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52화 (52/152)

53화

문자영이 살고 있는 집 근처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그래, 오랜만이다. 그사이에 더 예뻐졌구나.”

예쁘다는 말에 문자영은 얼굴을 붉혔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음, 솔직히 사장님 소리가 너한테 듣기에는 어색하네.”

“안 돼요. 민경 언니가 자신만 오빠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어요.”

“뭐야, 언제 그렇게 합의가 된 거야?”

“음, 오래전이요.”

재석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 귀여운 문자영에게 오빠 소리를 못 듣다니!’

미래의 국민 여동생에게 진짜로 오빠 소리 듣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몇 안 되는데, 그중 재석은 민경 때문에 제외되었다.

‘슬퍼진다.’

세상에는 꼭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말들이 있다. 문자영에게는 정말 지금이 아니면 절대 들을 수 없는 단어가 ‘오빠’, 이 한 단어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다.”

“중요한 거 아니면 내일 이야기해도 돼요.”

“아니, 지금 해야 해. 중요하거든.”

재석은 시나리오를 하나 내밀었다.

“너 이번에 여기 오디션 한번 봐라.”

“영화 오디션이요?”

“그래, 팀장님이 해야 하는 일인데 사정상 내가 하게 됐다.”

재석의 말에 문자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학생이라는 신분이 문제였다.

“근데, 저 영화 들어가면 학교생활은······.”

“오디션 보고 곧바로 촬영에 들어간다거나 하진 않을 거야. 아직 시나리오뿐이고, 대본이 완성되려면 시간이 꽤 걸려.”

“알겠어요.”

“그리고 이번 영화 오디션은 네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과 조금 다를 거야.”

“어디가요?”

“성인 연기자들과 겨루게 될 거야.”

“네?”

문자영은 아직 학생인 자신이 성인 연기자들과 겨룬다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는 아역만 해 왔지.”

“네, 그렇죠······.”

“이 영화는 딱히 아역을 뽑는다는 말이 없어.”

“허어······.”

문자영은 순간적으로 마네킹이 된 것처럼 놀란 상태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나마 배역 자체는 그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성인 연기자들과 겨루게 될 거야.”

재석은 이 배역이 단순히 아역을 뽑는 자리가 아니었다. 얼굴이 어려 보이는 젊은 여배우들은 전부 동원될 것이었다.

“자영아, 이번 영화는 네가 단순한 아역이 아니라는 걸 이 바닥에 알리는 기회가 될 거야.”

“사장님, 저 열심히 할게요.”

“아, 일단 열심히 하는 것보다 어떤 배역을 할지부터 선택을 해.”

“네, 사장님.”

문자영은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막상 배역을 보더니 고민에 빠졌다.

“근데, 이런 건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

“음, 예를 들어 계모가 널 구박해. 그럼 어떻게 될까?”

“너무 싫을 것 같아요. 그리고 무섭고요.”

“그래, 그런 거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 중 일부를 캐릭터에 집어넣는 거지. 자영이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오디션의 문은 활짝 열려 있으니까.”

“네!”

“지금 시나리오를 읽고 네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역할을 골라 봐.”

문자영은 그 말에 바로 시나리오를 한 번 보더니 가장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역을 골랐다.

“미수 역이요. 나이가 저랑 비슷한 캐릭터고, 이 배역이라면 절대 안 질 자신 있어요.”

생각보다 문자영은 승부욕이 강한 소녀였다.

“좋아, 그럼 내일 저녁에 다시 올게. 그때 네가 해석한 캐릭터를 확인할 거야.”

“근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네가 해 왔던 연기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재석의 말에 문자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스스로도 이번 일이 자신의 배우 인생에 기로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 내일 보자.”

“네.”

재석은 문자영이 좀 더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게 우선이라 봤다. 나머진 그녀의 순수한 능력만으로 잘 해결될 거다.

문자영은 재석이 집에 가자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언니, 저예요.”

(귀여운 자영이가 전화를 다하고, 무슨 일이야?)

