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최진규 작가는 재석이 있는 회사로 달려와 매달렸다.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저 좀 살려 주십시오.”
“홈페이지 보셨습니까?”
“······.”
불과 하루 만에 홈페이지에는 주인공들을 결혼시키라는 글이 폭발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수십 페이지에 걸쳐서 말이다.
드라마 시청률은 막판에 접어들어서는 38퍼센트를 넘기고 있었다. 시작 시청률이 20퍼센트를 넘기고, 그 두 배를 향해 달리는 실정이라 무서울 정도다.
만약 여기서 기존의 스토리대로 드라마가 진행된다면, 시청자들의 반응은 실망으로 인해 시청률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최민규는 그 책임을 혼자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감독님도 이대로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갑자기 바꿔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대로 급하게 스토리를 짰다가는 드라마 망합니다!”
최진규는 호소를 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재석은 한숨을 내쉬고는 서랍을 열어 몇 화 분량에 해당하는 대본을 그에게 건넸다.
“혹시 몰라서 준비한 겁니다.”
재석이 내민 대본을 받아 들고 최진규는 급하게 그걸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거면 됩니다! 돼요!”
“제가 적은 게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수정을 좀 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진규는 격하게 재석을 껴안으며 기쁨을 표현하고는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 날 촬영은 재석이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대본이 바뀌었으니 이미 찍어 놓은 부분들 중 일부는 버려야 했고, 버린 만큼 다시 촬영을 해야 했다.
흔히 말하는 추가 촬영을 진행하게 된 거였다.
“오빠, 이거 끝나면 우리 포상 휴가 확실히 받지?”
“받지. 드라마가 이렇게 잘되는데 포상 휴가 받지.”
“그럼 됐어.”
민경이 뭔가를 꾸미는 것 같지만, 재석은 그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드라마 추가 촬영 일정이 좀 고되긴 했지만, 촬영장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는 다들 모여 잔을 부딪치며 축하의 자리를 가졌다. 이때는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고, 술자리가 끝나고 나서도 2차를 갈 사람들은 갔다.
하지만 재석과 민경은 자리에서 벗어났다.
“오빠, 한잔 더 하자.”
“2차 안 따라가고?”
“거기는 귀찮아. 눈치봐야 할 사람도 많고.”
선배도 있고 감독도 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래, 편하게 마시려면 조용히 마셔야지. 어디로 갈래?”
“집에서 마셔요.”
집에서 마시자는 말에 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마시는 게 가장 편하긴 했다.
아직 마트가 문을 닫기 전에 재석이 술을 사러 들어갔는데 민경이 소주가 가득 담긴 페트병을 들었다.
“아니, 무슨······.”
유리병에 담긴 소주와 달리 술 도수도 높고, 양도 많았다. 저걸 두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걱정 마요. 다 마실 방법이 있으니까.”
“뭐가 있길래 그러는 거냐.”
재석은 순순히 민경의 뒤를 따라가서 집에 도착했는데, 그녀는 검보랏빛의 점성 있는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냐.”
“복분자 원액이요.”
“잉?”
갑자기 나타난 복분자 원액에 놀란 재석이었다.
“차로 마시면 좋다고 엄마가 보내 주셨는데, 술로 마셔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건 과실주를 만들어 먹을 때 이야기잖아.”
“이렇게 마셔도 맛있어요.”
민경은 주전자에 술과 복분자 원액을 섞어서 잔에 따라 줬다.
색은 시중에서 파는 복분자주와 똑같았다.
후릅!
민경은 살짝 맛을 보면서 적당한 농도를 다시 맞춰 나갔다.
“자, 됐어요. 마셔 봐요.”
재석은 조금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래도 한 번 마시긴 했다.
“음?”
일반 과실주와는 다른 색다름이 느껴졌다.
“오, 좋은데.”
“이거 비율만 잘 맞추면 직접 담가 먹는 복분자주만큼 좋아요. 비율 맞추기가 조금 어려워서 그렇지.”
“누가 알려 준 거야?”
“아빠가요.”
민경은 술을 그리 잘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이상한 건 많이 알았다.
“그리고 술안주는 제가 금방 해 드릴게요.”
민경은 부엌에 들어가서 조금 지지고 볶고 하더니 뚝딱 오징어 볶음 요리를 내왔다.
“오호.”
