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83화 (83/152)

재석은 여행 중이었다. 영화 촬영이 끝나고 드라마 촬영 들어가기 전에 민경과 함께 휴양지에 휴식을 취하러 간 거다.

“아,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민경은 정말 어디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기에는 벌려 놓은 일이 너무 많다.”

재석의 한마디에 민경은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딱 반년만 쉬면 안 될까요?”

“흐음, 그건 어렵겠지만 스케줄을 조정해서 줄여는 볼게.”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재석과 민경은 그동안 정말 쉼 없이 달려왔다. 어쩌다 한 번씩 이렇게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말고는 제대로 쉬어 보질 못했다.

“걱정 마라. 나이 들면 이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한다.”

“아우, 그놈의 영감님 말투. 꼭 할아버지처럼 젊어서 많이 해라. 지금 열심히 해야 한다. 그놈의 잔소리.”

“나 별말 안 했어. 사실이야.”

“그 사실 별로 알고 싶지 않거든요!”

짧은 휴가를 즐기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봉도준 감독이 재석을 찾았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큰일 났어.”

“무슨 큰일이요.”

“제작사가 이 영화 못 찍겠대.”

“예?”

봉도준 감독이 계획한 영화는 2년의 기간을 잡아먹는다. 근데 초반부터 제작사가 못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심각한 상황이 된 거다.

“갑자기 왜요. 제가 투자하겠다는데.”

“성공할 수 없다고 퇴짜 맞았어.”

한국에서 흥행한 기록이 없는 장르라서 제작사에서 포기를 한 거다.

“지금 돈은 얼마나 들어갔습니까?”

“디자이너에게 일을 주긴 했는데, 아직 돈은 안 들어갔어.”

봉도준 감독은 걱정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재석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캐스팅까지 모두 끝마친 상태에서도 엎어지곤 하니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재석은 이 영화가 결국 개봉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거 내가 먹을까?’

살짝 욕심이 났다. 잘나가는 봉도준 감독을 데리고 있다면 영화사가 망할 일은 없다.

“형님, 다른 제작사 찾으실 겁니까?”

“하아, 동생이 투자 약속까지 해 줬는데 찾아야지.”

“차라리 저희 둘이 같이 제작사를 차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응?”

“경영 쪽은 제가 좀 자신이 있습니다. 다만, 제작사라는 게 사람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촬영을 하려면 그쪽 사람들이 필요하죠.”

“하지만 난 그렇게 많은 돈은 없는데…….”

“돈은 제가 대죠. 형님은 사람만 끌고 오세요.”

봉도준 감독은 충무로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많은 인맥을 쌓았다. 금전적인 문제만 해결해 준다면 제작에 필요한 인재들은 그가 섭외할 수 있을 터다.

결국 두 사람은 정말 빠르게 합의를 하고 결과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석이 이 사실을 먼저 민경에게 이야기자자, 그녀는 너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오빠, 괜찮은 거예요?”

“봉도준 감독이 준비하는 영화는 천만 관객은 달성할 영화야. 절대 포기 못하지.”

“너무 자신 만만한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 내가 꼭 그렇게 만들 거야. 그리고 너도 그 영화에 출연시킬 거야.”

“아, 그때 그 약속…….”

민경은 자신의 출연을 봉도준 감독에게 약속했을 당시에 재석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때 재석은 먹이를 노리는 표범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가?’

걱정은 됐지만, 재석이 허투루 돈을 투자하는 사람이 아니란 건 민경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재석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결국 건물 한 층을 더 임대하여 영화 제작사 사무실로 쓰기로 했다.

“참 다행인 줄 알아요. 아직 입주한 사람이 없어서.”

“이러다 이 건물 전부 내가 쓰게 생겼다.”

재석은 6층짜리 건물 전체를 쓴다는 말에 민경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임대료는요?”

“챙겨 줄게.”

“확실히 해 줘야 해요. 공짜는 안 돼요. 좀 깎아 줄 수는 있어도.”

민경은 재석과 연인 관계라서 편의는 봐 주지만, 돈 계산은 철저히 할 생각이었다.

