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82화 (82/152)

<당신의 매니저 83화>

결국 내 기억 속의 지우개 판권 문제는 그날 바로 해결되지 않았다.

제작자사와 일본 바이어 측 모두 돌아가서 제각기 재석의 제안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기로 한 것이다.

“오빠, 그런 제안을 해도 되는 거야?”

민경은 제작사와 비슷한 걱정을 하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 나는 내가 제시한 방향이 더 큰 이득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일본 바이어 쪽에게도 리스크 없이 안전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되는 거니 나쁘지 않게 받아들일 거야. 문제는 제작사지.”

“왜?”

“그냥 내가 주는 돈을 받고 떨어질지, 아니면 내 제안대로 따라올지 계산하기 쉽지 않을 테니까.”

재석은 차라리 제작사가 돈을 받고 떨어져 나가길 원했다. 그래야 자신에게 돌아오는 수익률이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빨리 결정해야 될 거야. 일본 바이어가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으니.”

시간이 지나 다른 영화들이 속속 개봉하기 시작하면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려질 수도 있었다.

다음 날, 일본 바이어를 만나기 전에 재석은 제작사 사장과 면담을 했다.

“회의를 거친 결과, 결론은 하나입니다. 일본 판권을 재석 씨에게 넘기죠. 단, 저희에게 그만한 가치의 돈을 주셔야겠습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깔끔하게 10억입니다.”

“드리죠.”

재석은 두말하지 않고 바로 준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 판권에 한해 재석이 모든 권한을 갖는다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서를 작성하기 무섭게 이날 저녁 재석은 일본 바이어와 만남을 가졌다.

“저희는 재석 씨가 제안하신 내용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일본 바이어 측은 리스크를 안고 과감하게 투자를 하기보다는 안전하게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기로 한 듯했다.

그렇게 작성한 계약서의 수익 배분은 8 대 2였다. 재석이 8을 먹는 거고, 2를 지급하는 대신 상영관 확보를 비롯한 배급 문제를 일본 바이어 측에서 맡는 형태였다.

‘됐다.’

재석은 혼자 속으로 좋아했다. 이걸로 일본에 새로운 빨대를 꽂아서 돈을 빨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서 얻는 추정 수익이 대략 100억 이상인가?’

내 기억 속의 지우개는 한국과 일본이 엇비슷한 시기에 개봉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성공이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만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일본에서 벌어들인 수익에는 한참 못 미쳤다.

재석은 무사히 계약이 끝나자 편안한 마음으로 남은 영화제를 즐겼다.

그러다가 봉도준 감독을 만났다.

“동생!”

“아, 형님!”

영화제에 빠질 수 없는 감독인 봉도준 감독과 만나게 되었다.

“형님, 여기서 혼자 뭐하십니까.”

“그러는 동생은 혼자 뭐해.”

“구경하러 왔습니다.”

“서울에서 멀리도 왔네. 항상 끼고 다니는 배우는 어디다 던져 놓고 왔어?”

“저기요.”

재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서 민경이 혼자 뭔가를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드레스 차림이 아닌 모자를 쓴 채 평상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혼자 저렇게 있으면 안 위험해?”

“한 시간째 잘 버티네요. 그리고 연예인은 여기저기 많잖아요. 저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영화제는 수많은 연예들이 모여드는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예인들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제는 구경할 거리가 너무 많았기에 다른 곳에 시선을 둘 틈이 없었다.

“아 참, 이번 기회에 소개 좀 시켜 줘야겠네. 따라와 봐.”

“형님이 소개해 주시겠다는 분이면…… 감독님들?”

“맞아.”

감독들이란 말에 재석은 저쪽에서 혼자 구경하고 있는 민경을 데리고 봉도준 감독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감독들이 있는 자리에 가자 7명 정도의 감독이 있었고, 그중 두 명이 재석의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저 둘은!’

내년에 개봉할 영화인 광대, 웰컴 투 여랑골 작품의 감독이었다.

‘이야, 여기가 나의 영업장이 되겠구나.’

재석은 감독들을 만나고 한번 제대로 일을 저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전재석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임민경입니다.”

