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매니저 73화>
일본 일정을 끝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 내 기억 속 지우개의 투자 계획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해외 판권을 전부 넘겨 드리긴 어렵습니다.”
“제작비를 전부 투자해도 말입니까?”
“그에 대해서 투자금을 하향 조정하는 형태로 진행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임민경 씨가 일본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끌고 있기에 해외 판권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는 의견입니다.”
거기까지 들은 재석은 제작사가 애당초 이것을 노리고 민경을 캐스팅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긴 하지.’
이유야 어찌 됐든 제작사가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해외 판권을 고스란히 가져오는 건 어려워 보였다.
“완전히, 라는 건 투자금을 조정하여 지분을 나누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투자금을 얼마나 줄이면 되겠습니까?”
“10억을 줄여 주시면 됩니다.”
“그럽시다. 어렵지 않죠.”
재석은 이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80퍼센트에 달하는 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니, 이 정도면 충분한 이익을 가져올 수 있기에 그 정도는 양보하기로 했다.
“그럼 계약서 내용에 더 이상 수정 사항은 없는 건가요?”
“예.”
“좋습니다. 그럼 하죠.”
그렇게 투자 계약서와 민경의 영화 출연 계약서까지 그 자리에서 작성했다.
“그럼 촬영 일자가 잡히면 이야기합시다.”
“예.”
다이더스의 박장목이 돌아간 직후, 주명진이 불안한 듯한 모습으로 재석에게 말했다.
“괜찮겠어?”
“이번 영화는 손해는 안 날 것 같아서 계약한 겁니다.”
“그럼 안전빵?”
“예, 해외 판권은 민경이 일본에서 인기가 있으니 추가 이익을 노려본 거고요.”
“딱 그 정도라면 적당하겠지만…….”
“시나리오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충분히 성공할 만한 작품입니다.”
재석이 영화 시나리오를 건네자 그걸 읽은 주명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
“이제 민경이 일정을 좀 빡빡하게 짜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 출연과 일본 활동을 동시에 이어 가야 하니까요.”
“아, 민경 씨 힘들겠는데.”
바쁘긴 할 거다. 일본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생각하면 일본 일정은 줄이기 어렵다.
“빡빡해도 해야 할 일이죠.”
그리고 며칠 뒤, 태극기 펄럭이며가 개봉했다.
개봉 며칠 만에 무섭게 입소문을 타면서 빠르게 소문이 퍼져 나갔다.
관객들이 무서운 속도로 몰려들어 영화관은 연일 매진 행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 기세 속에 재석은 민경과 함께 몰래 영화를 보기 위해 왔다.
“오빠, 이렇게 와도 돼요?”
“괜찮아. 불 꺼진 상태에서 입장했으니까.”
“나갈 때는요?”
“가장 늦게 나가면 돼.”
그렇게 두 사람은 조용히 영화를 보다가 금방 빠져들었다.
재석과 민경은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정말 소리 없이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무슨 스파이 영화 찍는 거 같아요.”
“스릴 넘치지 않냐?”
“에휴, 그냥 다음에는 집에서 볼래요.”
민경은 심장 떨리는 기분으로 영화를 봐서 그런지 이 상황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금 봤던 영화가 회사에서 투자한 30억짜리 영화야.”
“으아…….”
민경은 자신이 본 영화가 30억을 투자한 영화라는 사실을 되새기자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이 영화 지금 손익분기점 넘었어요?”
“며칠 안 되어서 손익 분기점은 안 넘었어. 그런데 곧 넘을 거야.”
재석은 이 영화가 정말 가파른 속도로 손익 분기점을 넘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럼 오빠는 이 영화 수익을 얼마로 보고 있어요?”
“투자한 돈의 두 배.”
“겨우 그거밖에 안 돼요?”
“네가 투자하고 본전만 쳐도 다행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대단한 액수라는 걸 실감할 거다.”
“설마…….”
민경은 투자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쪽으로는 전혀 감각이 없었다.
“투자사의 수익률은 평균이 20퍼센트야. 게다가 이마저도 극과 극을 이루는 수익률의 평균이야.”
“극과 극?”
“어떤 건 80퍼센트에 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손익 분기점만 간신히 넘기도 망하는 경우가 많아.”
“그 정도예요?”
“심각하지. 그러니까 확신 없이 쉽게 투자했다가는 쫄딱 망하지.”
