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매니저 70화>
재석은 ‘하늘의 계단’의 등장인물이 아역에서 성인역으로 교체되는 회차인 3회차 대본 리딩에서 박신연을 다시 한번 만나게 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이고, 이런 예쁜 소녀를 다시 보게 돼서 기쁘네.”
재석은 순수하게 박신연과 인사를 나눴다.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눴지만, 그녀와의 인사는 표정부터 너무 밝았다.
“선배님, 너무 그렇게 하시면 상대 쪽 매니저가 경계합니다.”
“아, 그냥 귀여워서. 미안합니다.”
재석이 공손히 사과하자 매니저와 박신연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다른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석의 너무 공손한 사과에 둘은 너무 당황하고 말았다.
“괜찮아요. 그러실 거 없어요.”
박신연은 정말 괜찮은지 표정이나 말에 가식 따윈 없었다.
“고마워요.”
재석은 그렇게 말하고 한쪽 자리에 앉았다.
재석이 오늘 ‘하늘의 계단’ 촬영 현장에 다시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감독이 그에게 각색 작업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감독은 몇 차례 성공적인 전례를 가진 재석의 각색에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정작 대본을 본 재석은 간단히 한마디 했다.
“이 대본은 이미 훌륭합니다. 제가 손을 대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남들은 재석이 바빠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 여겼지만, 재석은 거짓 한 점 없는 진심이었다.
그는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게 대본이 아닌, 배우의 연기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본 리딩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딩을 진행되던 그때, 재석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언제 집에 오세요? 외로운 여배우는 매니저를 기다립니다용.
재석은 그 문자를 받고 피식 웃었다. 민경은 요즘 들어 재석에게 이런 문자를 자주 보냈다.
-일 끝나면 퇴근한다. 날도 추워지는데 집에 가만히 있어라.
-날 추워지는데 단풍 구경도 못 갔어요. >.<-나중에 눈 구경이나 가자.
-진짜요?
민경의 목적은 이거다. 어디 나가고 싶은데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다는 것.
-알았다. 시상식 시즌 끝나는 대로 준비할게.
-이번에도 같이 가요!
어차피 민경은 혼자서 죽어도 안 갈 거니 재석이 따라가는 건 확정이다.
이후 대본 리딩이 끝나자 당연하게도 저녁 식사로 이어졌다.
배우들이 그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 감독은 재석을 붙잡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 전 사장님이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전 사장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 주셔서 잘됐다는 드라마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하하하, 물론 그런 일도 있었지만 전부 운입니다.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겠지만,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겸손도 적당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도와주시죠.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대본은 지금 이대로도 완벽합니다. 오히려 손을 대면 망가질 수 있습니다.”
“전 사장님, 다 알고 있습니다. 전부를 걸어라에서도 그러셨죠. 하지만 결국 전 사장님이 직접 제안한 스토리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는 건 이미 소문이 파다합니다.”
소문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는 같았다.
한국 드라마는 제작 과정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때문에 어느 드라마의 제작진이든 이런 부분을 최소화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재석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었다. 뛰어난 각색으로 불안 요소들을 미리 짚어 내 주고, 해결책까지 마련해 주는 최고의 설계자였다.
“분명 하늘의 계단도 후반으로 갈수록 힘들어질 겁니다. 그때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회당 천씩 지급할 의향이 있습니다.”
전부를 걸어라를 할 때보다 가격이 확 뛰었다. 게다가 이번 건 초반에는 정말 손댈 부분이 없었으니 재석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하지만 재석은 결국 거절하기로 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바빠서 무리입니다.”
“회사 일 때문에 그러시죠?”
“회사 일도 있고 여전히 제가 현장 매니저 일도 하고 있는 상태라 어렵습니다.”
“아, 그럼 임민경 씨의 매니저를 아직도 하시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예. 회사를 차리기 전부터 맡았던 배우이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재석은 정중하게 거절하면서도 약간의 여지는 남겼다.
“그래도 정말 급하면 그때 연락 주세요. 그렇다고 막 부르시면 곤란합니다.”
“아이고, 그렇게 말씀만 해 주셔도 감사합니다.”
재석은 그 대화를 끝으로 이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기 무섭게 민경이 재석의 집 문을 두드렸다.
“오빠, 정말 여행 일정 잡는 거예요?”
“그래, 어디 가고 싶냐?”
“오빠가 눈 구경 시켜 준다고 했잖아요.”
“눈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은 많잖아. 어떤 눈 구경이냐지.”
“음, 눈 위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요.”
“북쪽이네.”
물론 밤에 오로라를 보려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 내면서 봐야 한다.
“그럼 준비 좀 제대로 해야겠는데.”
추위에 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로라는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정 면에서도 준비가 필요했다.
재석은 당분간 구체적인 계획을 짜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일본에 새로운 신기록이 달성되었다. 눈꽃연가가 다시 재방영을 결정한 거다.
눈꽃연가는 일본 방송사에 길이 남을 역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외국 드라마였지만, 엄청난 인기 몰이를 하며 시청자들이 다시 한 번 방영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면서 유례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재방영이 결정되자 재석에게 국제 전화로 직접 연락이 왔다.
(사장님, NHK 종합에서 눈꽃연가의 재방영 날짜가 잡혔습니다. 12월에 시작합니다. 결정 소식이 전해지자 저희 쪽으로 일거리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가격보다 절반 올리세요. 더 준다는 쪽이 있으면 그쪽과 약속 잡고 실제 활동 시기는 1월 말로 계획 잡으시고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일본 지사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지사 문제는 나오미 상을 믿죠. 그리고 지사장이 됐을 때 대우도 확실히 해 드리죠. 그만큼 일 처리도 확실히 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나오미는 경험하면 할수록 평범한 여성이 아니다. 젊은 나이에 비해 수완이 좋고 추진력도 좋다.
