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매니저 69화>
일본에서의 첫 사인회이기 때문에 준비를 많이 한 것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찾아온 팬의 수가 너무 많았다.
“천 명 정도를 생각했었는데, 이건 너무 많은데?”
재석은 자신이 일본의 골수팬들을 너무 얕잡아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대 천 명을 기준으로 하여 기획했는데, 실제로 민경을 보기 위해 사인회를 찾은 팬의 수는 무려 수천에 달했다.
서둘러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
“곤란할 정도군.”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을 서며 기다렸던 팬들은 민경을 보자, 힘들었던 기색 하나 없이 활짝 핀 웃음을 보였다.
반면 재석은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이 너무 많자 긴장을 했다. 이런 인파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면 대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경호원 숫자를 더 늘려야 하나?’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재석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잠시 후, 민경의 일본 첫 사인회가 시작됐다.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 복잡해질 것을 염려했지만, 팬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사인회는 순조롭게 차례차례 진행됐다.
하지만 재석은 잠시도 방심하지 않고 팬들의 모습을 주시했다.
바로 그때, 팬 한 명이 음침하게 웃으며 민경의 앞에 다가섰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고 있었다.
민경이 사인을 해 주고 악수를 하려는 순간, 재석은 그 팬의 손에 뭔가 번들거리며 끈적거리는 액체가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민경아! 잡지 마!”
재석의 외침에 민경이 재빨리 손을 빼자, 경호원들이 달려들어서 팬을 제압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행사장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채워졌다.
재석은 제압당한 팬을 향해 다가가더니 그의 손을 확인했다.
“이 냄새는······.”
그의 손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재석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변태 새끼······! 미치코 상, 당장 경찰에 신고하세요!”
“네?”
통역사 미치코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남성 팬의 손에 묻어 있는 액체를 보고는 상황을 파악했다.
“으으······.”
“세상에 수많은 변태가 있다지만, 이런 변태는 또 처음 보네. 벌레보다 못한 새끼.”
“오빠, 뭐야? 뭔데 그래.”
“오지 마. 나중에 설명해 줄게.”
사인회는 경찰이 올 때까지 한동안 중단되었고, 남자는 현행범으로 연행되었다.
죄목은 간단하다. 성범죄였다.
‘민경의 팬 중에 변태가 있을 줄이야.’
재석은 이 수많은 팬들 사이에 또 어떤 변태가 숨어 있을지는 알 수 없었기에 불안감을 느꼈다.
‘민경이가 너무 충격받지 않아야 할 텐데······.’
사실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기에 상황이 정리된 후 민경에게 이야기를 전달하자, 민경은 잠시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프로답게 금방 정신을 차린 후 사인회를 계속했다. 재석은 그런 그녀를 보며 대견함을 느꼈다.
이후 한동안 문제없이 사인회가 계속됐지만, 결국 또 한 번 사고가 터졌다.
“으헤헤!”
순간 어떤 변태가 바지를 내리려고 하자 재석이 덮쳐 사고를 막았다.
두 번의 사고가 연달아 터지자 결국 사인회는 취소가 결정되었다.
“으으, 끔찍하네요.”
“일본에서 사인회는 더 이상 못하겠다.”
첫 사인회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다음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오빠는 그런 변태 아니죠?”
“하아, 내가 그런 변태로 보이냐?”
“아뇨.”
“다음 일정도 혹시 모르니까 단단히 주의해 달라고 해야겠네.”
사인회 이후에도 여러 스케줄이 진행됐지만 민경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재석도 마찬가지였다.
“큰일이네.”
만약 이번 일을 계기로 민경이 팬들과 직접 대면하게 되는 것을 기피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민경이의 정신적 충격은 물론이고, 소수의 변태들 탓에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선량한 다수의 팬들에게도 소통의 창구가 닫히는 것은 큰 문제였다.
‘사인회 말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는데.’
재석은 여러 방면으로 아이디어를 구상해 봤지만, 당장 떠오르는 괜찮은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일단 이후 출연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성희롱에 해당하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실시해 줘야만 출연하겠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일본의 일부 방송 중 의도적으로 그러한 쪽을 코드로 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민경을 초대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이번 일본 스케줄 일정을 모두 끝낸 후, 온천까지 즐기고 한국에 돌아온 재석은 나오미에게 재미있는 내용의 메일을 전달받았다.
