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귀신 사건 다음날 촬영은 정말 빡빡했다. 민경의 입에서 너무 힘들다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촬영 속도가 눈부시도록 빠르다는 거였다.
민경은 맡은 배역을 완벽하게 연기하여, 상대역인 조승준이 감독에게 OK 사인을 받으면 그대로 다음 신으로 넘어갈 정도였다.
간신히 이날 촬영이 모두 끝나자, 민경이 반쯤 녹초가 되어 축 늘어진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힘들다.”
집에 도착을 해서 민경이 차에서 내리자 조금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재석은 급하게 차에서 내려 민경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조금 힘드네요.”
“그럼 내가 부축해 줄게.”
민경은 정말 피곤해서 그대로 쓰려져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재석은 민경과 같이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중년의 남녀가 있었다.
“엄마! 아빠!”
민경의 부모님이 찾아온 거였다. 민경은 홀로 서울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부모님의 모습에 몸에 기운이 넘치는지 달려가서 부모님 품에 안겼다.
“아이고, 우리 딸.”
민경은 부모님에게 재석을 소개시켜 줬다.
“여기 재석이 오빠. 내가 전화로 항상 말했던 그 사람.”
“아, 민경이가 하도 회사 이야기를 많이 해서 정말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민경의 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하는 말에 재석은 그저 겸손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따님 덕분에 제가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덕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들어와서 차 한잔이라도 하세요.”
“아닙니다. 시간이 늦어서 저도 쉬어야 해서요.”
“아이고, 그러고 보니 시간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재석은 그렇게 민경의 집에서 나와 자신의 집에 돌아가서 편히 쉬려던 그때,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
“음?”
-오빠, 내일 부모님이랑 점심 먹는데 추천해 줄 만한 곳 있어?
재석은 그걸 한 번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한번 효녀가 되고 싶다 이거지? 어렵지 않지.”
재석은 곧바로 어떤 식당이 좋은지 알려주지 않고 이런 메시지 한 줄을 보냈다.
-내일 점심 내가 안내해 줄게. 좋은 곳을 하나 알아.
-오빠, 그럼 같이 점심 먹을래요?
재석은 진짜 그래도 되냐, 부모님이 불편해하지 않으시겠냐며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생각보다 쿨 했다.
-부모님은 상관없대. 오히려 궁금한 게 있나 봐.
“일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신 건가?”
그렇다면 알려줄 수 있었다. 민경보다 재석이 이 바닥의 여러 가지 모습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음날 점심, 재석은 차를 몰고 가서 인기 있는 식당을 찾아가 그곳에서 민경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젊은 사장님이 이런 곳을 아시네요.”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하지만, 맛이 좋아서 스타들도 가끔씩 찾는 곳입니다.”
재석이 민경의 부모님을 모시고 온 장소는 간장게장집이었는데, 별실이 따로 존재하는 식당이었다.
유명한 스타들은 편안히 식사를 하기 위해 이런 식당을 선호하곤 했다. 재석도 민경이 스타가 된 이후로 식당을 고를 때는 이렇게 별실이 있는지를 최우선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젊은 사장님은 결혼 하셨나요?”
민경의 어머니의 질문에 재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안 했습니다. 일이 바빠 특별하게 만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재석이 홀몸이라는 걸 알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물었다.
“그런데 딸아이 이야기를 들으니 내년에 일본으로 진출할 계획을 잡고 있다던데, 그거 자신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일본에서 저희를 찾게 될 겁니다. 거기에 대한 근거는 민경이 출연한 눈꽃연가에 있습니다.”
재석의 확신 있는 말에 아버지는 조금 놀랐다. 사업이라는 게 대부분 판매자가 구매자를 찾지, 구매자가 판매자를 찾는 경우는 정말 극히 드문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들어 봐도 되겠습니까?”
“대답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년 3월까지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재석이 비밀을 지켜 달라는 말에 뭔가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렇게 중요한가요?”
“중요합니다. 비밀을 내년 3월 달까지 지켜 주실 수 있습니까?”
“1년 정도 입 닫는 거야 어렵지 않지요.”
살아온 세월도 있고, 딸과 관련이 되어 있으니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거다.
재석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연말에 문화 교류 사업이 시작됩니다. 거기서 일본 방송사와 접촉이 있을 거고, 그중 몇몇의 드라마가 선택될 겁니다. 가장 인기 있었던 드라마가 가까운 아시아 국가에 팔리게 됩니다.”
재석은 미래에 벌어질 일을 이야기하는 거였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한 명의 사업가로 보일 터였다.
“거기서 유력한 확률로 눈꽃연가가 선택될 겁니다. 그걸 위해 일본에서 교민들을 대상으로 자료 조사를 했습니다.”
“자료 조사?”
