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바다가 보이는 펜션에 도착하자 바다를 보며 뭔가 시원함을 느끼는지 계속 웃었다.
“하하하!”
이렇게 놀러온 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음…….”
동시에 봉도준 감독은 민경과 재석에게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걸 느꼈다.
‘이건 마치…….’
연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그 누구도 쉽게 떼어 내기 어려운 느낌의 그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분명 단순한 매니저와 연예인 관계인데…….’
종종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속삭이며 대화하는 걸 보면서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았다.
저녁에 잘 때쯤 봉도준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보, 저 두 사람 사귀는 사이에요?”
“내가 알기로 그냥 배우와 매니저 관계야. 근데 오늘 보니까 좀 많이 다르네.”
“어머, 그럼 둘이 몰래 사귀는 거 아니에요?”
“가능성이 없진 않는데……. 이 바닥이 가끔 모호한 관계가 꽤 많아서…….”
봉도준 감독은 아직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민경이 드라마 촬영을 한참 하고 있을 때 내 기억 속의 지우개가 개봉했고, 많은 이들이 영화관으로 달려가 관람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 대다수가 결말에서 눈물을 흘렸다. 기억을 잃어 가는 여주인공과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남주인공의 애절한 모습은 관객들을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다.
‘예상대로야. 잘되어 가고 있어. 안심이야.’
반응은 대호평이었고, 영화는 금세 손익분기점을 넘어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걸 재석은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 기대하고 있는 건 일본이었다.
‘곧 일본에서 개봉한다.’
한국에서 상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일본에서 개봉이 시작된다.
재석은 일본에서의 상영이 끝나고 두 달 뒤에 분배받을 수익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마찬가지로 투자를 진행했던 왕의 광대와 웰컴 투 여랑골은 아직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투자금이 들어가자 활발히 촬영 준비가 진행되는 듯했다.
‘한참 바쁘겠지.’
재석은 두 작품은 문제없이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니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봉도준 감독과의 각본 작업에 열중했다.
그리고 각본 작업이 거의 다 끝나 가는 시점에 봉도준 감독이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장소를 찾아다녀야 해.”
봉도준 감독의 말을 듣고 재석은 한 가지 문제를 제시했다.
“형님, 괴수가 사는 서식지가 걸립니다. 실제로 이런 장소가 있다고 해도 악취가 끊이질 않을 겁니다. 거기에 밀폐된 장소인데 가능할까요?”
봉도준 감독은 그 말을 듣자 수긍했다.
“하긴, 틀린 말이 아니야. 다른 건 몰라도 이리저리 조명을 쓰고 해야 하는데, 딱 맞는 공간이 있다고 해도 촬영이 어렵겠지?”
“그래서 말인데, 스튜디오를 하나 만드는 게 어떨까요?”
“좋아, 어디 창고 하나 빌려서 작업하자고.”
재석의 도움 덕분에 막히는 부분들이 술술 해결되자, 봉도준 감독은 막힘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어 여유로운 마음으로 좀 더 머리를 굴릴 수 있었다.
며칠 뒤, 재석과 봉도준 감독은 차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촬영에 쓸 만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스토리상 촬영 장소는 한강 변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 근처를 벗어나선 안 됐다.
“역시 촬영 장소는 한강 변에 집중되네요.”
“스토리 진행이 그렇게 가니까.”
본래 이런 일은 로케이션 매니저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기 위해 두 사람이 직접 뛰어다녔다.
둘은 촬영 장소를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이곳에서 어떤 장면을 촬영하면 좋겠다며 의견을 나눴다.
“그럼 여기는 15번, 방금 거기는 48번”
저녁이 되어서야 일이 끝났고, 둘은 시원하게 사이다를 들이켰다.
“아, 달고 좋다.”
마음 같아서는 맥주라도 한잔하고 싶었지만, 재석이 운전을 해야 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사이다로 대신한 거다.
“동생 덕분에 정말 편하게 진행되고 있어. 고마워.”
“아뇨, 저도 영화 제작을 직접 옆에서 보고 배우니 재미있습니다.”
“근데 동생은 정말 돈이 많은 거 같아. 동시에 영화 제작 세 개나 투자를 하다니.”
