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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매니저-57화 (57/152)

58화

찌직, 찌직!

팩스가 전송되는 소리가 들리면서 영어로 적힌 내용의 문서가 나왔다.

팩스의 전송이 끝나자, 재석은 그 문서를 나카쿠라 코우이치에게 건네줬다.

“이걸 보시면 그 내용을 아실 겁니다. 제가 일본에 있는 에이전트에게 돈을 주고 내용을 조사해 달라고 한 겁니다.”

나카쿠라는 영어로 되어 있는 문서를 별다른 막힘없이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점차 눈을 크게 뜨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인가?”

“물론입니다. 과거 일본에 비디오 출시를 하고 싶다는 곳이 있어서 궁금해서 조사해 달라고 한 겁니다.”

나카쿠라는 재석의 자료를 보면서 신기해했다.

김문식 국장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런 자료를 언제 준비한 건가?”

“좀 됐습니다. 뭐, 저 개인적으로 알고 싶어서 조사한 자료인데,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

진짜다. 이런 식으로 사용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덕분에 사전 작업으로 눈꽃연가가 일본에서 얼마나 먹힐지 그 시장 조사 자료가 되어 버렸다.

나카쿠라는 에이전트가 철저히 조사한 자료를 읽으며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이토록 상세하게 자료를 준비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이 자료를 통해 눈꽃연가가 절대 손해는 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재석이 내민 자료가 정확하다면, DVD 판매만으로도 적지 않은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으음.”

상황이 생각했던 대로 굴러가지 않게 되자 나카쿠라는 솔직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걸 토대로 검토를 하죠. 그래도 이 가격은 너무 비쌉니다. 일본에서 방영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몇 작품을 구매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그쪽이 본심이었군.”

국장이 하는 말에 나카쿠라는 숨기지 않았다.

“솔직히 이런 자료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이런 준비성이라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안 통할 것 같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재석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거였다.

“하하하!”

국장도 호탕하게 웃으면서 나카쿠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일 다시 보도록 하죠. 서로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가격은 조금 조정하도록 하죠.”

“서로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죠.”

국장과 나카쿠라는 서로 멀어졌다.

“이봐, 전재석이라고 했지?”

“예, 국장님.”

“오늘 고마웠네. 덕분에 저 일본인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건 막았어.”

“뭘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에 방송사 특집으로 드라마 하나 시작하면 연락하지.”

“좋은 작품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어허, 좋은 작품 아니면 안 하겠다는 걸로 들리는데.”

“설마요. 방송사에서 창사 특집으로 야심차게 준비한 작품인데 엉망인 작품일 리가 없죠. 다만······.”

“다만?”

“그 작품에 민경이가 초대받을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캐릭터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걸 프로듀서들이 원할 테니까요.”

“그 문제는 서로가 노력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 그럼 행사는 끝났으니 돌아가서 푹 쉬게. 오늘 일에 대한 보답은 나중에 이야기하지.”

국장은 둘을 그렇게 돌려보냈다.

***

며칠 뒤 재석은 김문직 국장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어서 오게. 자네 덕분에 일본 방송국에 눈꽃연가가 방송이 확정되었네.”

“잘됐네요.”

“내가 전에 자네한테 보답을 하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을 거야. 여기로 한번 가 보게.”

김문직이 내민 건 영어 명함이었다.

그 명함에 적힌 회사와 직함을 읽은 재석은 깜짝 놀랐다.

“에르메르 광고 디렉터? 제가 아는 그 명품 브랜드 맞습니까?”

“맞네. 그 사람이 최근 아시아 권역 모델을 찾고 있지.”

“아, 아시아 권역이요?”

아시아 권역 모델은 아시아의 모든 국가에서 제작되는 광고에 쓰이는 모델을 의미했다. 즉, 에르메르의 아시아 광고를 한 모델이 독점하는 거다.

“이 사람을 찾아가서 내가 추천해 줬다고 하면 되네. 그리고 임민경 정도면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 대우가 가능할 거네.”

“감사합니다.”

재석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걸로 그때의 보답은 깔끔하게 처리한 거네.”

“제가 드린 것보다 더한 걸 주셔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드라마 때문에 다시 볼 수 있도록 하지.”

“물론입니다.”

재석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시아 권역 모델이라니······.’

정말 큰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성사만 된다면 민경은 아시아 전체에 얼굴을 알릴 수 있을 터였다.

재석은 가볍게 점심 식사를 끝낸 뒤 회사로 돌아와, 명함에 적혀 있는 번호로 메시지를 보낸 후 전화를 걸었다.

(Hello.)

곧바로 영어가 튀어 나오는 걸 보고 재석은 직감을 했다.

‘진짜다!’

재석도 영어로 대답을 했다.

“크리스토프 르메르인가요?”

(맞아요. 누구시죠?)

“김문직 씨의 추천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오, 그 영감이 추천을 하다니 놀랄 일이네. 한국이신가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제가 프로필을 준비해서 가져가겠습니다. 장소만 알려 주십시오.”

재석은 그가 말한 장소로 민경의 프로필을 들고 찾아갔다.

“어서 와요.”

에르메르의 광고 디렉터, 크리스토프 르메르는 김문직과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는 서양인이었다. 머리는 스님처럼 밀어 버린 영감님이었다.

“반갑습니다. 전재석입니다.”