‘오빠 영화 망하면 내가 먹여 살려야 해. 이 건물은 오빠 쓰게 하고 건물 하나 더 사야겠어. 따로 수익을 만들어야 안정적인 수입이 되지.’

만일을 대비하는 자세까지 완벽한 민경이었다.

재석은 영화 제작사까지 차리고 하니 너무 바빠졌다. 그 탓에 민경에게는 임시로 다른 매니저가 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 드라마 끝나면 다시 내가 할 거야. 그리고 지금 매니저는 다른 연예인 붙여 줄 거고.”

“잡은 고기라서 이러는 거면 되게 실망할 거예요.”

“잡은 고기치고는 너무 힘이 좋아서 도망칠 수도 있으니 항상 주시해야지.”

“말이나 못하면.”

재석은 그렇게 민경을 달래고 온전히 봉도준 감독과 제작사 관련 업무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 사장님?”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부르셔도 되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평상시처럼 해 주세요.”

“좋아. 그럼 사장님, 여기 제 소개로 들어온 사람들 이력서 다들 경력직이라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못 들어오고 좀 시간이 걸린답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디자인은 얼마나 진행됐습니까?”

“그 디자인 말인데, 꽤 어려워. 할리우드처럼 괴물이 크면 곤란해. 최대한 작으면서 동시에 공포감을 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음, 제가 한번 그려 볼까요?”

“내 시나리오 내용은 다 알지?”

“물론이죠. 한강에서 괴수가 나타난다면, 그리고 물고기가 변형된 형태의 괴수.”

“그래, 아주 잘 알고 있어.”

슥슥.

재석은 어설픈 그림이지만 괴수를 그려 나갔고, 그림을 다 그린 뒤에 봉도준 감독에게 보여 줬다.

“형님, 이런 디자인은 어떨까요?”

봉도준 감독은 정말 흉측한 괴수 그림을 보고 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 심각한데.”

“괴수가요?”

“아니, 그림 실력이…….”

“아, 진짜. 저 미대 안 나왔어요. 이 정도면 괜찮은 거죠.”

“뭐, 어쨌든 내 시나리오 느낌은 잘 살렸어.”

봉도준 감독는 재석의 그림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어디 보자…….”

봉도준 감독이 펜을 들고 조금씩 조정해 나가자 괴물의 형태가 온전히 잡히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야!”

봉도준 감독은 갑자기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방금 그린 그림을 팩스로 보냈다.

거의 콘셉트를 잘 살린 초안이라 봉도준은 무척이나 만족했다.

며칠 뒤, 완성된 괴수의 디자인을 받게 되었다.

“오오오!”

정말 만족할 만한 그림이 나와서 봉도준 감독은 정말 좋아했다.

“빨리 나왔네요.”

“이걸 토대로 스토리를 짜서 촬영 계획을 세워야 해.”

“이제부터 시작이네요.”

“동생, 각색 잘하지?”

“저 공짜로 일 안하는데.”

“사장이 돈 받으려고?”

“전 각색을 하는 거지, 각본가는 아니에요. 먼저 만들어 줘야 바꾸죠.”

“알았어. 그럼 기다려. 내가 깜짝 놀랄 만한 대본을 준비해서 가져올 테니까.”

그 뒤로 봉도준 감독은 사무실에 나와서 매일같이 재석과 스토리 회의를 진행했다.

“그러니까 첫 장면은 하수구에 약품을 버리는 걸로 시작할 생각인데, 그다음이 문제란 말이야.”

“그럼 이건 어떤가요?”

재석은 자신이 알고 이야기를 하나씩 던졌고, 봉도준 감독이 정말 천재임을 느꼈다. 자신이 돌려서 말하는 이야기를 찰떡같이 이해하고, 심지어 그걸 업그레이드했기 때문이다.

‘미친 재능이다.’

괜히 유명해진 감독이 아니었다.

하지만 봉도준 감독은 오히려 재석의 재능에 감탄을 했다.

“이야, 정말 사장님 아니었으면 이걸 어떻게 썼으려나.”

봉도준은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형님, 부담스럽습니다. 저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에요.”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면 평범한 사람은 다 죽어야 해.”

봉도준은 웃으면서 좋아했고, 재석도 웃었다.

