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당신의 매니저
현장에 찾아오자 감독은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어제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빠, 어제 술 많이 안 마셨지?”
“물론이지.”
내일 일을 생각해서 감독이나 재석이나 자제를 했다.
“나중에 영화 회식 때도 적당히.”
“알았다.”
재석은 적당히 대답하면서 뒤로 빠졌다.
“자, 다들 준비 됐지? 액션!”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메라가 돌아가더니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다.
오늘따라 촬영이 꽤나 순조로웠다.
특별한 NG도 없었고, 감독이 요구하는 것도 전보다 뭐가 줄어들었다.
“허!”
재석은 뒤늦게 감독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결국 들어낼 생각이구나.’
전과 달리 조민성을 향한 언급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연기에 만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감독은 어제 재석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나온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어차피 계약금은 다 지급했으니 크게 문제 될 거 없다는 거겠지.’
촬영이 끝난 직후, 재석은 조용히 감독을 찾아갔다.
“감독님, 정말 들어낼 겁니까?”
재석의 물음에 김재한 감독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크흠, 무슨 소리인가.”
“말리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불만 많은 손님이 따지러 올 겁니다.”
재석이 말한 불만 많은 손님은 조민성의 소속사였다.
지금 당장은 배우도 매니저도 모르지만, 영화가 개봉을 하면 모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술 상대를 해 드리죠. 시간을 내주신다면요.”
재석이 말한 술 상대는 비밀을 들어주겠다는 거다.
“그럼, 오늘 살짝?”
“그러죠. 민경이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요.”
“하하하!”
감독은 갑자기 크게 웃더니 재석과 가깝게 붙으며 작게 속삭였다.
“누구한테 말한 건 아니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하하, 그렇지. 전 대표가 아주 사회생활을 잘해.”
과장되게 웃는 모습에 재석은 감독이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느꼈다.
‘비밀로 하고 싶겠지.’
결국 감독과 재석은 일이 끝난 뒤에 서울에서 또 한 번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지.”
“비밀을 지켜 달라는 거죠?”
“그렇지.”
“제가 입을 열지 않아도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알게 될 겁니다.”
“그때 가서 준비할 걸세. 그리고 조승준이 잘해 주고 있으니 촬영의 중심도 그쪽으로 편성될 거야.”
“조민성은 조승준에게 포인트를 맞추는 용도가 되겠네요.”
“그렇지.”
“정말 그렇게 되면 감독님의 측근들이 눈치 챌 겁니다.”
“내가 딱 잡아뗄 걸세.”
“나중에 조민성 씨가 감독님과 안 좋은 사이가 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상관없네. 어차피 나하고는 다시 작업할 일 없을 거야.”
“감독님, 진정하시고 잘 생각해 보세요. 좀 더 다그치더라도 감독님이라면 잘 다독일 수 있을 겁니다.”
재석은 조민성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감독과 그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막고 싶었다.
“아니, 난 생각을 굳혔네.”
단호하게 말하는 감독의 표정을 보고 재석은 더 이상 뭐라 이야기할 수 없었다.
“감독님이 그러시다면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가 없네요.”
“전 대표는 비밀을 지켜 주면 되는 거야. 가끔 이렇게 술자리나 같이하고 말이야.”
“물론이죠. 영화가 개봉하는 그날까지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좋아, 그럼 내가 자네한테 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봐주지. 촬영 순서도 최대한 우선적으로 해 주겠네.”
“그래 주시면 저야 좋죠.”
이러한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민경이 촬영을 편안하게 진행할 수 있을 듯했다.
감독은 소주잔을 비우고는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조만간 중국으로 촬영하러 떠날 거네.”
“그러면 서둘러 조민성 촬영을 진행해야겠는데요.”
“맞아, 한동안 그렇게 될 거야. 저쪽에는 이미 이야기 끝냈어.”
“말 나오겠네요. 조승준 쪽에서.”
“그 문제는 이미 해결한 상태야.”
감독과의 술자리가 벌써부터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정은 빨리 알고 있을수록 좋다.
민경을 케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 회사를 맡고 있는 재석으로서는 그에 따른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중국 촬영은 장기입니까? 아니면 단기로 자주 왕복하는 겁니까?”