“반가워요.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모델이 될 사람을 보여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재석은 민경의 프로필을 내밀자, 그는 바로 확인을 시작했다. 프로필에는 그간 찍은 광고 사진도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흐음. 다양성도 좋고, 굉장히 퓨어한 이미지가 있네요. 그런데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살짝 부족해 보이는데요.”

“직접 보시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실 겁니다.”

“어차피 사진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사진으로만 모델을 접하니까요.”

“당대 최고의 배우입니다. 그런 연출 따위 손쉽게 할 거라 자부합니다.”

재석은 민경을 최대한 어필했다. 명품 브랜드인 에르메르, 그것도 아시아권역 모델이다. 들어오는 돈도,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는 수준도 다르다.

‘이 광고를 따기만 하면 막대한 돈과 인지도를 손에 넣는다.’

“좋습니다. 그럼 한번 얼굴을 보죠. 내일 아침에 볼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최근에 영화 촬영이 다 끝나서 한동안 일정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럼 내일 아침 10시에 승마장으로 오세요.”

그는 정확히 딱 할 말만 했다. 재석은 그 말을 듣고 민경이 상당히 어려운 일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일단은 해 보자.’

이날 재석이 바로 민경에게 달려가서 내용을 전달하자, 민경은 입이 떡 벌어지면서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보였다.

***

다음날 재석과 민경은 승마장에 와서 크리스토프 르메르를 만났다.

“흐음. 확실히 사진보다는 실물이 훨씬 더 좋네요. 그게 더 아쉽기도 하고. 사진작가의 실력도 좀 안 좋았나 보네요.”

“안녕하세요.”

“오호······.”

르메르는 민경이 인사를 건네는 모습조차도 광고 디렉터로서의 시선으로 훑었다. 한 명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닌, 카메라에 담길 피사체로 가치가 있는지 감별하는 시선이었다.

“말 탈 줄 알아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 민경이 재석의 얼굴을 한 번 보자, 재석이 입을 열었다.

“너보고 말 탈 줄 아냐는데.”

“모릅니다.”

고개를 흔들며 하는 대답에 르메르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한번 타 봐요.”

그의 한마디에 민경은 긴장을 했다.

민경은 조금 무섭기는 했으나, 안전 요원이 있으니 죽진 않겠다는 생각에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말에 올라탔지만, 고삐를 꽉 쥔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르메르는 그런 민경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흐음, 몸이 조금 경직되긴 했지만 표정은 자연스럽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승마장으로 오라고 하신 거죠?”

재석은 르메르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지시에 의문을 품었다. 에르메르의 광고에 승마하는 장면이 쓰일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시험입니다. 그리고 승마는 상당히 고급 스포츠입니다. 돈 많은 이들이 승마를 즐기죠. 그 승마를 여유롭게 즐기는 그들. 말 위에서도 에르메르를 사용해도 그 기품이 느껴져야 합니다. 그게 저희가 모델을 뽑는 가장 최우선시하는 조건이죠.”

즉, 민경이 말 위에서 얼마나 분위기를 연출하는지에 대한 시험이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네요. 이번에는 직접 카메라 테스트를 해 보죠.”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고 승마장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민경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랄 법도 하건만, 민경은 당황하지 않은 채 여유로운 모습으로 계속 말을 탔다.

그렇게 계속 타다가 어느 순간 익숙해짐을 느끼고 반응이 더 자연스러워지자 르메르의 눈길이 바뀌었다.

“대단하군요. 솔직히 갑자기 말을 태우면 하나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겁을 집어먹던데 말이죠. 그런 것도 없네요. 보통은 넘는 레이디군요.”

“별말씀을.”

재석은 르메르가 제시한 이상한 시험을 통과한 듯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으로 와요!”

영어로 이야기하자 안전 요원은 민경이 타고 있는 말을 끌고 르메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이제 내려요.”

“민경아, 내리래.”

민경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리고 재석의 팔을 꽉 잡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너무 겁났어요.”

“이제 끝났어.”

재석이 다독여 주자 그녀는 마음이 진정됐는지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지었다.

“좋네요. 합격입니다. 내일 내가 그쪽 회사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죠.”

“이걸로 충분한가요?”

재석은 혹시나 모를 시험이 더 있는지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건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까지 모르는 거죠. 그때 가서 제가 마음이 바뀔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그 끝에는 하나로 귀결됩니다. 된다. 안 된다.”

르메르의 말을 듣고 재석은 뭔가 살짝 불안함을 느꼈다.

‘아직인가?’

재석은 곧바로 차를 타고 돌아갔다. 차 안에서 민경은 폭풍같이 말을 쏟아냈다.

“오빠, 내가 진짜 말 위에 탔을 때 어땠는지 알아?”

“어땠는데?”

“다리가 떨려서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너무 겁났던 일을 아주 상세히 이야기하는 민경이었다.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걸 풀고 있는 거다.

다음날 르메르가 회사에 찾아왔다.

“흐음, 이렇게 작은 회사일 줄은 몰랐네요.”

“회사를 차린 지 1년이 안 됐습니다. 하지만 내년에는 지금과 다를 겁니다.”

“그런 모델이 있다면 상황이 확실히 바뀌겠죠.”

르메르의 눈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있었다. 회사에서 중요한 건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그 또한 생각했다.

“일단 저희가 제시하는 광고료는 한화로 5억입니다.”

“아하하하.”

재석의 입에서 절로 웃음소리가 나왔다.

“아직 제 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르메르의 말에 재석은 입가에 있던 웃음이 싹 사라졌다.

“그럼, 또 뭘 보여 줘야 하나요?”

재석의 말에 르메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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