임민경이라는 말에 감독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당대의 슈퍼스타가 눈앞에 나타나자 이 자리는 단순히 감독들이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아니게 되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감독들이 서로 자리를 비키며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봉도준이 재석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동생은 여기 앉아.”

“아이고, 역시 절 챙겨 주시는 분은 형님밖에 없습니다.”

재석은 봉도준 감독 옆에 앉게 되었다.

“하하하, 앉아.”

다들 처음에는 민경에게 관심을 보였다. 인맥을 좀 만들어서 영화에 출연시킬 수 없을까 하는 거였다.

하지만 봉도준은 이미 민경을 섭외하겠다는 각서를 썼기 때문에 재석에게 집중했다.

“동생, 요즘 돈 많이 벌었지?”

“돈이야 벌었습니다만, 그걸 묻는다는 건…… 설마…….”

재석은 봉도준 감독이 준비하고 있는 영화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작이 언제인지, 얼마나 진행하고 있는지는 잘 몰랐다.

‘괴수다, 영화 괴수.’

천만관객을 끌어들였던 그 영화의 계획이 지금 시작되고 있는 거다.

“괴물 재난 영화를 하나 계획하고 있거든.”

“한국에서는 생소한 장르 아닙니까.”

“그렇지. 만들어도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게 있지.”

정말 그 영화 이후로 괴물이 나오는 영화는 한국에선 전부 망했었다.

“투자를 원하는 거네요.”

“그래, 그것도 좀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봉도준 감독은 생각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큰 내용이었다.

“형님, 그거 아세요?”

“뭘.”

“전 대본과 시나리오를 보고 투자를 결정합니다. 소재로 괴수를 다루든, 동성애, 전쟁을 다루든 상관없습니다. 돈이 얼마가 들든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가 괜찮다고 생각한 작품에는 백억이든 천억이든 투자할 겁니다.”

재석의 이야기에 불안감을 품고 있던 봉도준 감독이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내일 당장 보내지.”

재석이 일부러 동성애, 전쟁이란 단어에 힘을 주자 저쪽에서 귀를 쫑긋거리며 시선을 준 감독이 있었다.

‘걸렸어.’

잠시 후, 박준익 감독이 은근슬쩍 재석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반가워요. 박준익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둘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적당히 사담을 나누다가 영화 이야기로 넘어갔다.

“제가 영화를 하나 기획 중인데, 조선시대 광대 이야기입니다. 영화 제작에 투자를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네, 맞습니다. 조선시대 광대라…… 관심이 가는 주제네요. 감독님께서 투자를 받으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대본 혹은 시나리오 보내 주십시오. 그걸 보고 괜찮다고 생각이 든다면 확실하게 투자해 드리겠습니다.”

재석은 이미 그에게 투자할 마음 품고 있었지만 여지는 확실히 남겨 두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조금 더 이어 나갔고, 재석은 문득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영화 제목은 정해졌습니까?”

“아직 정해지진 않았습니다.”

“혹시, 왕의 광대는 어떻습니까?”

그 순간 억! 하면서 박준익 감독은 깜짝 놀랐다. 느낌이 확 온 거였다.

“아주 좋아 보이는 제목입니다.”

“하하, 그런가요? 그러면 저는 내일 시나리오가 도착하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박준익은 원하는 목적을 이뤄서 기분이 좋았다.

그가 자리를 떠나자, 이번에는 또 다른 감독이 조용히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박광연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재석은 박광연과 악수를 나누며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요즘 아주 잘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투자 말씀이시죠?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좋은 내용이라면 투자하지 못할 거 없죠. 물론 시나리오를 본 후에 결정해야 합니다.”

재석이 차분하게 말하자, 박광연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영화 제작비 수급에 곤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작은…….”

박광연 감독은 정말 열심히 이야기하면서 어떻게든 투자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재석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차분히 모두 들어 주었다.

“제목은 정하셨습니까?”

“예, 제목은 정했습니다. 웰컴 투 여랑골입니다.”

“신선하네요.”

당시에 무척이나 신선했다. 그만큼 감각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수익 면에서는 재석이 지금까지 투자했던 영화에 비해 낮았다.

‘대략 80퍼센트 수익인데.’

왕의 광대는 100퍼센트가 넘는다. 하지만 이쪽은 아니다.

