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매니저 63화>
무수한 문화 유적이 있는 터키에서 정말 재밌게 여행하고 사진도 찍고 했지만, 눈뜨면 돌아다니고 돌아와서 잠들고 다시 왔다 갔다 하며 보는 게 전부였다.
일주일간 재석은 민경을 매니저처럼 돌보진 않았다.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고, 오히려 민경이 일정 관리를 제외하곤 자잘한 모든 것들을 챙겨 줬다.
재석이 뭔가 말하기 전에 눈치껏 이거 챙겨 주고, 저거 챙겨 주기 시작한 거다.
“갑자기 이러니까 조금 당황스럽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건 일이 아니잖아요. 일할 때는 일. 지금은 일이 아니니까 오빠 도와주고.”
“좋긴 하다만…….”
“좋으면서 말이 많네요.”
솔직히 좋긴 했다. 민경이 뭔가를 해 주는 게.
“자주 해 줘요?”
“아, 솔직히 부탁하고 싶다만, 좀 미안해지는데.”
“괜찮아요. 항상 저 때문에 고생해 주는데.”
뭔가 민경의 품이 더 넓어진 것 같았다. 재석이 힘든 것도 알아주고 있었다.
“여행 처음 시작할 때와 전혀 다른데.”
“이제 저도 오빠가 하는 일 어떤지 잘 아는데 달라져야죠.”
갑자기 어른스러워진 민경이었다.
“뭔가 무서운데…… 무슨 음모를 꾸미냐?”
“아, 그것보다 오빠. 저 이사해야겠어요.”
“이사?”
“네, 오빠 살고 있는 근처로요.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여태까지 번거로웠잖아요. 이제 같이 움직여요.”
재석은 민경의 뜬금없는 제안에 당황스러워했다. 본인이 술에 잔뜩 취해 내놓은 계획인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출근할 때 더 편하잖아요. 돌아갈 때도 편하고.”
민경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정말 순수하게 일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뭐, 알았다.”
재석은 민경의 말뜻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여행이 끝날 때까지 민경은 철저히 재석을 서포트하는 입장이었다.
‘뭔가 대접받는 느낌이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다. 마치 매니저와 연예인이 뒤바뀐 것 같았다.
터키 여행은 정말 서로가 돕고 돕는 느낌이 강한 여행이었다. 새로운 유대감이 생긴 느낌을 강하게 받은 재석이었다.
* * *
한국에 돌아온 재석이 가장 먼저 한 건 민경의 집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가 사는 동네에 민경이가 살 만한 마땅한 집이 없다는 것이었다.
‘보안이 잘되어야 하는데…….’
유명해질수록 민경에게 따라붙는 기자나 사생팬도 많아질 터였다. 그런 이들을 배제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선 철저한 보안이 가장 중요했다.
‘여차하면 공사를 하거나, 내가 이사를 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겠어.’
재석은 자신이 생각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집을 찾기 위해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괜찮은 집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재석은 일단 이 문제는 미뤄 두고, 일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또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 * *
민경과 재석은 일본에 도착하자 곧바로 에이전트인 고미카와 나오미를 만났다.
“바로 일정 불러 주세요.”
“예.”
재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영어가 아닌 일본어였다. 물론 좋은 발음은 아니었지만, 재석이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오미는 재석의 입에서 나온 일본어를 듣고 조금 놀랐지만, 곧바로 민경의 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도쿄에서 1시에 TBS라디오 출연이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후지TV 토크쇼 출연이 있습니다. 출연 시간은 대략 1시간 내외입니다.”
“이후 스케줄이 재경 6국의 스케줄입니까?”
재경 6국. NHK를 중심으로 6개의 지상파 방송사를 일컫는 말이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일본어를 언제…….”
“일본 활동을 계획하고 있어서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했습니다. 스케줄 내용을 계속 알려 주세요.”
“예.”
재석은 나오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케줄 장소로 움직였다.
