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르메르의 입이 천천히 달싹이기 시작했다.
“임민경 씨를 직접 만나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확신이 드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가계약을 진행한 후에, 최종적으로 실제 촬영을 한번 찍어 본 뒤 결정하고 싶습니다.”
재석은 테스트를 한 번 더 진행한다는 이야기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민경이라면 문제없이 통과할 테니까.’
이야기가 빠르게 결정되지 않고 번거롭게 이어지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지만, 테스트 자체는 민경이라면 충분히 통과할 것이라는 확신이 재석에겐 있었다.
“알겠습니다.”
“3일 뒤에 촬영을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가능합니다.”
거의 통보에 가깝지만, 지금 갑은 저쪽이다.
‘반드시 민경이를 아시아 권역 모델로 만들고 만다.’
에르메르의 아시아 권역 모델로 발탁되기만 한다면, 이후 활동 영역을 확대하기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그럼 3일 뒤에 뵙죠.”
둘은 그렇게 악수를 하고 나서 헤어졌다.
재석은 그 뒤에 따로 민경을 만나러 갔다.
“어떻게 됐어요?”
“일단 가계약만 진행했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촬영을 해 본 후에 최종적으로 계약을 결정하겠대.”
“네? 아니, 무슨 그런······.”
“보통 깐깐한 게 아니야. 이야기를 들어 보니 중국, 일본의 유명 배우들과도 접촉했었는데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아 했었나 봐.”
“그래서 돈을 얼마나 준대요?”
재석이 한 손을 쫙 펼치자 민경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크게 벌렸다.
“5억?”
“맞아.”
“깐깐할 만한 액수네요.”
민경도 수긍할 정도다.
“3일 뒤 촬영 때 어떻게 해서든 고급스러운 느낌을 만들어야 해.”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그 느낌 꼭 만들어 낼게요.”
민경은 이제부터 스스로 난관을 극복해 나가고자 했다.
“그래, 이제는 민경이 너만 믿을게.”
***
르메르는 매의 눈으로 고용된 사진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경은 모든 준비를 다 끝내고 촬영 전 재석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자 재석은 잘하라는 의미로 주먹을 들고 하늘 높이 쳐들었다. 민경도 똑같이 따라 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민경은 카메라를 눈앞에 두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잠시간 정적이 찾아왔고, 마치 스튜디오 안의 시간이 멈춘 것같이 느껴졌다.
스르륵!
민경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걸 압도하는 위엄이 풍겨져 나왔다.
찰칵!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은 후 르메르는 촬영을 중단시켰다.
“확인하죠.”
이 하나의 사진으로 계약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재석은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떨리는 마음에 사진을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후우.”
민경 또한 찍힌 사진을 확인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것은 불안함 때문이 아니었다. 확고한 자신이 있기에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네깟 게 날 까?’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듯한 르메르의 태도에 분노하고 있었다.
“크크크.”
재석은 민경이 화난 모습을 처음 봤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남들은 지금 르메르에게 시선이 쏠려 있었지만, 재석만이 이를 보고 웃음을 흘렸다.
‘그래, 제아무리 유명 브랜드의 디렉터라 할지라도 너는 그에게 선택받는 입장이어선 안 되지.’
민경은 이제 선택을 받는 게 아닌, 선택을 하는 위치에 오른 스타였다.
“허허허! 마치 세상을 지배하는 여왕을 보는 것 같군!”
사진 속 민경의 모습은 모두를 두려움에 벌벌 떨게 하는 폭군의 모습도 언뜻 보이는 듯했다.
뚜벅뚜벅.
르메르는 재석에게 다가오더니 품속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계약을 진행하시죠.”
“좋습니다.”
“에르메르는 왕가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납품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우리 브랜드에는 그만한 자격을 가진 자들이 소유하는 브랜드죠. ‘날 소유하려거든 그만한 자격을 갖춰라.’ 명품이라는 이미지에 아주 잘 어울리는 분을 이렇게 데려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깐깐한 르메르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하자 재석도 그에 화답했다.