뭔가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건 넘어가기로 했다.
짠!
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민경이 자꾸 술을 따라 주면 재석이 그걸 마셨다.
“으하하하.”
술잔을 채워 주니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러다 보니 점점 눈 풀리기 시작했다.
“으히히히.”
민경은 이제 재석이 딱 만취해서 기억을 잃을 상태라는 걸 파악했다.
“완전히 필름 끊기겠네.”
재석 혼자서 페트 소주병 반을 비웠으니 정신이 멀쩡하면 이상한 거다.
민경은 재석에게 조용히 다가서서 말했다.
“오빠, 만약에 내가 연애를 하면 어떨 것 같아?”
“뭐, 연애? 누구랑!”
재석은 만취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민경과 연애하는 놈이 누구인지 노려보았다. 눈을 번뜩였다.
“오빠, 진정해요. 만약에, 진짜 만약에, 그리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없지? 그렇지?”
재석은 다시 눈이 풀리면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럼 오빠는 만약 연애를 시작하면 어떤 기분이야?”
“너무 무서울 것 같아.”
“왜요?”
“남에게 들킬까 봐.”
“그럼 안 들키면 되죠.”
“어려워.”
“이유는요?”
“간단해. 주변에 쫙 깔린 파파라치들이야. 이번 드라마를 계기로 파파라치들이 언제 어디를 가도 문제가 될 거야.”
“그럼 아닌 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인위적인 노출.”
“인위적인 노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그 어떤 일도 없다는 것. 두 사람에게는 그것이 일상이라는 인식.”
재석의 말뜻을 이해한 민경은 박수를 쳤다.
“그걸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의 집이 가까워야 해.”
재석의 말에 민경은 정말 기초부터 철저하게 계획이란 걸 세워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면 두 사람이 자주 마주치고 그러는 것 자체가 당연한 일상이 되고,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지.”
“그럼 다음은요?”
“중간에 한 번 뉴스를 타야 해. 스캔들 아니냐는 의심.”
제아무리 자연스럽게 감춘다고 한들, 누군가는 의심할 터였다. 스캔들은 피할 수 없는 사고였다.
“그건 어떻게 넘기죠?”
“그때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자들을 비난해야 해. 좋은 동료, 혹은 비즈니스 관계를 넘겨짚어 오해하고 매도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거야. 그래도 그러한 스캔들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나서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가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니, 괜찮아. 분명 처음에는 시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미 스캔들이 떴을 때랑 다를 게 없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도리어 수많은 팬들이 너를 보호해 줄 거야.”
“그것만으로 반응이 잠잠해질까요?”
“그 뒤로 또다시 그런 이야기가 반복된다고 해도 그때는 관심이 줄어들었을 거야. 누구든 새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니까.”
민경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시원해졌다. 그래도 마지막 의문을 보였다.
“그래도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으면요?”
“그건 우리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으로 본 독자들뿐일 거야.”
“오빠는 정말 고민 많이 했나 보네요.”
“이 바닥에 들어왔을 때부터 했지. 그게 남자든 여자든 내가 관리해야 할 연예인이니까. 그리고 졸려······ 하암!”
“잠시만요. 이불 깔아 드릴게요.”
아침이 되자 재석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일어났어요?”
“뭐야, 왜······.”
눈앞에서 민경이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꿀물이에요.”
“어.”
재석은 그걸 조용히 받아 들었다.
“기억 안 나요?”
민경의 물음에 재석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뭔가 흐릿하게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됐어요. 이거 쭉 마신 뒤 씻고 나오세요.”
“응.”
재석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나오자, 눈앞에 조촐하지만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 먹고 출근하세요.”
“어······.”
재석은 식사를 끝내고 출근하기 직전, 먼저 포켓 스코프를 꺼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마치 대상을 찾는 저격수처럼 주변을 샅샅이 확인했다.
“파파라치 찾아요? 제가 밖으로 나가서 다 확인했어요.”
재석은 그 말을 듣고 안심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회사에 돌아오자, 주명진이 재석을 보고 한마디 했다.
“어제 술을 얼마나 마신 거냐.”
“크흠, 그게······ 기억이 안 납니다.”
“아이고, 그래도 정시에 출근하느라 애썼다. 그런데 일본 쪽 이야기는 끝낸 거야?”
