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매니저 71화>
재석은 신년을 맞이하고 나면서 조금 시간이 생겼다.
“간만에 할 일이 없네.”
소속 배우들의 스케줄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는 터라 며칠간 고요한 시간이 찾아왔다.
재석은 오랜만에 얻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강변으로 향했다.
그는 한강변을 따라 걸으면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과거에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렇게 느긋하게 걷고 또 걸었다. 두 시간 넘게 걸었을 때쯤 재석은 다리가 조금 피곤해지자 그냥 바닥에 앉았다.
“오랜만에 그냥 걸었네.”
정말 오랜만이었다. 항상 뛰고 운전하고 일 구하러 다니고 바빴다.
그래서인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운 재석이었다.
“후우…….”
재석이 그렇게 잠시 앉아서 쉬던 그때,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한 한 사내가 보였다.
“흐음.”
재석은 그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20분쯤 지나서 재석이 다시 돌아왔지만, 그 남자는 여전히 강변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뭘 그렇게 한숨을 쉬십니까?”
재석은 오지랖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말을 건넸다. 남자의 모습이 회귀 전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인 탓이었다.
“답답해서 그럽니다.”
“저도 답답했습니다. 여기에 앉아서 기분 좀 전환하려고 나왔죠. 좀 오지랖 같은데 한잔하실래요?”
재석이 내민 건 소주와 마른 오징어였다.
“부담 가지지 마세요. 홀로 있고 싶었는데 저처럼 홀로 나온 사람이 있어서 뭔가 동질감이 느껴져 그런 겁니다.”
동질감 그 단어가 그 남자의 마음을 살짝 흔들리게 만들었다.
“좋습니다. 한잔하죠.”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잔을 채워 줬다. 그러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하는 일이 잘 안 됩니다. 이래서 먹고사는 게 될까 싶을 정도네요.”
“세상 일이 뜻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어떤 책에서 봤습니다. 이 세상에서 노력해도 결국에는 운에 맡겨야 한다. 참 지랄 같은 말이죠.”
“그 책 제목이 뭔가요?”
그 남자가 묻자 재석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 일기장이요.”
“이, 일기장? 크크크.”
일기장이라는 말에 터진 그 남자는 한껏 웃었다. 그러곤 말했다.
“아버님이 참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뭐, 일기장 몰래 봤다고 나중에 혼나긴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아버지가 한마디 하더군요.”
“뭐라 하시던가요?”
“운이 오는 것도 노력을 했을 때 온다. 다 해 놓고 마지막을 기다려라.”
“멋진 말을 하시네요.”
“근데, 그 운은 아버지에게는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참 힘들게 사셨죠.”
“그래도 살아 계시나요?”
“잘 계세요.”
“다행이네요. 근데 저도 당신 아버지처럼 될 것 같네요. 열심히 살았는데 그 운이라는 게 전혀 오질 않네요.”
그 남자는 다시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멀리 이민을 가시나 보네요.”
“예, 집도 차도 팔고 떠날 겁니다. 거기서 다시 시작하려고요.”
“다시 시작하는 것도 좋죠.”
“정말 그럴 겁니다. 그래도 먹고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만한 삶을 살 겁니다.”
재석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민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인데 걱정이 크겠습니다.”
“뭐, 그렇죠. 버는 족족 쓰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흐음,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는데 혹시 잠시라도 일하실 생각 있으시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이건 순수하게 제가 도와 드리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한 달이 되었든 두 달이 되었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재석이 명함을 건네줬지만, 그 안에는 대표이사 같은 직함은 들어 있지 않았다.
“제이이브? 뭐하는 곳입니까.”
“매니지먼트 회사입니다. 생긴 지 햇수로는 2년이 되어 갑니다. 연락을 주시면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한도 안에선 최대한 돕겠습니다. 제가 나이는 젊지만, 권한은 좀 있거든요.”
“하아, 그런가요.”
그는 명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애증이 가득한 눈으로 말이다.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이제 집에 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술 잘 마셨습니다.”
“그리고 명함 드린 건 부담 갖지 마세요.”
그 남자는 손을 흔들며 걱정 말라는 표현을 해 줬다.
“여기서 만나다니…….”
재석은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자리에서 명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될 그와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그가 가장 힘들어하는 시기에 말이다.
“이것도 인연인가.”
그에게 명함을 건네주긴 했지만, 연락이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었으나, 그에게 어떠한 사연이 있는지 깊이 알지 못하는 이상 함부로 관여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에휴, 어쩔 수 없구만.”
결국 그렇게 홀로 집에 돌아온 재석이 저녁을 먹기 위해 준비를 하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같이 밥 먹자고?”
“어, 차려 놨으니까 빨리 와.”
민경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 재석을 불렀다.
하지만 재석은 민경의 얼굴을 볼 때 그때의 볼뽀뽀가 생각이 났다.
“크흠.”
살짝 얼굴이 붉어졌고 알게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 *
재석과 민경은 저녁쯤에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 확실히 북극과 가까운 동네라서 그런지 춥기도 추웠다.
“오후 4시인데, 여긴 왜…….”
“어둡지? 흑야라서 그래.”
“흑야?”
“해가 지지 않는 시기는 백야, 그 반대는 흑야. 지금은 그 흑야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거고.”
“오빠는 아는 것도 많네요.”
민경은 재석을 늙은이라고 놀리지만, 그만큼 아는 것도 많았다.
“아니야, 그냥 주워들은 게 많을 뿐이지.”