“별말씀을요.”
계약서에 드디어 르메르의 사인이 들어갔다.
“모델료는 촬영이 다 끝나면 바로 입금될 겁니다. 중간 필요 경비는 에르메르에서 모두 책임질 겁니다.”
‘이 아저씨는 통과되니 아주 확실하게 해 주네.’
민경은 한결같이 여왕의 느낌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이날 촬영이 끝나고 다음 날 또 촬영이 있었다. 그 뒤에 곧바로 가까운 일본으로 갔고, 거기서 촬영이 끝나자 태국. 그다음에는 인도, 모로코까지 가는 아주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재석과 민경이 아주 힘이 쫙 빠져 버렸다.
“중국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는데 4개국을 추가로 가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 말이다.”
“딱 하루만 쉬어야겠다.”
두 사람은 각자 집에 도착해서 정말 꼼짝도 안 하고 거의 잠만 잤다.
이틀 뒤, 회사 계좌에 5억이란 돈이 딱 들어온 걸 보고 재석은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재석이 행복함을 느끼고 있을 때 그의 전화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임민경 씨 매니저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전 그린미디어의 유인철입니다. 이곳에서 연출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이구,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저희가 계획하고 있는 드라마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임민경 씨가 출연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지금쯤 거기에 대본이 하나 도착했을 겁니다.)
“퀵이요!”
재석은 때마침 도착한 퀵서비스를 통해 대본을 전달받았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거 보시고 결정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3일 안에 결정해 주십시오.)
꽤 다급하게 결정을 해 달라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리저리 캐스팅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재석은 전화를 끊고 대본을 읽었다. 그리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부를 걸다!’
S방송사에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 드라마였다.
‘마지막 회 시청률이 49퍼센트였던 역대 드라마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드라마가 내 손에 들어오다니.’
이게 민경의 앞으로 온 거다. 대기획이란 타이틀로 준비된 드라마만큼 그에 걸맞은 배우 섭외에 진행된 거다.
‘이건 잡아야 한다.’
이걸 거절할 이유 따윈 없다. 일도 끝나서 새로 일거리 찾는 중인 상태에서 들어온 일이다.
재석은 당장 그 대본을 들고 민경에게 달려갔다.
민경의 집 앞에서 재석은 소리쳤다.
쿵쿵쿵!
“민경아!”
문이 열리기 무섭게 재석은 숨차게 입을 열었다.
“미, 민경아, 이거, 이거 봐라.”
민경은 그 대본을 조용히 받아 들더니 말없이 대본을 보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물 한 잔을 가지고 나왔다.
“마셔요.”
“어, 고맙다.”
시원한 물 한 잔에 재석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흐음······.”
대본을 쭉 읽은 민경은 눈썹을 한 번 위로 움직였다. 상당히 괜찮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토리 한 부분이 걸렸다.
“오빠, 이거 도박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방송 돼요?”
별별 드라마가 다 나왔지만, 아직 도박을 메인으로 잡은 건 없기에 걱정이 된 듯했다.
“괜찮아. 이거 이미 확정된 거야.”
“흐음.”
민경은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근데 아역까지 하나요?”
“아니, 아역은 따로 구할 거야.”
대규모 투자를 받고 만들어지는 드라마이니만큼 돈을 아끼려고 아역 배우를 안 쓰진 않을 것이었다.
“확실히 재미는 있어요.”
“그럼 할 거냐?”
“근데 도박이 꺼려지긴 해서······.”
재석은 이 드라마를 하는 것이 그녀의 커리어에 있어 큰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선택에 개입하고 싶진 않았다.
“확실히 재미는 있어요.”
재미없을 수가 없다. 내용은 이미 좋았다. 다만 그만한 돈 문제가 걸렸지만, 확정 지어진 드라마를 가지고 하는 거라 문제는 없다.