그걸 본 재석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민경이 사인이 10만 엔에 팔려?”
내용인즉슨, 사인회가 도중에 중단된 탓에 사인을 받은 이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민경의 사인에 프리미엄이 붙었다는 것이었다.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인이 인터넷으로 엄청난 고가에 판매되고 있었다.
“이거 엄청난데?”
이러한 사실은 아직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려졌다면 민경의 사인을 가지고 있는 한국 팬들이 일본에 어떻게든 팔아넘겼을 터였다.
“사인 하나에 한화로 100만 원이라니······.”
변태들 탓에 사인회는 엉망이 됐지만, 그것이 엉뚱한 방향으로 호재가 되고 있었다.
재석이 퇴근 후 민경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어머나 세상에. 정말 제 사인을 그렇게 비싸게 사요?”
민경도 자신의 사인이 그렇게 팔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하여간 이해가 안 돼요.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민경은 이해가 안 되기도 하면서도, 자신이 일본에서 그만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게 기분 좋았다.
* * *
권진우 앞으로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다. 바로 드라마였다.
“민철아, 영화 스케줄 상태는 어때?”
“거의 끝나갑니다. 드라마 스케줄을 잡아도 나쁘지 않을 걸로 보입니다.”
권진우 앞으로 날아온 대본은 ‘하늘의 계단’이었다. 권진우가 찍은 드라마 중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했고, 동시에 가장 웃긴 명언을 남긴 드라마이기도 했다.
“민철아, 진우에게 물어봐. 할 생각 있냐고. 혹시 내 의견을 묻는다면 무조건 하라고 해.”
“네, 선배님.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권진우는 이제 사고를 치기 전까지는 큰돈을 벌어다 줄 거대한 복덩이로 변했다.
“민철아, 나 궁금한 게 있다.”
“예, 선배님.”
“권진우의 계약이 끝나면 넌 어떻게 할래?”
“네? 아직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요.”
“너야 직원이지만, 권진우는 계약 기간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 남는다면 문제 될 거 없겠지만, 떠난다고 했을 때 너는 어떻게 할지 싶어서 묻는 거야.”
민철은 그 순간 고민에 빠졌다.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전 여기에 남고 싶습니다. 하지만 진우 형이 함께하자고 하면 많이 흔들릴 것 같습니다.”
“그럴 거야. 그때 가서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존중할게. 하지만 내 옆에 남으면 섭섭지 않게 해 줄게.”
재석은 민철을 정말 중요한 인연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옆에 두고 팀장급까지 키우며 함께하고 싶었다.
“선배님 말씀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래,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재석은 그렇게 민철과의 대화를 끝마쳤고, 이후 권진우에 대해 고민에 잠겼다.
“한 번 가서 사기 좀 올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최근 민경이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너무 바빴던 탓에 그다지 챙기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에 촬영 전에 한번 얼굴을 비춰야 할 듯싶었다.
고민을 끝마친 재석의 생각은 그 뒤에 일로 이어졌다.
“하늘의 계단이 방영을 시작하면 바로 시상식 시즌인가······.”
연말이 되면 찾아오는 시상식 시즌.
시상식은 생방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때에 맞춰 스케줄을 미리 조절해 둘 필요가 있었다.
* * *
재석은 하늘의 계단 첫 촬영이 있는 날, 아직 권진우가 나오진 않았지만 그를 잘 봐주십사 하고 찾아가 인사를 겸해 밥차를 불렀다.
“허허허!”
이 드라마를 연출하는 감독은 재석의 호의에 너무 좋아했다.
“이야······ 배우가 아직 출연도 안 했는데 이렇게까지 해 주시니, 아이고야.”
“하하하, 감독님 뭘 그렇게까지 그러십니까. 드라마 촬영이 잘되어야 저도 감독님도 서로 득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 그 파이팅 넘치자는 의미로 밥차를 준비한 겁니다.”
