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매니저 72화>
새벽 2시, 문득 눈을 뜬 재석이 민경을 흔들어 깨웠다.
“민경아, 일어나. 눈보라 멈췄다.”
“하암, 그래요?”
민경은 하품하며 일어나자, 재석은 밖에서 눈을 치웠다. 차가 눈에 반쯤 묻혀 있었다.
민경도 밖으로 나와 재석을 도와 눈을 치우던 그때, 어두운 하늘 저쪽에서 빛이 내려왔다.
“오, 오빠, 저거 뭐예요?”
“어, 오로라다.”
빛의 커튼이 출렁이며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첫 시작은 녹광의 커튼이 흔들리며 다가왔고, 그 빛이 점점 거세지더니 하얗고 분홍빛이 섞이기 시작했다.
오로라의 색은 오색찬란하게 바뀌기 시작했고, 깊고 깊은 어두운 밤임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빛을 뿌려 댔다.
두 사람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쏟아지던 눈보라가 사라지고 한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오로라의 광경이 펼쳐졌다.
재석과 민경은 저들도 모르는 사이에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있었다. 추운 날 손을 꼭 잡으니 서로의 온기가 전해졌다.
그러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둘 다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으며 행복함이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재석은 민경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빠.”
민경이 바라보는 눈빛은 그야말로 사랑스러웠고 순수했다.
“…….”
바로 그때, 민경이 재석의 품에 꼭 안겼다. 방한복을 입고 있어서 특별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게 아쉬웠다.
“고마워요.”
“아니야.”
재석은 지금 이 순간 민경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후우…….”
재석의 깊은 한숨이 느껴지자 민경은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분위기 깨지 마요.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담당 배우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
민경의 말에 재석은 몸이 짧게 떨었다.
“딱 걸렸어.”
민경은 재석의 반응에 확신을 했다.
“오빠, 조급해하지 마요. 계약 기간 많이 남았고, 대답은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그게 어떤 대답이든 오빠의 결정을 받아들일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재석은 그녀의 마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걸 알았다.
“너에게 별로 안 좋은 결정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런 말을 해?”
“오빠를 믿으니까요. 그런 결정을 하는 것도 다 절 위해서겠죠.”
누군가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건 좋지만, 동시에 그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오빠, 한 번은 제가 연예인이 아니라 그냥 한 여자로 생각하고 답을 해 주세요. 그래야 전 인정할 수 있어요. 매니저고 연예인이고 이딴 소리 하면 인정 안 해요.”
“알았다.”
둘은 그렇게 떨어졌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확실하게 달라져 있었다.
***
재석과 민경의 얼굴은 많이 피곤해 보였지만, 동시에 밝았다.
민경은 공항을 빠져나오며 재석에게 말했다.
“오빠, 오늘 일 있어요?”
“아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이야.”
“일본 일정은 정말 끝이 없네요.”
“일본이 아니고 국내 일정이야. 최근 계속 일본에서 활동하니까 그렇게 생각했구나.”
재석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메일로 휴가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의 보고를 확인했다.
“국내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었고, 일본에는 있었네.”
메일에는 민경의 몸값이 두 배로 상승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연예인이 된 거다.
“회사에 들어오는 수익도 두 배 가까이 늘겠네.”
소속 연예인들이 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회사의 수익에 민경의 비중이 굉장히 높았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수익 때문이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기 무섭게 아침부터 재석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전재석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다이더스에서 일하고 있는 박장목이라고 합니다.”
“예, 그런데 절 만나고자 하신 이유가 궁금하네요.”
“다름이 아니라 이것 때문입니다.”
그가 내민 건 영화 시나리오였다. 그걸 펼쳐 든 재석은 재미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임민경을 이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으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와 더불어 영화에 투자를 해 주실 의향이 있으신지도 여쭙고 싶습니다.”
“투자라…….”
투자 이야기가 나오자 재석은 피식 웃었다. 아마 그가 태극기 펄럭이며에 30억을 투자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일단 투자 계획서부터 보여 주시죠. 내용이 괜찮다면 30억이든, 50억이든 투자할 의향은 있습니다.”
“정말이십니까?”
“제가 바쁜 사람 붙잡고 농담이나 늘어놓을 사람으로 보입니까?”
재석이 태극기 펄럭이며에 30억을 투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박장목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3일 뒤에…….”
“그때는 제가 일본 일정이 있습니다. 그 뒤나 바로 내일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재석의 말에 그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잠시 전화를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그는 자리를 비우더니 10분 뒤에 다시 돌아왔다.
“내일 아침에 가지고 오겠습니다.”
“기대하죠.”
재석은 그 사람이 자리를 떠나자 피식 웃었다.
‘내 기억의 지우개.’
재석은 이 영화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영화가 일본에 건너가 대박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매출액만 무려 약 35억 엔. 당시에 일본 배급사가 거래했던 금액이 한화로 31억 원이었다.
일본에서는 3억 엔을 넣고 35억 엔을 벌었다. 10배의 이윤을 남기는 장사를 한 거다.
재석이 기억하기로 이 영화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큰 이익을 거두었다.
‘어차피 돈 넣고 돈 먹기 게임.’
재석은 큰 그림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 태극기 펄럭이며 개봉 일정이 어떻게 되죠?”
“아, 다음 달 초에 할 거야.”
“기대되네요.”
재석은 이때 넣은 돈 30억이 큰돈으로 돌아오길 기대했다.
“뭐, 본전은 확실히 치는 영화로 보이긴 했지.”
주명진은 여전히 그때 한 투자에 별 기대를 갖지 않고 있었다.