“장기로 최대한 빨리 찍을 거야.”
“그럼 한 달 정도?”
“그렇지. 재석 씨만 알고 있으라고. 회사 대표니까 준비해야 할 게 많을 거 아냐?”
감독은 씨익 웃으며 재석의 잔을 채워 줬다.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고, 재석은 감독이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귀에 담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
다음 날, 재석이 해외 촬영에 대해 이야기하자 주명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사장 대리를 해야 하냐?”
“팀장님 말고 맡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총기간은?”
“지금 계획은 한 달로 잡혔는데, 중간에 제가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 돈 많이 깨지겠는데.”
“중국이라 그나마 부담이 적습니다.”
“그래도 해외야. 비행기 값이 적지 않아.”
“앞으로 이런 경비는 자주 발생할 겁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소속 연예인들 모두 해외를 자주 오가야 할 테니까요. 그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니죠.”
재석은 마치 소속 연예인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 무슨······.”
“어찌 됐든 그때 동안 제가 믿을 사람은 팀장님밖에 없습니다.”
“에휴.”
주명진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결재해야 할 일도 많을 텐데, 그런 것도 나한테 맡길 거야?”
“최대한 부담감 없도록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가는 것도 아닙니다.”
“알았다. 그럼 내가 손 못 대는 건 최대한 처리해 주고 가.”
“감사합니다, 팀장님.”
“에휴, 여기를 오는 게 아니었어. 아주 그냥 머슴처럼 부려 먹네.”
주명진은 말을 그렇게 했지만, 훌륭하게 사장 대리를 해낼 것이었다.
‘팀장님, 몇 년만 참으세요. 제가 이사 직함 드리겠습니다.’
회귀 전에도 마지막까지 걱정해 줬던 사람이 주명진이다. 그만큼 책임감도 의리도 있는 사람이다.
재석은 그 책임감과 의리에 보답을 해 주겠다 다짐했다.
“어디 보자, 사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 확인 좀 해야겠네······.”
주명진은 조심스럽게 전체 일정과 들어온 일거리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럼 오늘 현장 다녀올게요.”
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움직였다.
지금은 민경이 한국에서 최대한 많은 촬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 혹시 드라마 캐스팅 제안이 들어오면 거절하세요. 지금은 영화에 집중하고 있어서 다른 걸 할 수 없다고요.”
“알았다.”
재석이 민경을 데리고 현장을 가는 동안 해외 장기 촬영 스케줄이 있다는 걸 알렸다.
“진짜로 중국에 장기로 간다고요?”
“그래, 최소 한 달이야. 정확한 일정은 안 잡혔지만, 최소 일주일 정도 중국에 있다가 잠시 왔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하게 될 거야.”
“으아, 그렇게 힘들겠네요.”
“뭐, 중국 계획은 지금 한참 준비 중이고 곧 결판이 날 거야.”
“외국에 그렇게 오래 나가 있는 건 처음인데.”
민경은 여행으로 잠시 해외에 나간 적은 있었으나, 일주일 이상 체류해 본 적은 없었다.
“오늘 촬영도 확실히 하자. 중국 다녀와서 재촬영할 상황 만들지 말고.”
“그거야 당연하죠. 근데 오빠도 가요?”
“너 가는데 나도 가야지. 그런데 내가 아니면 처리할 수 없는 회사 업무도 있어서 중간에 한국을 다녀오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어.”
“그러면 곤란한데······.”
민경은 여차하면 재석이 일 때문에 중간에 자신을 덩그러니 놔두고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니저가 해외까지 매일같이 옆에 있는 건 어려울 수 있어. 일반 매니저라면 좋다고 따라갔겠지만, 사장이 된 이상 그게 어렵다.”
“뭐, 이해해요. 사장님이 된 오빠가 언제까지 제 옆에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니까요. 분명 회사가 커지고 잘나가면 저한테 다른 로드 매니저가 붙겠죠.”
“먼 미래의 이야기다.”
재석은 항상 민경의 옆에 있겠다는 말을 돌려 말한 거였다.
“먼 미래가 아니라. 두 달 뒤에 곧 그럴 것 같은데요.”
“크흠.”