상당히 무서운 말이지만, 그게 사실이다.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한 설명회가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윽고 집에 도착한 민경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재석은 들어가지 않고 민경을 바라보았다.
“왜요?”
“딱 한 번만 안아 줄래?”
민경은 스스럼없이 재석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다음에는 답을 내놓으세요.”
재석은 그 말이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더 떨어지기 싫다.”
“안 돼요.”
민경이 재석의 품에서 멀어졌다.
“꼭 답을 내놓으세요. 제가 듣고 싶은 대답은 하나지만, 아니더라도 원망 안 해요. 불이익 따윈 없어요.”
민경은 재석을 위해 최대한 배려한 거다. 그만큼 그녀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민경이 먼저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이상은 나도 안 되겠어.”
민경을 보고 있으니 더 이상 참을 길이 없었다. 재석은 바로 민경의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왜요?”
문이 열리자 재석이 한마디를 했다.
“네가 그 말을 한 뒤로 내 마음은 하루로 멈추지 않고 너한테 가고 있어. 이대로 가면 오늘이 아니더라도 너에게 고백을 하고 말 거야.”
“진짜요?”
민경은 살짝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진심을 알아주겠니?”
“문 닫고 들어와요.”
재석이 문을 닫자 민경이 다시 덥석 안겼다.
“오빠를 몇 년간 봤는데 오빠가 하는 거짓말을 모를까 봐요. 다 알아요.”
“고맙다.”
“괜찮아요.”
“그럼 이제부터 우리 사귀는 거다.”
둘은 꼭 끌어안으면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다.
“오빠.”
“왜?”
“이제 배고파요.”
“아…….”
그 말에 재석은 바로 떨어졌다. 하지만 둘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재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네.”
(전재석 씨 맞으시죠?)
재석은 상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구인지 바로 떠올렸다.
“아, 한강변에서 만나신 분.”
(목소리를 기억하시네요.)
“물론입니다. 그렇게 같이 술을 함께 마신 사이인데 왜 모르겠습니까.”
“오빠, 누구야?”
민경의 물음에 재석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기자.”
민경은 그 말에 새로운 배우 영입을 위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다름이 아니라,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요.)
“예, 뭘 도와 드리면 될까요?”
(제가 그때 직업을 이야기 안 했는데, 사실 무명 배우입니다. 근데 매니저가 없어서요.)
“회사로 바로 오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내일 말입니까?)
“네. 내일 바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재석이 그렇게 전화를 끊자, 민경은 그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누군데 그렇게 내일 보자고 한 거야? 나보다 더 중요해?”
민경은 살짝 질투가 났는지 재석에게 투덜거렸다.
“일단 남자 배우고, 나이 든 사람이지. 유명하진 않아. 하지만 널 처음 봤을 때처럼 꼭 잡아야겠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래도 너만큼 중요하진 않아.”
“흥.”
민경은 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행동은 재석의 품에 안겨 떨어지기 싫어했다.
“이렇게 붙어 있다가 나 못 참을 거 같아.”
“그건 안 돼요. 순서대로 해야죠.”
민경은 순서대로 하자 했지만, 재석은 그 순서를 지키고 싶지 않았다.
“싫은데.”
“영감님이 엉큼하기는.”
민경은 그러면서 재석에게 최대한 밀착했다.
“그렇게 말해도 안 돼요.”
결국 재석은 민경에게 등 떠밀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른 아침, 재석은 회사에 출근하자 곧바로 주명진을 찾았다.
“팀장님, 오늘 매니저들 중 업무 비는 사람 있나요?”
“비는 사람? 사장 한 사람밖에 없어.”
“전 오늘 회사 업무 때문에 바빠요.”
“그럼 없어. 몇 시간 단위로 비는 사람은 있지만, 하루 종일은 재석이 너 한 명뿐이야. 그것도 오늘뿐이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너 한 명이야. 여차하면 내가 사무실 일을 대신해 줄 수는 있어. 뭐 전부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나.”
“혹시 배우 데려왔어?”
“뭐, 반쯤은.”
“뭐냐, 그 애매모호한 대답은.”
“사정이 그렇게 됐어요.”
“이유가 있는 모양이네. 알았어. 최대한 빨리 사람 구해 볼게. 매니저 일정도 조정해야겠네.”
주명진은 재석이 벌인 일에 대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역시 팀장님밖에 없습니다.”
