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25
재석은 매주 매니저들 회의를 통해 현재 연예인들의 정신적 피로도나 일의 만족도를 확인했다.
보고를 하는 매니저들은 항상 연예인들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상태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
“앞으로 연예인들의 정신적 피로에도 신경 쓰셔야 합니다.”
“정신적 피로도요?”
“쉽게 말하자면 스트레스입니다. 이 바닥은 감정 소모가 굉장히 심하니 신경 쓰셔야 합니다. 연예인의 스트레스가 회사의 운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재석은 그 말을 끝으로 회의를 끝마쳤다.
뒤이어 다른 이들도 자리에서 하나둘씩 일어나 담당 스케줄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재석은 혼자 회사에 남아 자신의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영화 크랭크 인이 며칠 안 남았네.”
그는 빡빡한 일정에서도 일을 처리해야 했다. 문제는 민경을 원하는 곳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선별하는 것도 일이었다.
“이건 곤란하고, 이건 좀 그렇고······.”
그는 점심시간 전까지 일을 하다가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십······.”
재석은 들어온 사람을 보고 바로 앞으로 나갔다.
“민경아, 혼자 여기까지 왔어?”
“네, 대중교통 타는 것도 정말 짜릿하네요.”
민경은 홀로 대중교통을 타고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들이 몰려서 상황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너 그러다 사람들한테 머리 뜯겨.”
“그러니까 짜릿하죠.”
스타가 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 때문에 의도치 않는 봉변을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는 대중교통 이용하지 말고 차를 하나 사라. 그럼 대중교통 이용 안 해도 되잖아.”
“운전을 못 해요.”
“걱정 마. 운전 학원 등록시켜 줄게. 일정도 거기에 맞추고.”
“진짜요?”
“그래, 대중교통 타다가 나쁜 사람 만나서 봉변당하면 더 손해야.”
“안 할래요.”
“왜?”
“그냥 오빠가 태워 주는 게 더 마음 편해요.”
민경의 말을 들은 재석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했다.
“알았다. 그렇게 하자.”
“그럼 점심 먹고 일하러 가야죠.”
“그래.”
두 사람은 오후 스케줄을 위해 가볍게 점심을 먹고 움직였다.
***
며칠 뒤 엄마의 일기장의 크랭크 인에 들어가는 날이 되었다. 첫 신은 민경만 홀로 나왔다. 다른 배우들은 없었다.
‘혼자 촬영하고 나면 오늘 일정은 끝이네.’
민경은 저쪽에서 준비를 했고, 재석은 촬영 장소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면서 동선이 어떤지 확인했다.
“흐음, 집 멋지네.”
목재로 지어진 이층집이었다. 넓은 마당에는 잘 가꾼 정원도 있었다.
‘어떻게 이런 집을 섭외했을까?’
찾는 것도 어려웠을 텐데, 섭외까지 하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터였다.
재석은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풍스럽기까지 한 이 집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이런 집도 괜찮긴 한데······.’
하지만 그는 한옥의 전통적인 느낌만 있는 것이 아닌, 현대의 세련된 느낌도 조화된 집을 더 선호했다.
“오빠, 어때요?”
어느새 준비를 끝마친 민경이 나타났다. 무척이나 수수하게 입은 옷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모습은 꽤 순박해 보였다.
“흐음, 딱 좋네.”
그 말을 듣자 민경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조감독의 말에 재석은 한쪽으로 빠졌고, 작게 힘내라는 말을 건넸다.
“액션!”
민경은 마당에서 낡은 책을 한쪽으로 치우며 정리했고,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없이 흘러갔다.
“컷!”
감독의 컷 사인에 민경은 바로 감독에게 달려와서 찍힌 영상이 어떤지 확인했다.
“어때요?”
“한 번 더 갈게요. 뭔가 부족해요.”
곧바로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좋은 장면을 담기 위해 몇 컷을 더 찍고 난 뒤에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여기서 저 위로 올라가는 거야.”
“네, 감독님.”
다음 장면은 민경이 책을 한가득 들고 2층으로 올라가는 거였다.