“뭘요. 운이 좋아 일이 잘 풀린 덕분이죠.”
“나는 그런 돈 있으면 감독 안 할 것 같은데.”
“정말 그럴까요?”
“크흠.”
영화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봉도준 감독이라면 영화 제작에 모든 돈을 쓸 게 분명했다.
“이 영화가 개봉하게 되면 세 개가 아니라, 더 많은 영화에 투자할 수 있는 돈을 벌어들이게 되겠죠.”
매해 수많은 영화가 개봉되지만,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영화는 그중 손에 꼽는다. 그만큼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는 건 당연하다.
“잘되면 인센티브도 나오지?”
“걱정 마세요. 꼭 챙겨 드릴게요. 지금도 형님 월급이 전 직원 통틀어도 제일 큽니다.”
봉도준 감독은 재석이 차린 제작사에 소속되면서 엄청난 연봉을 받고 있었다.
“크크크. 그래서 우리 마누라가 아주 좋아하고 있어. 제작사를 차렸으니 이 영화가 개봉되고 난 뒤에도 다른 것도 계속 만들 거지?”
“그래야죠. 그때는 공개적으로 시나리오를 모집해 볼까 합니다.”
“흐음, 그러면 내 월급은 계속 나오는 거 맞지?”
“퇴사를 안 하시면 계속 드려야죠.”
“그렇다면 계속 있어야지. 아무리 봐도 이득이란 말이야.”
“그러면 전 손해나는 겁니까?”
재석의 말에 봉도준 감독이 크게 웃었다.
“걱정 마. 내가 제작사에 돈 많이 벌어다 주는 감독이 될 테니까.”
봉도준 감독은 자신 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물론, 재석은 그가 그렇게 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형님, 밀어 드릴 테니 꼭 좀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다만 손해가 나면 저랑 같이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크흠!”
봉도준 감독은 손해를 함께 감당한다는 말에 조금 긴장이 됐다. 재석이 투자한 액수를 생각하면 단 10퍼센트만 되더라도 수억은 될 거다.
“물론이지. 억 단위 빚쟁이가 될 순 없다고.”
“전 수십억 빚쟁이가 되고요.”
“크, 진짜 단위가 다르네.”
버는 액수만큼 차이도 어마무시했다.
“동생, 영화 촬영 시작하면 한 장면 나갈 생각 있어?”
“예?”
봉도준 감독의 말에 재석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연기를 해 본 적은 없었다. 거기에 제작자가 연기를 한다는 것도 참 웃긴 이야기다.
“에이, 연기 한번 안 해 봤는데 무슨…….”
“그래도 한번 해 봐. 어차피 단역은 티도 안 나.”
봉도준 감독은 재석을 카메라 앞에 세우고 싶었다. 얼굴이 잘난 건 아니지만, 연기에 대한 감각은 있어 보였다.
“아, 단역이라도 한 신을 잡는데…….”
영화를 볼 때는 한순간이지만, 실제 촬영을 할 때는 다르다. 그 신을 찍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몇 시간이다.
“아이고, 저 하나 때문에 그 시간을 쓴다고요?”
“뭐 어때. 제작자가 이럴 때 한번 얼굴 비추는 거지.”
봉도준 감독은 재석을 밀어 넣을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몰래 영화 대본을 바꿔야겠어.’
재석을 깜짝 놀라게 만들 생각이었다.
* * *
민경은 드라마 대지에서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오는 탓에 양궁 연습에 매진했다.
“끄응……!”
팔 힘이 부족해 힘에 부쳤지만, 어떻게든 완벽한 연기를 해내기 위해 열심히 훈련했다. 그 탓에 고운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재석은 민경이 그렇게 훈련을 끝내면 팔과 어깨를 마사지해 주었다.
“으,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요.”
“연습 말고는 답 없다.”
민경은 정말 시간 날 때마다 연습을 했다. 스케줄 때문에 매일 할 수는 없었지만, 틈이 나면 쉬기보다는 양궁 연습에 열중했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어.”
민경은 쉬는 날이 없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신 장편 드라마는 안 찍을 거예요.”
“이번에 드라마랑 영화 촬영 모두 끝나면 한 달이든, 반년이든 네 맘대로 쉬어.”