“제일교포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일본에 거주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포들은 2세는 기본이고, 3세도 많습니다. 그들이 눈꽃연가를 비디오로 어마어마하게 구매했습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국적은 일본인인 그들이 말이죠.”
“그 말은 일본인에게 인기가 있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교포들은 일본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의 기호는 일본인들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도 문제없을 겁니다.”
“아······.”
민경도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 거라 멍하니 듣기만 했었다.
“허허허, 단순히 꿈만 가지고 일을 벌이는 사람은 아니었어.”
민경의 아버지는 재석이 젊은 데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보는 눈이 있음을 확인했다.
“주문하신 음식 왔습니다.”
종업원의 목소리에 다들 하던 이야기를 멈췄다.
“음식이 나왔으니 식사하시죠.”
“허허허.”
민경의 아버지는 뭐가 그리 기쁜지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식사를 함께했고, 돌아가시기 전에 민경에게 한마디를 했다.
“일이 좀 고되더라도 인내해라. 우리 딸 아주 승승장구하겠구나.”
“걱정 마요. 오빠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요. 전 열심히 일하고 돈만 받으면 돼요.”
민경은 밝게 웃으면서 부모님과 헤어지고 재석과 함께 촬영 현장으로 달려갔다.
촬영 현장에서 김재한 감독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본을 보고 있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평소에는 잘 찾지도 않는 사람이 대표님이라고 하면서 불렀다.
‘뭔가 있네.’
재석은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구, 감독님이 갑자기 저를 찾으시다니 이거 해가 서쪽에서 뜨겠습니다.”
“어허, 그런 섭섭한 말씀을······.”
살짝 말끝을 흐리면서도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감독님, 저쪽에 가서 이거 하나 마시면서 이야기할까요?”
재석이 자리를 옮기자고 하자 감독은 곧바로 반응을 했다.
좀 멀리 떨어지자 감독은 곧바로 속내를 비췄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혹시 조민성에게 약간의 지도가 가능한가?”
“지도? 혹시 연기 지도 말입니까?”
“그래, 연기가 부족한 건 아닌데 좀 상황에 맞지 않는 연기를 자주해서 NG가 자주 나고 있어. 힘든 건 아는데, 이대로 가면 촬영 일정에 지장이 생겨. 그 지장이 안 생기게 하려면 쭉 찍다가 그냥 대충 장면 선택하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아니면 들어내는 것도 방법이죠.”
들어낸다는 말에 감독은 심각해졌다. 영화는 정해진 일정이 있다. 그리고 촬영을 무한정 질질 끌 수도 없다.
“후우, 그런 방법은 최후까지 쓰고 싶지 않네. 영화의 재미가 반감될 거야.”
김재한 감독은 현재와 과거의 비중을 맞추고 싶어 했다. 대본에서도 그게 가장 재미있다고 여겼는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 남자 주인공의 상대적 연기력 차이로 한쪽이 점점 재미없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배우에게 연기 지도를 한다면 저쪽 회사에서 절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쓸데없는 오지랖에 연기자도 아닌 게 간섭한다고 하겠죠. 들어내는 것도 적당히 조금 들어내면 됩니다. 다 할 필요는 없죠.”
“하아.”
그렇다고 감독이 직접 나서서 조민성을 다그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촬영장 분위기가 엉망이 될 터였다.
“감독님도 참 곤란한 상황에 처했네요.”
“오늘 술 한잔할 수 있는······.”
“아쉽게도 오늘은 안 됩니다. 촬영 신 보니까, 밤까지 해야 해서 못 마십니다.”
“좀 안되겠나?”
감독은 술이라도 마시면서 뭔가 속 시원하게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그렇게 답답합니까?”
“미치겠네.”
김재한 감독은 상당한 완벽주의를 추구했다. 캐릭터도 주변 배경도 그렇다 보니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한 조민성의 연기도 지금에 와서는 부족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일 끝나고 잠깐······.”
“오빠, 술 마시려고?”
갑자기 나타난 민경 때문에 재석과 감독이 놀랐다.
“아니, 너 왜 여기에······.”
감독과 재석은 따로 떨어져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민경이 하는 말은 굉장히 현실적이었다.
“감독님 다 준비됐는데 촬영 안 해요?”
“아, 가야지.”
감독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 재석은 느긋하게 걸었다.
“오빠, 술 마시는 건 좋은데 취하게 마시면 곤란해.”
“아하하하······ 물론이지. 내가 기억 잃어버릴 정도까진 마시진 않잖아.”
“두 번 그랬죠.”
“큭!”
“따질 마음은 없어요. 그래도 조절하세요.”
“알았어.”
“오빠, 약속 또 어기면 그 뒤에는······.”