“그럼 직원 좀 채용해. 회사가 커지면서 더 영입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뭐, 돈 생겼으니 차분히 고용하죠. 하나씩 하나씩.”
“넌 사람 고용하는 데 참 거부감 많아.”
“갑자기 늘리면 좋지 않거든요. 딱 필요한 만큼만.”
“하여튼 깐깐해요.”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재석과 한강변에 마주쳤던 남자가 찾아왔다.
“여기가 제이이브 맞습니까?”
“아, 잘 찾아오셨습니다.”
재석은 그를 보고 웃었다.
‘드디어 왔구나. 명본좌. 그리고 이순신.’
올해 여름부터 시작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역대 기록을 남긴 전무후무한 배우 김명진이다.
“아, 전재석 씨.”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김명진은 재석이 안내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단기지만, 이곳에 잠시 소속되게 해 주십시오. 벌어들인 수익 분배는 하겠습니다.”
“현재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나면 떠날 생각입니다.”
“이민이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단기 계약서를 쓰도록 하죠.”
재석은 바로 김명진과 계약서를 썼다. 하지만 재석은 계약서에 수익 배분을 10:0이라고 적었다.
“아니, 이건…….”
“전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도와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와 드리는 겁니다.”
“네? 하지만 대표의 재가도 없이 어떻게 이런 계약이 되겠습니까.”
“사장은 접니다.”
재석이 사장이라는 말에 김명진은 순간 멍해졌다.
“이런, 제대로 된 소개를 안 드렸네요. 제이이브의 대표이사 전재석입니다. 그리고 임민경 씨 아시죠? 그녀는 이 회사에 소속된 배우입니다.”
재석의 말에 김명진은 굉장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아직 젊은 재석이 회사의 사장일 거라고는 전혀 예측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계약은 지금 하고 있는 계약에만 해당됩니다. 아시죠?”
“무, 물론이죠.”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민을 포기하시면 저희 회사와 계약해 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스타로 만들어 드리죠.”
재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김명진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럼 자세한 일정부터 듣고 싶네요. 지금까지 직접 관리하셨으면 스케줄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드라마 촬영 일정을 알아야 도울 수 있으니까요.”
“아, 예…….”
김명진은 드라마 촬영 일정이 적힌 수첩을 내밀었다.
재석은 그 수첩을 보고 따로 받아 적고는 수첩을 돌려줬다.
“정말 드라마 일정 말고는 없네요.”
“예, 따로 일을 하는 게 아니라서…….”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시죠. 곧바로 오늘 오후 드라마 스케줄을 처리해야죠.”
“아, 예…….”
김명진은 지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 재석을 따라 나갔다.
“혜정 씨, 오늘 급하게 옷을 협찬받으려고 하는데 될까요?”
“네, 가능합니다. 근데 누가 입을 건가요?”
“여기 오늘 새로 계약하신 김명진 씨죠.”
이혜정은 바로 달려와 김명진의 신체 사이즈를 측정했다.
“한 시간만 주세요. 옷 바로 구해서 올게요.”
혜정은 정말 눈부신 속도로 회사를 나가더니 점심 먹기 전에 10벌의 옷을 협찬받아 왔다. 물론 신발도 협찬받아 왔다.
“명진 씨, 그럼 옷을 입죠. 솔직히 지금 입은 옷은 좀 후줄근하네요.”
계약하기 무섭게 재석이 직접 움직이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김명진은 조금 얼떨떨했지만, 소속사 사장이 직접 관리해 준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신발까지 갈아 신었다.
“괜찮네요. 촬영이 오후니까 지금 슬슬 나가죠.”
“예.”
촬영장에 도착해서는 촬영 스태프들이 김명진의 등장에 조금 놀랐다.
“아, 저거 김명진 씨 아냐?”
“맞네요. 옷도 차도 매니저도 있어요.”
지금까지 홀로 다녔던 사람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바뀌면서 나타나자 놀란 거다.
재석은 내리기 무섭게 촬영장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음료를 돌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근데 누구시죠?”
“이런 사람입니다.”
재석은 명함을 건네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렸고, 그걸 받은 사람 중 일부는 재석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아, 제이이브! 임민경이 소속되어 있는 회사 아닌가요?”
“맞습니다.”
“아, 그런 회사와 김명진 씨가 계약을 맺었군요.”
“그렇습니다.”
재석이 김명진에게 지금 어떤 사람과 인연을 맺었는지 확실히 어필을 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