잠시 헛기침을 하며 주변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재석이었다.
촬영장에 도착하자, 감독은 촬영 일정을 생각해 아주 몰아치듯이 강행군을 시작했다.
“컷! 민경 씨는 좀 더 부끄럽게, 그리고 민성 씨는 더 진중한 표정으로.”
“네, 감독님!”
“예!”
두 사람의 대답이 들리고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
재석은 바쁜 와중에도 주기적으로 방송사와 충무로를 오가며 대본과 시나리오를 받아 왔다. 이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기에 결코 거르지 않았다.
“어디 보자······.”
재석은 영화 쪽 자료들을 먼저 살펴보다가 한 시나리오를 보게 되었다.
“이 시나리오가 나왔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시나리오는 꽤나 큰 족적을 남긴 영화, ‘아름다운 자매’였다.
“팀장님, 문자영 지금 어떻습니까?”
“연기력을 묻는 거라면 아주 깔끔해. 연기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 외모도 아주 파릇파릇하게 피어나고 있고.”
“이 영화 오디션 어떻습니까?”
재석이 내민 건 ‘아름다운 자매’ 시나리오였다.
“흐음.”
주명진은 내용을 한 번 쓰윽 보더니 그대로 덮었다.
“공포 영화에 출연시키려고?”
“지금 시나리오가 나온 걸 보면 아직 준비 단계인 것 같지만 무척 좋아 보여서요.”
“네 선구안에 이게 꽤 잘나갈 것 같은 촉이 온 모양이네?”
“뭐, 그렇죠.”
“그럼, 내가 직접 못 움직인다.”
“갑자기 직접 못 움직인다니요?”
“바빠, 너 중국 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거까지 신경 못 쓴다. 직접 해라.”
주명진은 일거리 던져 준 재석이 미워서 못 한다고 강짜를 놔 버렸다.
“아니, 팀장님······.”
“배 째라.”
“크흠.”
죽어도 못 하겠다고 나서니 재석도 할 말이 없었고, 중국 문제도 있는 터라 미안해서라도 강하게 못 밀어붙였다.
“뭐, 알겠습니다. 제가 하죠. 중국 가기 전에 이거 끝내겠습니다.”
거기에 이건 오디션을 봐야 하는 거라 더 확실하게 준비해야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나갈 수 있었다.
재석이 혼자 문자영을 만나려고 나가려는데 민철이 안으로 들어왔다.
“민철아, 오늘 일 빨리 끝났네.”
“아, 계셨네요.”
“요즘 촬영장 상황은 어때?”
현재 권진우의 영화 촬영 상황을 묻자 민철이 입을 열었다.
“술술 풀려 가고 있어요. 촬영도 거의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어서 이제는 좋아요. 그런데······.”
민철이 뜸을 들이는 걸 보고 재석은 살짝 걱정이 들었다.
“진우 형이 몰래 연애를 하는 것 같습니다.”
“연애?”
유명 연예인의 연애는 생각보다 위험 요소가 훨씬 많았다.
“누군지 확인했어?”
“아직 진우 형이 말을 안 해요. 딱 봐도 누구랑 사귀는 중인데······.”
어떤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연예계 바닥은 의외로 일반인을 만나기 어려웠다.
‘생각보다 협소한 이 바닥에서 그렇게 바쁜 상황에 만날 수 있는 여성은 한정적이지.’
“민철아, 느긋하게 한번 찾아봐. 먼저 권진우가 만나는 주변 인물부터. 갑자기 네가 모르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없어.”
“하지만, 연애하는 걸 막는 건 좀······.”
“막지 않는다.”
“네?”
“만나기 전에 막았으면 모를까. 만나고 있다면 이미 늦었어. 우리는 이제 최대한 언론에 노출 안 되게 도울 수밖에 없어.”
“도와요?”
“그래,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어차피 우리 식구고, 식구가 피해를 입으면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와. 그러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파악해.”
“알겠습니다. 바로 나가 볼게요.”
민철이 확인을 위해 바로 나가자 주명진이 재석을 다른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야, 대단하네.”
“뭘요. 그리고 저도 나갑니다.”
“갑자기 왜?”
“문자영 만나러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