“그럼 할 거냐?”
“근데, 솔직히 도박은 꺼려지긴 하네요.”
민경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재석은 민경을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내일 하루 더 생각하고 답을 줘라. 이거 빨리 답해 줘야 하는 거니까.”
재석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가요? 설득 안 하고.”
“나는 네가 누군가의 설득이 아닌, 스스로 선택해서 연기하길 원해.”
재석은 미련이 없었다. 대박 드라마지만 그것보다 민경이 더 중요했다.
민경은 그 말을 듣고 조금 감격했는지 살짝 홍조가 일어났다.
“그럼 진지하게 읽어 보고 결정할게요.”
“고맙다.”
“뭘요. 항상 절 생각해 주는 오빠 마음 아주 잘 아니까요.”
이야기를 끝낸 재석이 회사로 돌아오자 대본이 하나 더 도착해 있었다.
‘나의 첫사랑.’
이것도 민경이 출연했던 영화였다. 하지만 지금 재석은 이걸 보자 없애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통해 민경이가 돈을 많이 벌긴 했지만, 드라마 전부를 걸다와 비교하면 정말 손색이 있지.’
받는 돈의 액수는 차이는 안 날 거다. 차이 나는 건 인기다. 확고부동이라는 단어가 있다면 이거 때문에 생기는 말일 거다.
‘민경아, 넌 어떤 선택할 거냐.’
***
민경은 중국에서 재석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안 한다고 하면 오빠는 어떻게 나올까?”
중국에서 찍은 한 장이 재석과 민경이 유일하게 함께 찍은 사진이다.
“꼭 한마디 할 것 같기는 한데.”
민경은 솔직히 대본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개인적인 취향이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 날 재석이 찾아왔을 때 대본을 내밀며 말했다.
“오빠, 이거 할게요.”
“진짜냐?”
재석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는 걸 보니 확실히 보통 작품은 아닌 모양이다.
“솔직하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조건이 있어요.”
“조건?”
“이거 끝나고 제가 원하는 거 하나 들어줘야 해요.”
“그래, 원하는 게 뭔데?”
“포상 휴가를 따로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음? 따로라······.”
“오빠가 이거 선택한 여행이면 나중에 포상 휴가 받을 텐데. 그거 저랑 오빠 둘만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일본 여행도 한 번 같이 간 적이 있으니 재석에게 딱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그래,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
재석은 민경의 승낙이 떨어지자 바로 그쪽에 하겠다고 연락을 취했고, 그들은 곧바로 계약서를 들고 회사로 찾아왔다.
“허허, 빨리 찾아오셨네요.”
“마음 바뀌시기 전에 도장 찍어야죠.”
그린미디어에서 정말 민경을 놓치기 싫은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일단 회당 출연료를 얼마를 주실지 궁금합니다.”
“이천입니다.”
깔끔하게 두 장이었다.
“몇 회 출연입니까?”
“총 24부작에 21회 출연입니다.”
돈 계산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민경이 말한 계약 조항이었다.
“좋습니다. 돈 문제는 딱 좋습니다. 그런데 계약서에 추가 조항을 좀 집어넣어 주실 수 있습니까?”
“추가 조항이요?”
“네, 대단한 건 아닙니다. 포상 휴가를 가게 되면 그냥 돈으로 주십시오. 날짜에 맞춰 민경이가 원하는 여행지를 선택하고 싶다고 합니다.”
“아, 대단한 건 아니네요. 뭐, 어렵지 않죠. 돈으로 드리는 거야.”
그린미디어는 아주 흔쾌히 받아들인 후 민경의 계약이 끝나자 재석의 앞에 또 다른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건 뭔가요?”
“이건 전재석 씨와의 계약서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대본 각색입니다. 몇 작품 직접 손보셨다고 해서 이 바닥에 소문이 다 퍼졌습니다. 각색에 천부적 소질이 있으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