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문자영이 오디션에 합격한 날, 재석은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해외에 자주 나가네.”
“내년에는 더 자주 나갈 거야.”
재석은 일본에서 불어오는 눈꽃연가의 붐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다. 틈만 나면 아시아권 일정 때문에 민경의 몸이 몇 개가 돼도 모자랄 지경이 된다.
“진짜요?”
“물론이지. 그리고 일본 진출이 얼마 안 남았어. 일본어나 영어 공부는 좀 했어?”
“아하하하.”
민경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침묵했다.
“바쁜 일정이야. 알고 있겠지만, 단어 하나라도 외워야 해.”
“그럼 오빠는 하고 있어요?”
“물론, 벌써 일본어는 공부 시작했다. 아직 단어를 외우고 있는 수준이지만.”
“······사람 맞아요?”
재석은 민경보다 바쁘면 바빴지, 결코 시간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항상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외국어도 공부하고 있던 것이다.
“아마 내년쯤 되면 심도 있는 대화는 힘들어도 기초적인 회화는 가능할걸.”
“그럼 오빠한테 다 맡기면 되겠네요.”
“일본 방송 출연해서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
“으윽!”
민경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방송에서 몇 마디 하는 것 정도야 뭐 얼마나 힘들겠어요.”
“내 꿈이 그 정도에 만족할 정도로 작을 거라고 봐?”
“아니죠······.”
민경은 재석의 야망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라도 출연하게 된다면 일본어에 능수능란하지 않고서야 곤란하게 될 터다.
그녀는 또다시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 하루에 두 단어씩은 외웠어야 했나······.”
“다섯 단어는 해야 할걸.”
“너, 너무 많아요.”
“그렇게 안 하면 내년 일본 진출이 상당히 힘들 거야.”
민경은 입술을 깨물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재석은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 미래에 벌어질 일이 상상이 된 것이다.
“선생님 붙여 줘.”
“알았다. 그렇게 하면 좀 빡빡하게 공부해야 한다.”
“걱정 마.”
민경이 의지를 한 번 불태우면 이것도 문제없이 일 처리가 될 거다.
“어휴, 영감님 때문에 일본어 공부까지 해야 하다니.”
“어허, 다 들린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결국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민경은 내내 투덜거렸다.
“멀다······.”
두 사람은 이윽고 베이징 공항에 도착해 촬영장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촬영장은 베이징에서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 윈난성, 그곳에서도 남부에 위치한 푸얼시에 있었다.
비행시간은 별로 문제 될 게 없었지만, 차를 타고 이동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꽤나 곤욕스러웠다.
‘참 허름하다.’
중국이 이맘때쯤 개발을 한참 시작하고 있을 때지만 아직은 베이징과 몇몇 대도시만 해당되는 사안이었고, 중국에서도 저 멀리 있는 변두리 시까지는 개발을 못하고 있었다.
“여기는 아직 반쯤 시골이군.”
도시라고 할 수는 있지만, 뭔가 발전이 더딘 느낌이 들었다.
“오빠, 여기서 한 달을 지내야 해요?”
“그래야지.”
“당장 잠자는 곳도 걱정이 될 정도네요.”
“그렇게 심각할까?”
다행히 잠자는 곳은 그나마 사람이 쉴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뭐, 어떻게 살 수는 있을 것 같네요.”
“이 정도면 다행이지.”
방은 생각보다는 그렇게 허름하지 않았다.
새하얀 타일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침대도 말끔했다.
“괜찮네.”
“여기 화장실이고······ 음? 쪽문이 하나 있네.”
문고리가 달려 있는 굳게 닫힌 문이 있었다. 민경은 걸쇠를 풀고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네요.”
“그래? 닫힌 문인가.”
재석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자신이 묵을 옆방으로 향해 그곳에 짐을 내려놓았다. 그때, 그 방에 민경의 방에 있던 것과 똑같은 문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위치가 달랐다. 민경의 방에는 오른쪽에 있었다면, 재석의 방에는 왼쪽에 있었다.
“여기도 있네.”
재석이 호기심에 혹시나 하고 문 걸쇠를 풀고 문을 열자, 짐을 정리하고 있는 민경의 모습이 보였다.
“어······.”
“······.”
민경도 문이 열리면서 재석이 나타나자 당황을 했다.
원래 투룸인 방을 개조를 통해 원룸으로 바꾼 거였다. 문은 그대로 놔두고, 문 걸쇠로 문을 못 열게 막아 놓은 거다.
“참나······.”
“어떻게······.”
두 사람은 잠시 당황했지만, 민경이 재석을 향해 다가오더니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이거 방 바꿀 수 있을까요?”
“한번 이야기해 보자.”