“아이고, 전 본전치기 장사나 하려고 투자한 거 아닙니다. 벌 거면 제대로 벌어야죠.”
“큰돈 벌면 월급은 올려 주냐?”
“올해 연봉 협상은 끝났습니다.”
재석은 협상은 끝났다고 못을 박았다.
“끄응.”
“걱정 마세요. 돈 많이 벌면 선물은 할 겁니다.”
재석은 반드시 선물을 할 생각이었다. 이만큼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줬던 이들에게 후하게 대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그렇게 할 건가.
다음날 아침 다이더스에서 두툼한 자료를 들고 와서 투자 설명을 시작했다.
그 설명을 다 듣고 재석이 물었다.
“그러니까 총 비용이 40억 정도 들어간다는 거네요.”
“예, 그렇습니다.”
“투자하죠. 그 액수 전부 제가 투자하겠습니다. 다만 조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해외 판권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 영화가 국내보다 해외에서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재석은 그에게 해외 판권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앞으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흘러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 씨알도 안 먹힐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눈꽃연가라는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해외 판권으로 큰 수익을 벌어들인 콘텐츠가 몇 존재하지 않았다.
“으음…… 그것을 결정할 권한은 저에게 없습니다.”
“그게 어렵다면 투자 쪽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재석은 미련이 없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아니었다.
‘걸려라. 걸려라…….’
“그 결정은 아무래도 사장님이 일본에 다녀오신 뒤에 들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러죠. 일본에 다녀온 뒤에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합시다.”
어차피 큰돈이 움직이는 일이라 저쪽에서도 회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다음날, 일본으로 떠난 재석은 비행기 안에서 민경에게 영화 출연 제의가 왔음을 알렸다.
“이게 그 시나리오에요?”
“응.”
민경은 시나리오를 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슬프네요.”
“괜찮을 거 같아?”
“할 수 있어요. 근데 오빠는 제가 오빠를 잃어버린다면 어떨 것 같아요?”
은근히 물어오는 질문의 속뜻이 있어 보였다.
“절대로 있어선 안 돼.”
“아니, 어떨 것 같냐니까 절대 안 된다뇨.”
“안 된다면 안 돼. 병이든 뭐든 안 돼.”
“어우, 영감님 고집은 고래힘줄이야. 이쁘게 좀 말해 주면 안 돼요?”
민경은 투덜거리며 듣고 싶은 말을 못 들어서 짜증이 났다.
“내가 관리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병도 용서가 안 돼. 그건 나의 실수니까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야.”
재석의 말에 민경은 또 금세 화가 풀렸다.
“치, 나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거예요?”
“당연한 거 묻지 마라.”
재석은 그 말을 하고 비행기 안에서 스케줄 내용을 확인했다.
“어디 불편한 거 없으십니까?”
한 승무원이 다가와 말을 걸자 재석이 한마디 했다.
“민경이 사인 필요하세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그 승무원은 뜨끔했다. 실제로 슬쩍 사인을 받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 그러면 좋긴 하지만…….”
“해 드릴게요.”
민경이 웃으며 말했고, 그 승무원은 여러 장의 종이를 가져왔다.
“저기, 사인을 받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더 계셔서…….”
“예, 해 드릴게요.”
민경은 여러 장의 사인을 해 주고 승무원들의 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일본에 도착하기 무섭게 수많은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이제는 공항에서부터 대기하는 기자들이 생긴 거다.
갑작스러운 혼란에 공항에 있던 보안 요원들이 달려와서 그들을 저지했다.
마찬가지로 공항 관계자들도 다급하게 움직였고, 재석은 민경을 재빨리 공항 밖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민경아, 손 들어. 팬들에게 인사해.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둘러 가지만, 팬들을 위한다는 것처럼.”
재석의 말에 민경은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면서도 손을 흔들며 미소를 남겼다.
기자들은 그걸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어 댔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파가 엄청나네요.”
“민경 상은 일본에서도 유명한 스타가 됐습니다. 일본의 전 국민이 아는 스타가 말이죠.”
눈꽃연가의 재방영은 시작부터 시청률이 20%를 넘어섰고, 드라마의 인기가 민경의 인기로 이어진 것이다.
“이동하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나오미는 이번 일본 스케줄 이외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눈꽃연가의 열풍이 대단합니다. 저번 사인회 사건 이후로 뭔가 좋은 이벤트가 없을까 고민했는데, 임민경씨 피규어를 한번 만들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에서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굿즈가 팬덤에서 인기를 끄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피규어는 상당히 괜찮은 호응을 이끌어 내는 상품이었다.
“일본의 팬덤을 이용하자는 겁니까?”
“예, 일반인들도 소장할 만한 것들을 준비해서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상 판매 수요는 얼마나 되죠?”
“12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만 명 정도가 구매 의사를 보였습니다. 허수가 있다 하더라도 적지 않은 수가 반응을 보일 것이라 판단됩니다.”
“가격은요?”
“5천 엔 정도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비싸다고 할 수 있는 가격은 아니지만, 절대 싸다고도 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좋습니다. 한번 계획해 보세요. 이익이 난다면 못 할 것도 없죠.”
재석은 피규어 계획을 추진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단가가 맞아야겠지만 말이다.
‘역시 일본에 꽂은 빨대는 맛있어.’
재석은 뭘 먹지도 않았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입을 쩝쩝거렸다.
“오빠, 사탕 먹어요?”
“아니.”
“꼭 사탕 먹는 것 같아서요.”
“나에게는 지금 공기조차 달달하게 느껴진다.”
“뭔 말을 하는 건지.”
민경은 재석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표정이 너무 밝아서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