‘그래도 양으로 밀어붙이면 해 볼 만하지.’

100만 원 투자하고 80만 원 이익 보는 것과 100억 넣고 80억 받는 건 다르다. 재석이 노리는 건 이거다.

‘나중에 돈을 얼마나 나눠서 줘야 하는지 계산 좀 해 봐야겠네.’

그렇게 계산이 끝나 갈 때쯤 다른 감독들도 재석에게 접근해서 영화 시나리오 이야기를 했다.

재석은 준비된 영화 시나리오를 다 듣고도 일단 시나리오를 달라고 요구했다.

마음속으로 투자를 결정한 영화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영화도 있었다.

그때, 민경은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한두 잔씩 받다가 취해 버리고 말았다.

“헤헤헤.”

감독들은 멀쩡한 술을 너무 과하게 먹인 건 아닌지 걱정할 정도였지만, 그 문제를 떠맡아 줄 재석이 있었다.

“뭘 이리 많이 마셨어.”

“헤헤헤.”

결국 재석은 민경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감독들은 다들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인사했다.

“될까?”

감독들은 재석이 가고 나서 투자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만큼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 돈이 가장 중요했다.

재석은 회사에서 감독들이 보내온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동시에 회의도 진행했다.

그는 영화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다 알고 있었지만, 직원들과 의견을 공유할 필요는 있었다.

“봉도준 감독 작품은 정말 도박적이고, 여랑골은 주제 의식이 분명해서 성공은 모르겠지만 본전은 확실히 챙길 수 있다고 본다.”

“민철이 생각은 어때?”

“전 이 왕의 광대가 정말 신선해요. 이거 정말 재미있어 보여요. 실제로 조선시대 왕이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겠지만, 신기해서 한 번 볼 것 같아요. 그런데 여랑골은 정말 본전치기로 보입니다.”

재석은 이러한 회의를 통해 직원들이 작품 보는 눈을 기르길 원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회사를 함께 키워 나가고 싶었다.

“그래도 봉도준 감독의 시나리오는 정말 좋아요. CG에 관해서도 감독이 쉽게 놓치지 않을 겁니다.”

“선배 생각은 봉도준 감독에게 투자하는 건가요?”

“그렇지. 난 이 세 개의 시나리오를 보고 결정을 내렸어. 투자하겠다고.”

“그럼 막상 투자하는 영화는 3개인데, 각자 작업이 언제 들어가는 거야?”

“아마 봉도준 감독의 작품은 내후년이 될 거고, 다른 두 개는 투자금이 들어가면 진행할 겁니다.”

“그럼 빨리 작업이 가능한 쪽부터 돈을 줘야 하는 거 아냐?”

“아뇨. 모두 함께 돈을 입금시킬 겁니다. 액수는 투자 계획서를 받고 난 뒤에 결정하죠.”

재석이 회의를 끝내려다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 그리고 민경이 휴가 계획서도 작성할 겁니다.”

“너도 갈 거지?”

“예.”

“둘이 너무 붙어서 정분나겠어.”

“예, 그럴 겁니다.”

재석이 아주 편안하게 대답하자 주명진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뭐냐, 그 성의 없는 답변은.”

“나려면 나는 거고, 안 나면 안 나는 거죠.”

이미 연인 관계지만, 비밀이라 쉽사리 말할 순 없었다.

“그래, 정분나서 오래도록 붙잡아라. 그런 슈퍼스타 10년은 너끈히 간다. 그럼 10년은 회사가 돈 없어서 빌빌거리진 않지.”

재석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겨우 10년만 가겠습니까.”

더 간다. 최고의 배우로 자리 매김하는 게 쉽지 않아서 그런지 되긴 된다.

“요즘 민경 씨 눈빛이 예사스럽지 않아서 말이야.”

“갑자기 왜요?”

“뭐랄까, 사랑에 푹 빠진 눈빛이야.”

재석은 순간 움찔했다.

‘눈치 빠른데.’

주명진에게는 조만간 발뺌하는 게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까요?”

“넌 매니저가 배우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야지. 쓸데없는 파리가 꼬여서 스캔들 터지면 어쩌려고.”

‘연인이 저입니다만?’

차마 말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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