재석이 영화 촬영장에 따라온 통역사를 통해 이 사건을 이야기하자, 숙소 주인의 말을 통역사가 다시 말해 줬다.
“아, 방을 바꿔도 되는데 다른 방도 똑같다고 합니다. 손님을 더 많이 받으려고 한 거라네요.”
“네?”
재석은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이딴 식으로 장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장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진정하세요. 여기서 그래도 이 숙소가 가장 좋아서 이곳으로 한 겁니다. 베이징에 있는 좋은 호텔은 여기에 없어요.”
“호텔이 없어요?”
정말 변두리도 이런 변두리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곳이 이곳이었다.
‘아무리 개발 중인 상태라지만 미래의 중국과 너무 차이 나잖아.’
중국이 그사이에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발전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오빠, 됐어요. 모르는 사람이라면 걱정스럽겠지만, 오빠라면 걱정할 필요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여기가 가장 좋은 숙소라고 하잖아요. 됐어요.”
민경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어차피 중국에 온 목적은 즐기는 게 아닌 일이었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와, 진짜.”
재석은 이 당시의 중국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뭐, 답이 없네.”
그래도 이곳이 근방에서 가장 좋은 숙소라고 한다면 제작사에서도 최선을 다한 거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재석은 그래도 감독에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독이 머물고 있는 방에 가자, 감독은 이미 방문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제작사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니, 숙소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감독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제작사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인상이 와락 찡그려졌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혼자 발을 구르며 화를 풀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똑똑.
재석은 문이 열려 있었지만, 그 열린 문을 두드리며 감독에게 사람이 왔다는 걸 알렸다.
“후우, 들렸나?”
“예. 듣고 싶지 않았지만 듣게 됐습니다.”
재석은 감독의 방을 봤지만, 이 방도 똑같이 옆방으로 이어지는 방문이 있었다.
“무슨 숙소가 이럽니까?”
“그래서 제작사에 연락했지. 하지만 이 이상은 곤란하다는 답이야. 무한정 돈을 쏟아부을 수는 없다고······.”
“그럼 결정이 났네요.”
재석도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돈을 제한시켰다는 건 이 이상은 죽어도 못 준다는 거다.
“하아, 힘든 중국 생활이 예상되는데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감독은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결국 이 이상한 숙소에서 한 달간 살아야 하는 거다.
감독은 연기자들이나 다른 스태프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이 숙소 상황을 봐서는 따로 방문을 잠그는 열쇠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의 가격을 생각하면 한몫 단단히 잡을 만하니까.”
상황이 안 좋다는 걸 받아들이고 단단히 준비를 하자는 거였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고 결국 가까운 곳에서 여러 개의 자물쇠를 구입했다.
각자의 문단속을 확실히 했다. 한 달 동안만 잘 버티면 되는 거였다.
“촬영지 파악은 끝났어?”
“예, 감독님. 다 끝났습니다.”
“장비 상태는?”
“멀쩡합니다. 잃어버린 것도 없습니다.”
“좋아, 그럼 사람들 건강 상태는?”
“스태프들은 이상 없습니다.”
“이쪽도 이상 없습니다.”
재석이 손을 흔들며 민경의 건강 상태를 대신 말해 줬다.
“전 좋습니다.”
조승준은 직접 대답하면서 말했다.
“다른 배우들은 언제 도착하지?”
“내일 옵니다. 그 전에 민경 씨와 승준 씨의 촬영분을 먼저 찍으면 됩니다.”
“좋아, 그럼 내일 바로 시작하지. 오늘은 푹 쉬고.”
감독의 지시 내용이 다 끝나자 다들 흩어졌다. 재석과 민경은 방에 들어가 쉬면서도 저 방으로 넘어갈 수 있는 방문을 한 번 바라보았다.
“참 신경 쓰이게 만드네.”
재석은 방문을 향해 살짝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여기 문 잠갔지?”
“네.”
민경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더 이상 답이 없었다.
덜컥!
그러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뭐야, 안 잠갔어?”
“오빠부터 잠갔어야죠.”
“이게 매니저 무서운 줄 몰라.”
“제가 믿는 오빠는 사람을 강제로 덮치진 않아요.”
민경이 지금까지 봐 온 재석을 냉정하게 분석한 결과물이었다.
“참나! 밥이나 먹으러 가자.”
재석의 말에 민경은 저쪽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누구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시선이 민경에게 쏠렸다. 그 시선을 느낀 민경은 재석의 옆에 조심스럽게 붙었다.
“네 시선이 나한테 쏠린다.”
“어머, 왜요?”
“예쁜 여자 혼자 독차지하고 있어서.”
그 말에 민경은 혼자 배시시 웃었다.
‘아주 살기 어린 눈빛이 굉장하네.’
