석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민경은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빠, 혹시 나중에 친구들 만나서 제가 필요하면 말해 주세요. 나중에 자랑하고 싶을 때 딱 하고 제가 가 드릴게요.”

“하하하, 말만 들어도 고맙다. 근데 친구들 만나려면 좀 멀리 가야 해. 내 고향은 서울이 아니라 광주야.”

“엥! 집이 광주예요?

“어, 멀지. 친구들 만나면 널 부를 수가 없어. 그 녀석들이 서울로 오지 않는 이상.”

“뭐, 그럼 서울에 오면 하는 걸로 해요.”

“그래, 근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오빠가 사업한다는데 내가 거기 소속되어 있다면 아무도 안 믿을 테니까요. 말로만 잔뜩 늘어놓는 것보다 제가 한번 딱 얼굴 보여야 믿어 줄 거 아니에요.”

“맞는 말이다.”

재석도 그건 공감했다. 그 누구도 인기 스타 민경의 매니저라고 믿지 않을 거다.

“아무도 안 믿겠지. 실제로 보지 않으면 말이야.”

“그러니까 필요하면 불러요.”

민경은 차 안에서 시트를 살짝 뒤로 하면서 기지개를 쭉 켜는데 늘씬한 몸매가 재석의 시야에 걸렸다.

‘역시 여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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