처음에는 책을 몇 개만 들고 찍었지만, 그 맛이 살지 않아서 점점 책의 양이 많아졌다.
이윽고 두 손 위로 책이 10권이 넘어가자 민경도 부담스러울 정도가 되었다.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한 번에 끝냅시다.”
재석은 걱정스러워했지만, 감독은 이걸로 곧바로 다음 신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아직 해가 있을 때 더 좋은 장면을 찍고 싶은 거였다.
“자, 그럼 갑니다. 액션!”
감독의 외침에 민경은 두 손 위로 탑처럼 쌓아 올린 책들이 쏟아지는 걸 막기 위해 책을 턱으로 살며시 누르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끼익끼익.
그녀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위로 올라갔다.
거의 다 올라갈 때쯤 민경의 귀로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렸다.
-미끄러워, 조심해.
그 순간이었다. 민경의 발이 미끄러졌다. 정확히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놀라 몸의 균형이 잠시 흔들린 거였다.
“어!”
‘아, 안 돼······!’
쿵쿵쿵!
그때 어디선가 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직후 민경의 얼굴을 커다란 손이 감쌌고, 등에서는 포근함이 느껴져 왔다.
퍼버벅!
뒤이어 수많은 책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민경은 잠시 후 질끈 감았던 눈을 떴고, 자신을 감싸고 있는 주인공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빠!”
바로 재석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책을 이마에 제대로 맞았는지 눈썹 위 이마가 찢어져 있었다.
“야, 119 불러!”
누군가의 외침에 다급하게 상황이 돌아갔다.
***
재석이 정신을 차린 건 구급차 안이었다.
“흑흑흑.”
하염없이 울고 있는 민경의 얼굴을 본 재석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만졌다.
“나 안 죽었다. 그만 울어라.”
“오빠!”
민경은 재석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듯이 울었다.
“피 많이 나요.”
“울지 말고.”
어찌 된 게 따라온 보호자를 토닥이는 환자가 된 재석이었다.
“이거 흉터 남는겠는데요.”
의사가 한 말이었다.
“여기 성형외과가 있으니 거기서 꿰매세요. 얼굴에 흉터 남는 것만큼 좋지 않은 것도 없으니까요.”
“예, 선생님. 오빠, 빨리 가요.”
대답은 민경이가 대신했고, 재석은 민경의 등 떠밀림에 성형외과에 가서 찢어진 곳을 꿰맸다.
“참 거칠게 찢어졌네요. 이거 꿰매 놓고도 불안하네요. 다음에 한 번 더 오실래요?”
의사가 재석의 이마를 보고 한마디 남긴 거였지만, 민경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오빠, 수술하자. 내가 돈 다 낼게.”
“아, 호들갑 떨지 마. 경과 지켜보고 해도 안 늦어.”
재석은 그렇게 상처를 치료하고 병원을 나서자 그 앞에 감독이 달려왔다.
감독은 꽤 걱정 어린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예, 이마에 상처 말고는 멀쩡합니다.”
재석은 그렇게 말했지만, 오늘 촬영은 틀렸다. 내일 다시 찍어야 했다. 특히 배우의 감정이 깨진 건 치명적이라서 답이 없었다.
“일단 집에 가서 푹 쉬세요.”
꽤나 불안해 보이는 감독에게 민경이 한 마디 했다.
“감독님, 근데 저 계단 올라갈 때 누가 미끄럽다고 위험하다고 말한 사람 있었어요?”
“카메라 돌아가는데 누가 말을······. 잠깐, 민경 씨. 진짜 그런 말을 들었어요?”
“네, 계단에서 뒤로 넘어지기 전에 들었어요.”
“아!”
감독은 표정이 바뀌려는 걸 억지로 붙잡으며 입을 가린 채 황급히 떠났다.
“민경아, 그 말 진짜야?”
그녀에게 묻는 재석의 표정은 아주 밝아 보였다.
“갑자기 왜 웃어요.”
“그야, 귀신의 목소리를 들었으니까.”
“네에?”
민경은 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유는요?”
“방송계에 떠도는 소문 알지? 귀신을 보거나 그 목소리를 들으면 음반 혹은 드라마 영화가 대박이 난다는 거.”