“사장님이 저한테 다녀가셨어요.”

(무슨 일로?)

“영화 시나리오를 주셨는데, 이번에 성인 연기자와 한번 겨뤄 보라면서 주셨어요.”

(나한테는 말도 없이 너한테 갔네.)

“그럴 것 같아서 언니한테 전화 걸었어요.”

(그 외에 특별한 건 없고?)

“음, 사장님이 오빠 소리가 듣고 싶으셨는지 좀 아쉬워하시더라고요.”

문자영은 민경에게 재석과 만났던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모종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고마워,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또 이야기 해 줘.)

“네, 언니 다음에 시간 날 때 봬요.”

둘의 전화는 그렇게 끝났고, 다음 날 재석은 촬영장에 가는 차 안에서 민경에게 질문을 받았다.

“오빠, 요즘 일 바빠?”

“바쁘지. 중국 갈 준비해야 해서 말이다. 팀장님이 일을 하나 나한테 떠넘겼다.”

“무슨 일인데?”

“자영이 영화 오디션 합격.”

민경은 어제 문자영에게 들을 이야기가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이번에 좋은 영화 시나리오가 왔는데, 내년 여름에 개봉을 계획하고 있는 공포 영화거든. 거기에 출연시키려고.”

“오빠는 나한테 감추는 게 없네.”

민경은 비록 감출 만한 이야기도 아니긴 했지만, 재석이 사소한 것조차 자신에게 전부 이야기해 준다는 사실에 미소 지었다.

“너랑 나 사이에 감출 게 뭐가 있겠어. 다 터놓고 이야기 하는 거지.”

“혹시 나 말고 모든 걸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람 또 있어요?”

“부모님 빼고 그런 사람 없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잠시 더 이어졌고, 현장에 도착하자 바쁘게 움직였다.

영화 촬영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 촬영장 바깥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가 나오는지 몰랐다가 나중에 민경이 있는 걸 보고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민경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촬영을 방해받지 않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설치되어 쉽사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사람이 점점 많아지네.”

감독은 촬영 장소를 바꿀까도 생각했지만, 이곳에서 찍어야 하는 장면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감독님, 걱정 마세요.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특별한 문제가 되진 않으니까요. 그것보다 오늘 살수차가 온 걸 보니 비 오는 장면을 찍으시려고요?”

“그래야지. 하늘도 적당히 흐리고, 이 상태로 비 오는 걸 찍으면 아주 잘 찍힐 거야.”

하늘은 비가 올 상황이 아니지만,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이게 그 장면인가?’

이 영화에 테마곡 중 하나가 깔리면서 비 오는 날 두 사람이 비를 피하며 달리는 장면을 말이다.

‘워낙 명장면이라 내가 손댈 게 없지.’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그 장면을 오랜 시간 잊지 못했었다. 이번에도 구태여 재석이 손을 대지 않더라도 명장면이 될 터였다.

“오늘 촬영 아주 기대됩니다.”

재석의 한마디에 감독은 그를 조금 이상하게 쳐다봤다.

“이 장면이 기대되는 모양이야?”

“기대되죠. 멋지지 않습니까. 비 오는 날 연인이 되려는 남녀가 비를 피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모습이요.”

“전 대표, 무슨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모양인데 있으면 공유 좀 하면 좋겠는데.”

“감독님, 영상 찍고 나서 이거 느린 화면으로 확인됩니까?”

순간 감독은 그 말을 듣고 뭔가 떠올랐는지 당장 카메라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허, 눈치도 빠르시지.”

어떤 장면을 찍을지 한참 고민하고 있었는데, 재석의 말을 듣고 영상미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바로 감을 잡은 거였다.

문제는 이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가 얼마나 감독의 요구에 맞게 작동하는지가 중요했다.

“좋아요. 그럼 그대로 촬영합시다.”

“예, 감독님.”

카메라 감독은 김재한이 지시한 내용대로 촬영을 준비했다.