방송사에 도착하자 그들을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통역사입니다.”
“준비가 철저하시군요. 들어갑시다.”
눈꽃연가의 여파가 무서운 게, 방송사에 도착하자 다들 민경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민경의 존재감은 그 누구보다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冬の花!”
“冬の花!”
사람들이 ‘후유노 하나!’ 라면서 외치거나 웅성거렸다.
“후유노 하나?”
“눈꽃연가의 일본판 제목이야.”
“제목이 다르네요.”
“제목이 다른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야. 중요한 건 일본에서도 너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단 거지.”
이제 막 방송국에 도착한 것에 불과했는데 엄청난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역시, 오빠의 선택은 대단해요. 일본 진출도 이렇게 될 줄 알고 한 거죠?”
“대충은.”
두 사람은 그곳에서 라디오 방송을 끝마친 후, 통역사를 이끌고 하루 종일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그 탓에 통역사는 입술이 바짝 마를 정도로 쉬지 않고 말을 해야 했다.
민경은 그런 통역사를 위해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사인을 해 준 뒤 사진까지 함께 찍어 줬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민경은 통역사에게 다음에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 통역사가 감격을 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해서 민경 상에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민경이 그렇게 인사를 받는 사이, 재석은 나오미의 질문을 받았다.
“대단하시네요. 발음이 조금 미숙하지만,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일본어를 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일본어는 한국어와 문법적으로 유사성이 많아서 비교적 쉽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자는 모르는 게 많아서 읽는 게 어렵습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굉장하세요.”
나오미는 진심으로 크게 놀랐다.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건 오늘 처음 만났을 때 알 수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일 스케줄은 뭡니까?”
“대다수가 인터뷰 스케줄입니다.”
“정확히 몇 개죠?”
“시간 배분을 위해 고심을 했지만, 15번의 인터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인터뷰만 하다 끝나겠네.”
재석은 전체 스케줄 안에서 중요한 것들을 확인했다.
“다음에는 인터뷰 스케줄을 좀 줄여야겠네요.”
“10번 이하로 준비하죠.”
“그리고 광고나 잡지 이런 것들도 문의가 많이 왔나요?”
“아주 많았습니다만, 당장은 할 수 없어서 시간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나오미 상, 그 안에서 민경이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괜찮은 것들을 먼저 선별해서 움직이도록 하죠. 그리고 혹시 어느 한쪽에 출연하면 다른 경쟁업체에서는 출연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조심스럽게 선별해 주세요.”
“선별해서 추후에 메일로 내용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예.”
다음 날도 정말 쉬는 시간 없이 몰아치며 움직였다.
민경이 수많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재석은 그 옆에서 다음 스케줄을 확인하여 차질이 생기지 않게 만전을 기했다.
“으아!”
재석은 민경이 일정을 끝낸 후 호텔에 돌아오자 거의 녹초가 된 모습을 보고는 나오미에게 물었다.
“혹시 아시는 여성 마사지사가 있습니까?”
“한 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호텔로 데려올 수 있습니까?”
“확인하겠습니다.”
나오미는 급하게 전화를 걸더니 바로 마사지사가 이곳에 올 수 있는지 확인하고 불러왔다.
마사지사는 이미 누구를 마사지하는지 이야기 들었는지 꽤 침착한 모습으로 민경에게 다가갔다.
“민경아, 난 나가 있을 테니까 마사지 받고 있어.”
“예.”
민경은 거의 초죽음이 돼서 마사지를 받았다. 그녀는 마사지가 다 끝난 뒤에 그대로 잠에 빠져서 깨어나질 못했다.
물론 아침이 되어서 얼굴을 봤을 때는 아주 개운한 모습이었다.
“오늘 스케줄 확실히 할 수 있지?”
“네!”
“가자.”
재석의 지휘 아래 일본 일정은 힘들지만 순탄하게 흘러갔다.