민경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약속을 중시하는 그녀에게 다음은 없다는 통보이기도 했다.
“살벌하네.”
“제 앞에서 만취하는 건 약속 어긴 걸로 안 할게요.”
갑자기 약속이 칼 같지 않고 뭔가 범위가 넓어졌다.
“진짜?”
“네.”
민경의 마음이 엄마의 마음처럼 푸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따라 내 담당 배우가 아닌 것 같다?”
“뭐, 마음대로 생각해요.”
***
포장마차 안에서 한 테이블에 재석과 김재한 감독이 서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하아, 덕분에 살았어. 촬영은 힘들고 두 남자 주인공의 연기력 차이는 너무 곤란하고 말이야.”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인 결과죠.”
“물론 알고는 있지만, 참 곤란해. 이대로 가면 분명 편집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도려내게 될 거야. 거기에 조승준의 연기가 상당히 감칠 나. 그 나이에 그런 연기를 펼치는 건 어렵지.”
“민경이는요?”
“허허, 그쪽은 말해 봐야 입만 아파.”
김재한 감독의 반응을 봐서는 민경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모양이다.
“거기다가 민경 씨는 꽤나 비즈니스가 강하더군. 보통 그 나이에 아무리 연기라고 하지만, 감정에 빠질 법한데 카메라 밖에서는 낯가림이 심해.”
민경의 낯가림은 알게 모르게 심했다. 촬영 중에는 살갑지만, 카메라가 멈추면 데면데면했다.
물론 예의는 갖추지만, 남자 배우들도 서먹함을 모르진 않을 거다.
“그런데 매니저랑 이야기하는 거 보면,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 같아.”
“서로가 첫 배우이자, 첫 매니저이기도 하죠.”
“오호, 그런 사연이······.”
감독은 상당히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감독님, 마치 재미난 시나리오 봤다는 식으로 보지 마세요.”
“거참, 매몰차기는.”
“민경이는 시작부터 주인공 꿰차고 갔어요. 스토리상 손을 본다면 거기부터겠죠.”
“어허, 눈치 빠르기는.”
“안 됩니다, 감독님.”
재석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둘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것보다 조민성을 어떻게 할 방법 없나?”
“제가 어떻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쪽 소속사도 그렇고, 배우 자체의 자존심 문제도 있습니다. 연기를 아예 못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부족해서 그래. 조승준에 비해 말이야.”
“그래도 두 남자 배우는 촉망받는 배우 아닙니까.”
재석은 둘의 미래가 어떤지 잘 알기에 감독 앞에서 그들을 깔 수 없었다.
“자네는 잘 보고 있군. 나도 생각은 비슷해. 하지만 한 사람은 정말 운이 필요할 거라고 봐.”
“조민성이요?”
“그래.”
감독은 운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재석은 조민성에게 그 운이 굉장히 빨리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전 조민성 씨의 운이 빨리 올 거라 봅니다. 내년쯤?”
“어허, 운이 그렇게 오면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라고······.”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태어나는 것부터 다르게 시작하죠.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로 태어나서 서로의 다름이 시작되죠. 공평하다면 인간은 전부 자웅동체여야 할 겁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 의미에서 따라 준 겁니다. 하지만 그게 평생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조승준 씨는 몇 작품을 더 한다면 정말 대단한 배우가 될 겁니다. 조민성 씨와 다른 의미로요.”
“그건 공감하지.”
재석은 술잔을 기울이다 문득 이런 말을 던졌다.
“감독님, 연극판에 아시는 분 많으십니까?”
“허허, 이 사람 사람을 뭘로 보고. 드라마 감독도, 영화판 감독도 대부분 연극에서 큰 사람들이 많지. 말만 해. 감독도, 연극배우도 내 말 한 마디면 못 찾을 사람이 없어.”
“하하하, 역시 대단하십니다.”
“요새 새로운 신인을 한 명 찾는 모양이구만, 하지만 지금 소속된 배우들도 많은 걸로 아는데.”
“물론 그렇습니다. 다들 잘 활동하고 있지만, 몇 년 뒤 제가 욕심이 생겨 또 누군가를 찾아야 할 때 그게 쉽지만은 않을 거 같거든요.”
“오호라, 이 술 한 잔 먹이고 사람 찾는 데 나를 쓰겠다?”
“거짓으로 꾸미진 않겠습니다.”
“뭐, 그런 부탁 한 번은 들어주지. 영화 출연 계약도 그렇고, 영화 대본 수정도 그렇고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는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확히 내년쯤에 한 번 부탁을 할 것 같네요.”
“내년이라······. 그때 내가 기억을 할지 모르겠는데.”
“은근슬쩍 빼시면 참 곤란합니다.”
“허허허, 걱정 말게. 내 꼭 기억해서 그 부탁을 들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