민경은 그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래도 돼요?”
“내가 거짓말해서 뭐하겠어. 네가 회사에 벌어다 준 돈을 생각하면 쉬어도 돼.
재석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대답했다.
실제로 민경이 반년 정도 쉰다 하더라도 회사에 지장은 딱히 없다. 영화 투자로 벌어들인, 그리고 벌어들이게 수익이 상당한 터라 자금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좋아요. 그럼 반년간 정말 편히 쉴래요.”
민경이 그렇게 말했지만, 재석은 그녀가 그렇게 정말 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녀의 성격상 그러는 게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 * *
재석은 영화 오디션이 시작되자 심사위원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물론 그 옆에 봉도준 감독도 있었다.
‘어디 괜찮은 사람 없나?’
재석은 오디션 참가자들을 슥 훑어봤다. 언제 어디서 스타가 될 인재를 발견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유심히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살피던 그는 이내 재미난 사람을 한 명 발견했다.
‘오호, 이 사람이 여길 왔네.’
바로 왕의 광대 주인공을 맡게 되는 박준기였다.
그는 분명 이후 괜찮은 배우가 되지만, 그의 이미지는 봉도준 감독의 영화와 맞지 않았다.
‘일단 명함을 줄까?’
재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나중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줄 필요는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시작하세요.”
박준기가 연기를 시작하자 봉도준 감독은 매의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뭔가 영 마땅치 않은 표정이었다.
‘확실히 지금은 실력이 부족할 때지.’
재석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이번 오디션에서는 말없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수고하셨어요.”
박준기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자 재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 좀.”
“조금만 쉴게요.”
재석은 곧바로 나가서 박준기를 붙잡았다.
“저기요!”
“네?”
“이거 받으세요. 그리고 내일 회사로 오세요. 참고로 오디션과는 무관한 겁니다. 아시겠죠?”
재석은 그 말을 하고 나서 다시 돌아갔다.
“화장실 안 가고 어디 갔었어?”
“매니지먼트의 새 식구 영입이죠.”
“이번 영화와는 관련 짓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형님, 제가 그 정도로 눈치 없진 않아요.”
재석은 봉도준 감독의 걱정을 일축시켰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렇게 오디션은 계속되었고, 5시쯤에 일정이 끝났다.
다음 날, 재석은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오자 반갑게 미소 지었다.
“반가워요. 어제는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 아닙니다.”
박준기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근데 절 왜 보자고 하셨는지…….”
“왜 불렀겠습니까? 당연히 영입하려고 하는 거죠. 일단 회사 오디션부터 보죠.”
“아……!”
박준기는 얼굴 표정이 밝아지면서 곧바로 준비를 했다.
“일단 자유 연기부터 보죠.”
“이 자리에서요?”
“연기자가 자리를 가릴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만.”
“죄송합니다.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박준기는 자유 연기를 바로 펼쳤다. 준비된 게 없었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였다. 열정 가득 말이다. 거기에 재석이 주문한 것도 최대한 맞춰서 펼쳤다.
“슬픔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만약 남자가 여자처럼 운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잠시 시간을 드리죠.”
박준기는 재석의 주문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며 슬픔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는 이 기회를 어떻게 해서든 살리고 싶어서 없는 감정을 쥐어짜면서 슬픔을 표현했다.
힘겹게 연기를 한 뒤에는 곧장 카메라 테스트였다.
정말 숨 가쁘게 감정을 추스를 틈도 없이 움직였다.
“허허, 어디서 사람 하나 낚아 왔네.”
주명진은 재석이 끌고 다니는 사람을 한 명 보더니 매니저를 새로 뽑아야겠구나 생각했지만, 나중에 박준기가 돌아가고 나서 재석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매니저 새로 뽑지 말고 기다리세요. 한동안은 일정만 보내서 움직이게 하고요. 혹시 왕의 광대 오디션 일정 잡혔나요?”
“아, 잡혔어. 근데 공개 오디션이야.”
“거기로 바로 보내세요. 민경이 로드를 그쪽에 보내고 말이죠. 그날은 제가 민경이를 따라다니죠.”
“알았다.”
주명진은 그 말대로 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