“아하하하!”
감독은 재석의 태도에 그를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했다.
“오늘 촬영 나온 배우들, 매니저들과 인사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재석은 일하는 스태프, 매니저, 배우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오, 아역 배우구나.”
재석은 인사를 나누던 중 한 배우에게 관심이 갔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 굉장히 예쁜 소녀가 있네.”
재석의 말에 그 소녀는 수줍게 웃었다.
예쁜 여자들은 자신이 예쁜 걸 잘 안다. 그래도 예쁘단 소리에 질려 하지 않았다.
“이름이 뭐니?”
“박신연이요.”
그녀는 미래에 방영되는 드라마 ‘미남이네.’에서 가장 뜨겁게 달아오르는 여배우로 성장한다. 물론 같이 출연했던 남자 배우들도 뜨거운 감자가 되긴 한다.
“예쁜 이름이네.”
“뒤에 분은 매니저이신가 보네요.”
“예.”
박신연의 매니저는 여성 매니저였다. 이 바닥에 여성 매니저는 정말 찾기 힘들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전재석입니다. 이렇게 귀여운 소녀의 매니저로 계시다니 복 받으셨네요.”
“아, 감사합니다.”
재석은 박신연이 살짝 탐이 났지만, 그녀의 뒤에 있는 매니저를 보고 그런 마음을 깔끔히 접었다.
‘매니저가 있으면 계약 기간만 5년 이상이야.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장강호처럼 몇 달 뒤에 계약 끝나는 상황이면 좋겠지만, 이건 그게 아니었다.
‘근데 박신연 소속사가 어디였더라?’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 아무리 오래 지내도 배우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할망정 소속사를 기억하는 건 정말 어렵다.
‘박신연도 의리 하면 빠지는 배우가 아닌데······.’
정말 의리 하면 손에 꼽히는 배우들이 몇 있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중요하게 여기고, 잘 이어 가려는 마음이 고운 이들이다.
‘의리파라······.’
찾다 보면 그런 연예인들 좀 있다. 더러운 짓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닌 이들도 있다. 사람 사는 게 마냥 깨끗한 것도 아니고, 마냥 더러운 것도 아니라는 게 문제다.
‘그런 이들을 다 모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쉽진 않지.’
사람 일이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없다.
‘그래도 만났다는 게 중요하지.’
재석은 거기에 중점을 두고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기회는 다음에도 온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재석이 그렇게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는 한편, 박신연에게는 기억에 뚜렷이 남는 만남이었다. 그가 이미 연예계에 젊고 능력 있는 인물로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박신연은 민경을 비롯해 권진우라는 스타를 키워 낸 재석의 모습을 머릿속에 각인했다.
* * *
“으아! 민경이의 일거리가 없으면 맨날 사무실에 처박히네.”
재석은 민경의 스케줄을 따라다니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사무 업무로 시간을 보냈다.
“민경이는 집에서 안 나오고 뒹굴고 있고.”
정확히는 집에서 모든 걸 다하고 있다. 운동, 연기, 식단 관리. 스케줄이 없을 때는 장을 보러 나가는 것 외에는 거의 대부분 집 안에서 생활했다.
“재석아.”
“뭡니까, 팀장님”
“일본 에이전트한테 날아온 내용인데, 민경이의 사인을 팔 수 없냐고 묻는데? 솔직히 한 장에 10만 엔이면 남는 장사로 보이긴 하는데······.”
“논란이 되지 않을까요?”
“말이 나오지 않게 일시적인 이벤트로 진행해야지. 한번 진행해 봐. 조금만 팔아도 액수가 상당해.”
“물어볼게요.”
재석이 메일로 연락을 취하자 에이전트인 나오미는 아주 적극적으로 답을 보내왔다.
-은밀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에이전트의 일 처리는 만족스러웠다. 정말 일 처리 하나는 너무 깔끔했다.
민경에게 부탁해서 사인 열 장을 보냈는데, 한 장당 10만 엔에 은밀하게 거래가 되었다.
그렇게 100만 엔이라는 돈이 한순간에 들어왔고, 이 수익은 일본에서 사용할 경비로 처리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