이런 멀고 먼 곳에서도 민경의 존재는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우리 저쪽에 가요.”
찾아간 식당은 꼬치구이를 하는 식당이었다.
‘양꼬치!’
아직은 한국에 양꼬치가 널리 전파되기 전이다. 물론 아는 사람들이야 알지만,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시절이다.
“우리 저거 먹자.”
“저거요?”
민경은 꼬치구이를 보고 호기심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직원은 알 수 없는 말로 뭐라 말을 했지만, 재석과 민경은 대답보다는 손가락으로 ‘이거 10개 주세요.’라고 말했다.
“아, 아아.”
직원은 그제야 두 사람이 외국인인 걸 알았다. 그리고 양꼬치를 찍어 먹을 소스와 함께 줬다.
재석은 기억하고 있는 대로 소스에 찍어서 꼬치를 먹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꼬치는 맛있어.”
“그렇게 맛있어요?”
아직 입도 안 댄 민경은 이걸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했다.
“먹어 봐. 여기에 찍어 먹고.”
하라는 대로 한 번 먹자 민경은 눈이 번쩍 떠졌다.
“우와, 어떻게······.”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민경은 놀랐고, 결과적으로 정말 무식하게 먹어 댔다.
너무 잘 먹는 모습에 직원은 두 사람을 위해 다른 음식도 먹어 보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갑자기 나온 음식에 놀라서 주문한 거 아니라고 어떻게 손발 이용해서 소통을 했다가, 이건 너무 잘 먹어서 사장이 주는 거라면서 또 어렵게 설명을 들었다.
그렇게 서비스로 준 음식도 한 번 맛을 보니 너무 맛있어서 다 먹었다.
결국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고 민경은 좌절했다.
“아, 몸무게 조절해야 하는데.”
연예인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게 이거다. 원 없이 못 먹는다. 화면에서 얼굴이 탱탱 부어 있는 모습으로 나가면 몸매 관리를 실패했다는 소리가 분명히 나온다.
“괜찮아. 이 정도 단백질은 한 번 먹어 놓으면 이틀은 생각이 안 날 거야.”
“하지만 너무 맛있어서 내일도 생각날 것 같아요.”
“하긴······.”
한 번 맛 좋은 음식을 먹었는데 그게 또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걱정 마. 일주일 뒤에나 먹으면 되니까. 그때까지 적당히 먹고 조절하는 거지.”
재석의 말에 민경은 조금 안심을 했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오자, 감독과 다른 사람들이 어디 갔다 왔냐고 물었다.
“저기 꼬치 파는 집에 가서 좀 먹고 왔습니다.”
“그거 맛있어?”
“예, 아주 맛있습니다. 근데 감독님 식사 안 하셨습니까?”
“안 먹었어. 뭘 먹어야 할지 몰라서.”
“그럼 저쪽에 가서 한 번 드셔 보세요.”
재석의 말에 감독은 가서 꼬치구이를 한 번 먹고 오더니 볼록하게 배가 튀어나와 버렸다.
“꺼억, 너무 많이 먹었어.”
이걸로 시작해서 스태프들이 하나둘 먹더니 다음 날도 먹고, 그 뒤에도 먹는 아주 최고의 인기 상품이 되어 버렸다.
***
햇볕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드는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촬영을 하는 민경이었다.
촬영이 끝나고서 식사는 각자 알아서 해결이 아니라 이곳에서 고용한 통역사를 통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들을 먹었다. 첫날 재석처럼 바깥에 나가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 찾아서 먹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민경의 컨디션 관리는 생각보다 잘되고 있었다.
“아구구, 힘들다. 중국에 와서 어디 구경은 한 번도 못하고 그냥 일만 하네요.”
민경이 힘든 표정으로 말하자 재석은 스케줄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민경이 필요 없는 신이 하나 있어, 딱 3일 정도 여유가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기도 뭐하고 그냥 있자니 조금 아쉬운 날짜야.’
“민경아, 잠시 여기에 있어라.”
“네에.”
민경은 혼자 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감독님.”
“무슨 일인가?”
“내일부터 민경이 스케줄이 3일 정도 비는데, 잠시 여행이라도 다녀올 수 있을까요?”
“여행?”
“네.”
“딸랑 둘이 가는 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제가 관리하는 배우의 정신적 피로도를 낮추고 싶어서 그럽니다.”
“뭐, 갔다가 건강하게 돌아온다면 상관없지.”
감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재석은 미소를 지으며 민경에게 잠시 여행을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진짜요?”
“응, 방금 허락을 받았어. 다만 멀리는 못 가고 여기서 버스 타고 몇 시간 가면 나오는 옛 고성을 한 번 구경할 수 있을 거야.”
“그럼 빨리 가서 짐 싸야죠.”
“저녁은 먹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