재석은 진실을 이야기했지만, 민경의 귀에는 그렇게 안 들렸다. 겸손한 척한다고 생각됐다.
그렇게 밤이 되어 버린 아이슬란드에서 숙소를 찾아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예약해 놓은 숙소로 향했다.
사방이 어두웠지만 실제로는 한창인 시간인 탓에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전 국민이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민경에게는 신기한 경험이고, 그건 재석도 다르지 않았다.
숙소는 방 2개에, 거실과 부엌이 딸려 있는 곳이었다.
“여기야?”
“어, 여기야.”
“좋네.”
민경은 숙소가 넓지는 않지만, 뭔가 아늑한 게 느껴졌다.
그녀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기 시작했다. 재석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첫날은 짐을 푼 뒤 간단히 저녁을 먹고 그대로 편히 쉬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분명 아침 8시인데 아직 해가 안 떠서 어두컴컴했다.
“이거 해가 뜬 거야, 만 거야?”
해는 안 보이고 어두운 밤만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도 재석이 눈을 떠서 몸을 일으키자 민경은 이미 일어나서 부엌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음? 일찍 일어났네.”
“빨리 앉아. 내가 바깥에 나가서 뭐 좀 사 왔어.”
“응? 영어 잘 못하잖아.”
“여기 온다고 해서 물건 사는 것 정도는 공부했어.”
정말 최소한의 것을 배우긴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요리 재료를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안 피곤해?”
“응, 아주 잘 잤어.”
확실히 화장도 안 한 얼굴인데 피곤함을 찾아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근데 이제 뭐 할 거야?”
“차부터 찾으러 가야지.”
재석이 민경을 데리고 찾아간 곳은 렌터카를 빌릴 수 있는 곳이었다.
민경은 그가 차에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숙소에서 안 자고 캠핑할 거야?”
“만일을 위한 거야. 여기는 눈보라가 몰아치면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니까.”
안전을 무엇보다도 중시한 재석은 만일의 사태에 노숙을 하더라도 괜찮을 만큼 철저히 준비를 마쳤다.
“여행하는 내내 캠핑해도 될 수준이네.”
엄청난 양의 짐을 실어야 하는 터라 차량의 크기 또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가자.”
첫날 여행은 간헐천을 보러 갔다. 민경은 간헐천을 보고 예쁘다 했지만, 재석이 그걸 보고 내뱉은 말은 심각했다.
“저 뜨거운 물에 계란 삶으면 맛있겠지?”
분위기를 확 깨는 말에 민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삶은 달걀 타령을 할 줄이야.”
상상 이상이라 할 말이 없었다.
푸아아악!
거대한 물줄기의 분출은 정말 멋진 장관이었다.
“사진이나 찍어요. 삶은 계란 찾지 말고.”
민경은 주변에 있는 이에게 손짓으로 사진 한 번만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영어를 못해도 행동으로 다 말하네.’
민경의 자신감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오빠, 뭐해요. 이리 와요.”
둘은 그렇게 같이 사진을 찍었고, 찍힌 사진을 본 민경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간헐천을 둘러보고 민경이 물었다.
“오늘은 이걸로 끝?”
“아니, 다른 곳도 가야지.”
재석과 민경은 차를 끌고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겨울이라 눈 덮인 곳이 많지만, 자연 풍경은 아주 볼거리가 많았다.
아쉬운 게 있다면 해가 짧아서 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거다.
“아, 벌써 해가 진다.”
해가 지기 무섭게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면서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북극의 한파가 몰아치는 거였다.
“어서 돌아가자.”
하지만 무섭게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차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안 되겠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아무것도 안 보여.”
갑자기 몰아친 탓에 꼼짝없이 그 위에 갇히게 되었다.
민경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약간 불안해했지만, 재석은 바로 준비한 물건들 중 몇 가지를 꺼냈다.
“자, 이거 붙여.”
재석이 건네준 건 핫팩이었다. 그것도 장시간 가는 핫팩 말이다.
“이건 또 언제 가져왔어요?”
“유사시를 대비해서 챙겼지.”
재석이 겨울을 대비하는 준비는 아주 철저하다 못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다. 덕분에 눈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체온이 떨어지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자, 이것도 먹어.”
허기가 질 수 있으니 먹을 것도 준비한 거다. 거기에 이 차량은 안에서 잠도 잘 수 있게 준비가 아주 철저했다.
“침낭 있으니까 안에 들어가서 한숨 자도 돼.”
“오빠는?”
“걱정 마. 내 침낭도 있어. 나도 핫팩 붙이고 있을 거야.”
누가 보면 해외에 나와서 캠핑하러 온 인간으로 비춰질 듯했다.
‘좀 허술해야 추운 날 서로 몸도 비비고 그러는데, 이 영감님은 틈을 안 줘.’
민경은 재석의 준비성에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재석은 준비한 침낭 안에 발 있는 부분에 핫팩을 놓았다. 발이 시릴까 겁나서 준비한 거였다.
‘아우, 내 다음에 겨울 여행을 하나 봐라.’
민경에겐 다신 추운 시기에 유럽은 절대 안 밟으리라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자.”
재석은 알람을 맞춰 놓고 바로 눈을 감자 잠들었고, 민경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하루가 끝나는 거야?’
살짝 아쉬웠다. 그렇다고 침낭 안에 들어간 재석을 깨워서 뭔가 할 수도 없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민경의 최대 고민은 재석을 어떻게 해서든 유혹해서 점점 다가오게 하는 거다.
그렇게 고민에 잠겼던 그녀는 따뜻한 침낭 안에서 점점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벽 2시가 되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