재석은 전화를 끊고 미소를 지었다. 일본에서의 재방은 정해진 수순이다. 재방도 단순한 재방이 아니라 정규 프로그램 편성 시간에 나가는 재방이다.
일본 방송계에서도 눈꽃연가를 인정한 거다.
‘정규 재방 편성은 총 세 번. 마지막은 자막만 깔린 자막 버전으로 편성되지.’
그만큼 눈꽃연가의 파워는 일본에서 절대적이다.
이 내용을 민경에게 전달하자, 재방영 이후 일본 일정이 전보다 더 많아질 거라는 이야기에도 민경은 오히려 힘을 냈다.
“오빠, 열심히 일할게요.”
두 손 불끈 쥐며 파이팅을 외치는 민경이었다.
* * *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에 민경은 예쁜 드레스를 입으며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벌써 방송사 시상식 시즌이 찾아온 거다. 전년도 시상식 때는 별거 없이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올해 찍은 드라마가 꽤나 잘나갔으니까 상을 기대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그렇겠죠.”
하지만 민경은 기대하지 않았다. 다른 쟁쟁한 드라마들이 있어서 상을 받는 게 쉽진 않을 거라 생각한 거다.
“그럼 가요.”
“그러지.”
재석은 민경과 함께 움직이며 시상식장으로 갔다. 전과 똑같이 사진도 찍었지만, 여유는 한껏 넘쳐났다.
거기에 전부를 걸어라를 촬영했던 배우들이 한자리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 선배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하하하, 나야 잘 지냈지.”
민경은 살갑게 안부를 물으며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 자리에는 민경의 아역을 맡았던 한지영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민경과 지영은 촬영이 겹치지 않은 탓에 마주칠 일이 없어 서로 어색한 듯보였다.
‘하아, 저쪽도 아쉬워.’
재석은 이런 시상식장에 와서 미래의 스타들을 볼 때마다 너무 아쉬웠다. 그들을 다 손에 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말 꿈같은 소리지.’
그래도 매니저로서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 인사라도 할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전 사장님도 오셨어요.”
재석이 잠시 인사를 하려고 움직이자,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준 사람은 이정헌이었다. ‘전부를 걸어라.’ 에서 민경의 상대역이자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정헌 씨, 그간 잘 지내셨죠?”
“뭘요. 한동안 바쁘게 이곳저곳 뛰어다니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지금은 그가 한국에 있지만, 미국에서도 영화를 몇 편 찍으며 할리우드 진출까지 했던 사람이다.
‘미국에서 더 활동할 수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활동하는 걸 선택했지.’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게 더 좋았던 거다.
“그때 연기가 너무 훌륭해서 이번에 큰 상 한번 타시겠어요.”
재석의 말에 이정헌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내심 기대를 하고 있다. 이미 전부를 걸어라는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혔다.
“민경아, 잘하고 있어. 난 저쪽에서 기다릴 테니까.”
“네.”
재석은 그렇게 한쪽으로 물러났고, 민경은 친하게 지냈던 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매니저하고 정말 친한 모양이네.”
“매니저 오빠는 절 여기까지 성공하게 만들어 주신 분이에요. 오빠가 없었으면 정말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예요.”
민경의 목소리에는 많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권진우가 인기상을 수상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재석 또한 그가 수상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뒤이어 최우수 연기상 발표가 이어졌다.
먼저 남자 부문에서 후보들이 거론되었고, 그중에는 이정헌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쉽게도 상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민경도 기대를 접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서로 여자 부문의 발표가 진행됐다.
“2003년 최우수 연기상 여자 부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후보들을 보시겠습니다.”
몇몇 후보들이 거론됐지만 재석의 귀에 들린 건 단 한 사람이었다.
“전부를 걸어라의 임민경!”
최우수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는 말도 민경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저런 큰 상을 탈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표정이었다.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발표자가 봉투를 열고 수상자를 발표했다.
“영애의 수상자는, 전부를 걸어라의 임민경!”
민경은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수상에 멍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가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려는데, 저 멀리 누군가 손을 흔드는 걸 발견했다.
‘오빠.’
바로 전재석이었다. 조명 때문에 객석 쪽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크게 흔드는 손동작에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독님, 스태프분들, 부모님, 그리고 절 지금까지 가장 열심히 도와준 저희 매니저 오빠에게 감사합니다.”
민경은 생각보다 침착하게 수상 소감을 말하고 난 뒤에 자리에 돌아왔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손이 떨려 왔다.
마지막으로 이정헌이 연기대상을 받으면서 수상식은 끝이 났다.
민경은 돌아가려고 차에 올라탔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흑흑.”
“갑자기 왜 울어.”
재석은 민경의 눈물에 능숙하게 화장지를 건네줬다.
“울지 마. 기분 좋은 날 울고 있네.”
“오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네가 잘해서 상 탄 거지, 나 때문은 아니잖아.”
“오빠 아니었으면 저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그럼 뚝 그치고.”
“네.”
눈물을 그치고 집에 도착해서 민경은 재석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재석을 붙잡았다.
“오빠.”
“왜.”
민경은 재석의 볼에 번개처럼 입을 맞췄다.
“음!”
“고마워요. 이건 그 답례. 그리고 쭈욱 같이해요.”
“허허허.”
재석도 이런 답례는 처음인지라 기분이 좋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내일 봐요.”
민경이 바람처럼 집 안으로 사라지고 재석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근두근.
늙어 버린 마음에 새로운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