“그러지 않아도 일본 에이전트에게 연락이 오긴 왔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하냐고 물어서 2주일 뒤에 일정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이야, 진짜 일본에 가긴 가는구나.”
일본 쪽 일은 재석이 홀로 진행하고 있었기에 다른 직원들은 진행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쪽 일은 어떻게 따는 거야?”
“에이전시를 통해서 이미 진행하고 있고, 날짜에 맞춰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재석은 일본 스케줄이 꽉 잡혀 있었다. 토크쇼, 라디오, 인터뷰 촬영 등 아주 빡빡하게 말이다. 쉬는 시간 따윈 없었다.
“이번 일정은 3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일거리가 많으면 자주 왔다 갔다 하게 될 겁니다.”
“회사에 들어오는 돈이 많아지겠네. 잘하면 일본에 지사를 내는 거야?”
“기회가 된다면 그렇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하긴 들어오는 돈이 많으면 생각해 보겠지만, 잠깐 반짝이는 걸로는 그렇지.”
‘정말 반짝이는 걸로 끝날까?’
사람들은 모른다. 일본에서 얼마나 광풍이 부는지. 지금 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해가 가면 갈수록 미친 듯이 불어오는 광풍에 일본이 열광하게 된다.
드라마 열기는 오래 안 가지만, 배우를 향한 열기는 향후 10년간 간다.
배우는 건물 몇 채를 사고도 남는 수준이고, 어떤 이는 회사까지 차리면서 인생일 달라질 정도다.
“그런데 드라마 끝났는데 다른 일정은 없나요?”
“없기는, 있지. 광고 제의가 좀 들어왔어.”
“가격은요?”
“그쪽이 시원하게 제시했어.”
“민경이를 어떻게 해 보려는 곳에서 온 광고인가요?”
“현재 확인 중이야. 그게 되면 받아들일까 고민 중이고.”
“아니면 일 진행하세요. 촬영 일자는 저희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로 해 주시고요. 혹시 그린미디어에서 포상 휴가 나왔나요?”
“나왔어. 근데 계약대로 한다면서 돈을 주던데.”
“그거 잘 됐네요. 민경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저희가 준비해서 따로 갈 거예요.”
“보호자로 또 따라가겠네.”
“예, 뭐, 그럴 수밖에 없죠.”
“이야, 그러다 정들겠어.”
“뭐, 정은 들겠죠.”
재석은 별 뜻 없이 대답한 거지만, 주명진이 기대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싱겁게 대답하네.”
“뭐, 어찌 되었든 지금은 민경이 휴가 준비를 해야 해서요.”
재석은 바로 전화를 걸어서 어디로 갈지 정하라고 했고, 민경은 휴양지를 택한 뒤 돈만 보내라고 말했다.
“직접 하려고?”
(응, 예약은 나 혼자 해 보려고.)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재석은 돈을 보냈다.
“혼자 여행을 가려나?”
하지만 민경은 잠시 뒤 다시 전화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오빠, 다 됐어. 날짜 알려 줄게. 이번에 여행 같이 가는 거다?)
“어, 그래. 가야지.”
어디를 가려고 이렇게 하는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재석은 아무 말 없이 민경이 하자는 대로 했다.
***
재석은 여행 당일 날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됐다.
“음? 터키네.”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뭐, 터키 좋지.”
터키는 유럽과 가까워서 영어가 더 잘 통한다.
“오빠도 안 가 봤죠?”
“갈 일이 없었다.”
그런 곳을 정말 갈 일이 없었다.
“일정도 제가 짜 왔어요.”
민경이 짜 놓은 일정을 보자 재석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너 다음부터 일정 짜지 마라. 뭐가 이리 허술해. 예약되어 있는 게 하나도 없고, 뭐 보고 싶다만 있고 아무것도 없잖아.”
“오빠 있잖아요.”
“아이고, 머리야.”
정말 민경은 재석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나마 첫날 숙소는 잡아 놨네.”
뭘 보든 숙소는 필수 코스다. 하지만 민경은 첫날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안 했다.
“아니, 무슨 꽃 같은 할배들도 아니고.”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꽃 같은 할배라뇨. 영감님은 오빠잖아요.”
“아니, 내 말은······ 됐다.”
미래에 방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이름을 말해 봐야 아무 의미 없었다.
“가자, 터키로!”
민경이 활기차게 외치며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