“이야, 역시 전 대표는 달라. 대본 각색할 때부터 알아봤어.”

“뭘요. 그냥 이렇게 하면 더 좋은 장면이 나올 것 같아서 한 말인데요.”

“혹시 다음에도 덕 좀 볼 수 있나?”

“감독님 제가 찰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 있을 수가 없어요. 저 하나 보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라서요.”

“크으, 아까워. 그 재능이면 당장 어디 가서 떼돈을 벌 텐데.”

“감독님, 지금도 저는 충분히 벌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이 벌 거고요.”

“허허, 자신감 하나는 대단해.”

재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조감독, 준비됐으면 촬영 시작하자.”

“예.”

조감독은 바쁘게 움직이며 촬영 준비를 끝마치고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촬영 준비됐습니다.”

“그럼 가 볼까. 전 대표는 이리로 와서 같이 봅시다.”

재석을 특별 대우하는 김재한 감독이었다.

“제가 거기 가도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의자 하나 가져와서 앉으면 되는 걸 가지고.”

감독은 근처에 있는 의자를 내주면서 앉게 했다.

“같이 봅시다.”

그렇게 해서 재석은 감독 옆에 딱 붙어서 촬영 장면을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준비 됐지. 액션!”

쏴아아아!

살수차가 하늘 위로 물을 뿌리며 비가 오는 상황을 연출했다. 배우들은 정해진 동선을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다.

영상을 그냥 보면 너무 밋밋하다 할 정도로 흘러갔지만, 감독의 머릿속에는 음악과 약간의 편집 등을 가미한 영상이 흐르고 있을 거다.

“컷!”

감독은 컷을 외치자 배우들의 연기가 끝났다.

“자, 여기서 말이야. 아까 말한 대로 좀 슬로우 모션으로 흘러갈 거야. 이때 음악이 깔리는 거지.”

“따라라란♬♪♩”

재석은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멜로디 하나를 흥얼거렸다.

그러자 감독은 재석을 붙잡고 물었다.

“그 노래 누가 만들었나?”

“아, 제가 그냥 아무렇게나 부른 건데요.”

“진짜인가? 배경이랑 너무 잘 맞는데.”

‘명장면이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린 게 문제가 될 줄이야.’

“그거 다시 들려주겠나?”

하지만 재석은 일부러 틀리게 음을 잡았고, 그러자 감독은 표정이 우울해졌다.

“정말 운이었군.”

아쉬워하는 것과 달리 감독은 다시 녹화된 화면을 바라보았다.

‘겨우 넘겼나?’

재석은 살짝 안도를 하면서도 긴장감을 높였다.

“그래,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음악 깔고, 슬로우 모션. 이렇게 장면을 구성하면 좋을 것 같아.”

“좋습니다. 아주 장면 멋지겠는데요. 근데 남자가 자신의 옷을 벗어 비를 막아 주면서 달리는 건 어떨까요? 얼굴 각도도 정면을 보는 듯하면서 다른 쪽을 보고, 거기에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즐거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다니! 서로 좋아하지만, 그걸 들키기 싫은 두 사람의 행동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어.”

감독은 동일한 생각을 가진 재석의 말을 듣고 아주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야, 감독 하셔도 되겠어요.”

“어어쿠, 큰일 날 소리 하십니다.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어깨너머로 배운 건데요.”

그 어깨너머의 기간이 30년이 넘어서 그런 거다.

“아니야, 전 대표 대단해. 우리 자주 이야기하는 게 어때?”

김재한 감독은 윤정호 감독이 느꼈던 그 마음을 느끼면서 재석을 가까이 두고 싶어 했다.

“너무 덕 보시면 나중에 상실감 큽니다.”

“다음 기회를 만들려면 지금 열심히 덕을 봐야지. 재미없어서 관객 없으면 다음도 없어.”

김재한 감독은 이번 기회에 최대한 뽑아 먹으려는 심보가 대단해 보였다.

“쉽지 않을 겁니다.”

“민경 씨한테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이 정도는 서비스로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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