“근데 이거 완성하려면 아직도 멀었네.”

“적어도 석 달은 걸리겠죠.”

“그 정도 걸리겠지.”

재석의 이야기를 자꾸 한층 더 업그레이드를 시키다 보니 진행이 더욱 더뎠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영화 제작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폭주기관차처럼 멈추지 않고 달리는 거다.

최근 재석의 일과는 회사 일을 보다가 봉도준을 만나 매일같이 이야기하는 거다.

“오늘 술?”

“형님, 집에서 뭐라 안 해요?”

“뭐라 하긴. 안 들어오니까 좋아하던데.”

“들어가요. 좀 형수님이 저한테 전화해요.”

“뭐라는데.”

“사장님, 저희 남편이 안 들어와요. 제발 집에 보내 주세요, 라고요. 제가 졸지에 악덕 사장이 됐어요.”

“에이, 오늘은 그냥 가야 하나…….”

“정 한잔하고 싶으면 이번 주말에 한잔해요. 그때 저도 시간 아주 넉넉히 비니까.”

“진짜 그럼 내일이네.”

“예.”

재석은 그렇게 술이 고픈 봉도준 감독을 돌려보내고 토요일 날 점심에 봉도준 감독 부부를 만났다. 아기도 같이 말이다.

“어머머.”

봉도준 감독의 아내는 재석의 옆에 있는 임민경을 보고 놀랐다. 이 자리에 같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음? 왜 같이 왔어.”

봉도준은 왜 같이 나왔냐고, 묻자 재석이 한마디 했다.

“가까이 살아서 불렀어요. 그리고 영화 스토리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고요. 약속도 했잖아요.”

“아, 물론이지.”

봉도준 감독은 임민경이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기로 약속한 각서를 아주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로 갈 거야?”

“바다 구경 가실래요?”

“좋지, 거기서 뭐 구워 먹는 거 좋고.”

“좋아하실 줄 알고 펜션까지 예약해 놨습니다. 먹을 것도 부탁해서 그쪽에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고요.”

“아, 그래?”

재석은 봉도준 감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차를 끌고 왔다.

“형님은 조수석.”

“그래.”

봉도준 감독의 아내와 아기, 그리고 민경은 뒷좌석에 올라탔는데, 뒷좌석에는 아기가 편히 쉴 수 있게 따로 좌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머나, 이런 것까지 준비해 주시고.”

“그거 돌아가실 때 가지고 가세요. 선물입니다.”

“어머, 고맙습니다. 이거 딱 봐도 비싸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형님이 영화 잘 찍어서 그 몇 배의 돈을 벌어다 주시겠죠.”

“호호호.”

여자들은 뒷좌석에 앉자 서로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한쪽은 유명 연예인을 보는 관심이었고, 다른 한쪽은 아기를 어떻게 키우는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어머, 아기가 정말 예뻐요.”

“고마워요. 근데 정말 예쁘세요. 화장 하나도 안 하신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래도 피부 상할까 봐 기초 관리를 꼼꼼하게 해요.”

“어우, 부러워요. 저도 민경 씨처럼 예뻤으면 연예인 도전하는 건데.”

“아니에요. 충분히 예쁘세요.”

“에이, 그래도 연예인 정도는 아니죠.”

여성들의 수다 속에서 재석과 봉도준은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까, 다음 장면이 괴물이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가서 그 안을 휘젓는 거지.”

“오우, 그 컨테이너 건물이 크게 들썩이면서 공포감을 주겠는데요.”

“건물만 흔들리면 아쉬우니까, 창문도 깨지고 괴수가 컨테이너 벽 한쪽을 찌그러트리는 거야.”

“음, 그렇게 하면 다시 촬영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배경이 겹치는 신을 먼저 완벽히 끝내고 진행해야지. 한 번에 끝낼 수 있게.”

봉도준 감독은 제작비를 최대한 아껴서 영화의 손익분기점을 낮추려고 했다.

“나 정말 열심히 찍을 거야. 내 일생일대에 다시없을 기회니까.”

“그러니까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준비하는 겁니다. 성공할 수 있게 말이죠.”

“물론이지.”

봉도준 감독은 꼭 성공시키겠다는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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