다시 비행기를 탔을 때 재석은 그제야 한시름 놓게 되었다.
“아, 이제 안녕이구나. 또다시 올 수 있을까?”
“일주일 뒤에 일본 에이전트가 일정을 다시 잡아 줄 거야. 한동안 드라마나 영화 관련 일은 어려울 거야. 그래도 올해 넘어가기 전에는 작품 하나 할 거니까 그 전까지는 일본 일정 빡세게 할 거다.”
“비행기를 수도 없이 타겠네요.”
이제 일본에 빨대 꽂기 시작이다. 단물 쪽쪽 빨아서 그걸로 막대한 돈을 굴릴 수 있는 수단을 만들 거다.
한국에 도착한 재석은 봉도준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예,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재석은 봉도준과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저녁에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 그래요?”
(그리고 민경 씨도 같이 데려와. 친분을 돈독히 다져야지.)
“누구에게 자랑하시려고 그럽니까?”
(거 있어. 날 못 믿는 사람이 한 명 있어서 말이야. 맨날 내가 뻥만 치는 줄 알아.)
“푸하하하, 알겠습니다. 오늘 저녁이죠?”
봉도준은 민경을 소개시켜 주는 사람에게 자랑을 할 생각이었나 보다.
“알겠습니다. 오늘 다행히 시간이 비는 날이니 시간 맞춰 가겠습니다.”
재석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누구예요?”
“봉도준 감독. 널 가까운 지인에게 자랑하고 싶은가 봐.”
“감독님 생각보다 허세가 좀 있으시네요.”
“원래 남자들은 다 조금씩 허세가 있지.”
“호호호, 그래서 오늘 저녁에 볼 거예요?”
“한번 보러 가자. 손해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재석은 그렇게 민경과 함께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재석은 봉도준 감독이 누굴 소개시켜 주려 했는지 알게 되었다.
‘장강호!’
봉도준 감독의 ‘괴수’에 출연했고 그 이후에도 ‘변호사’, ‘택시기사’, ‘DMJ’ 등등 이름만 들어도 대한민국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화를 찍은 배우다.
충무로 최고의 티켓파워를 자랑하는 그가 눈앞에 나타난 거다.
“감독님이 소개시켜 주신다는 분이 장강호 씨였습니까. 이런 유명한 분을 소개시켜 주시다니 제가 더 영광입니다.”
“절 아시네요.”
“모를 수가 없죠. 최근 출연작은 살인자의 기억이시죠? 반갑습니다, 전재석입니다.”
“장강호입니다.”
“강호 씨, 봤지. 여기 민경 씨도 있고, 그 소속사 대표가 나랑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어.”
“이야, 감독님. 뻥만 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장강호는 그러면서 민경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하하하, 선배라뇨. 그러기에는 민경 씨가 너무 잘나가시는데요.”
“아, 아니에요. 강호 선배님께서 나오신 영화 다 봤어요. DMJ에서 북한군 연기하셨을 때 진짜 북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하하하, 뭘요.”
재석은 지금 장강호를 만나서 너무 기대가 되었다.
‘데뷔한 년도도 좀 됐고, 슬슬 재계약 들어갈 때 됐어. 슬쩍 찔러 볼 만한 상대인데…….’
타이밍이 아주 적절했다. 봉도준 감독과의 인연은 그의 영화에서 배역을 따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었는데, 이렇게 유명 배우를 소개받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형님, 이렇게 좋은 자리에 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감사해, 내가 감사하지. 이렇게 민경 씨 데려와 준걸로 난 너무 행복해.”
“하하하, 그럼 오늘도 한잔?”
“아, 좋지.”
봉도준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장강호 역시 술이 싫지 않은지 아주 빠르게 반응했다.
“술은 저도 좋습니다.”
“하하하, 그럼 다 같이?”
“하하하, 좋죠!”
재석은 한국에 돌아오기 무섭게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서 기분이 좋았다.
‘장강호, 내 다음 타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