민경은 재석의 상처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걸 위해서 누군가 다치는 일이 생겨야 한다면 전 싫어요.”
“흐음, 이 정도면 액땜한 셈이야.”
“그래도 싫어요.”
민경의 단호한 말에 재석은 볼을 살짝 긁적거렸다.
“일단 집에 가자. 어차피 오늘은 푹 쉬어야 하니까.”
다음 날 촬영은 정말 철저한 안전에 신경을 쓰며 재촬영에 돌입했다. 전날과 같은 사고가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말이다.
“이야, 카메라 밖에는 매트 천지네.”
귀신을 본 장소에서, 다시 귀신을 본 것과 그것 때문에 일어난 사고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오히려 재석의 사고가 다른 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민경이 들던 무거운 책은 가벼운 걸로 대체되었고 간혹 무거운 걸 들어야 하면 그 책 안을 파 버려서 가볍게 만들었다.
덕분에 민경은 힘들다는 느낌을 전혀 받기가 어려웠다.
“수고하셨습니다.”
무사히 특별한 일 없이 촬영이 끝나자 재석과 민경도 빠르게 복귀가 가능했다.
민경의 시선이 간혹 재석의 눈썹 있는 부위에 머무르기를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매일 소독해 줄 거냐?”
“네, 해 드릴게요.”
그냥 던진 말에 민경이 덥석 물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지금부터요.”
“뭐? 갑자기.”
민경은 어느새 상처 소독을 위한 준비물을 손에 쥐고 있었다.
“오빠, 앉아요.”
재석은 이번에도 민경에게 떠밀려 상처를 보였고, 민경은 서툴지만 꽤 진지한 표정으로 상처를 소독해 줬다.
‘어라, 생각보다 시원한데.’
재석은 민경의 세심한 솜씨에 꽤 기분이 좋았다.
“아주 깔끔한데.”
적절한 드레싱 덕분인지 재석은 기분 좋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상처가 다 나을 동안, 민경이 매일같이 신경을 써 준 덕분에, 흉은 없다시피 했다.
“오오, 민경이 덕분에 아주 깔끔한데. 이제는 보이지도 않네.”
재석의 말과 달리, 흉터는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모르겠지만 민경의 눈에는 아주 선명하게만 보였다.
“괜히 저 때문에.”
“괜찮아, 덕분에 영화 잘되겠다고 사람들이 칭찬을 하잖아.”
“싫어요. 진짜, 다음에 귀신 나오면 그냥 발로 콱 밟아버릴 거예요.”
“어허, 귀신한테 해코지해서 좋은 거 없어.”
“그래도 싫어요.”
민경은 그 귀신 때문에 재석이 다쳤다는 게 그렇게 싫었다.
“나중에 귀신한테 고수레나 해야겠네.”
“그게 뭐예요?”
“몰라도 돼.”
재석은 미신 같지만, 귀신이 나타난 이상 고수레를 해서 다음에 또 찾아올 귀신 배를 불려 해코지를 못하게 막을 생각이다.
‘몰래 감독한테 이야기해야겠어.’
민경이 이 사실을 알면 좀 싫어할 테니. 조용히 물어볼 생각이었다.
며칠 뒤 촬영장에 알 수 없는 음식이 한쪽에 조용히 놓이기 시작했다.
다들 민경이 때문에 쉬쉬했고, 민경이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재석에게 잔소리를 했다.
“오빠, 정말 이러기예요.”
“귀신이 배가 부르니 나중에 우리 일을 더 잘 봐 주겠지. 거기에 감독도 요즘 표정이 너무 좋잖나.”
정말 감독은 민경이 귀신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 때문에 너무 좋아하고 있었다. 거기에 재석이 운을 떼기 무섭게 고수레까지 준비하는 센스까지 보여 줬다.
‘이후에 만일 귀신이 나타나더라도 고수레 때문에 해코지는 힘들 거야.’
재석은 민경이 약간 투덜거렸지만, 이번에는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투덜대도 안 받아 줄 거니까 열심히 해라.’
하지만 민경은 그때만 투덜거렸을 뿐 이후에는 연기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