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아, 덕분에 오늘 5시간 넘게 잔 것 같다. 고마워.
5시간이 긴 수면 시간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불면증 환자에게 있어서는 정말 간절하다 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 터였다.
“그래도 좀 자고 가서 다행이네.”
민경은 앞으로 이영주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며 생각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재석은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바로 이영주에게 얘기했던 복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거였다.
“음? 이걸 왜 하는 거냐?”
“연예인들과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많은 거 같아서요. 가끔 회식을 하긴 하지만, 그걸로 스트레스를 전부 해결할 수 없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그래서 스트레스의 원인을 파악하고, 근본적인 해결까지 도와서 편안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목적입니다.”
“취지는 좋네.”
재석이 상세한 내용을 전달하자 주명진은 그걸 진행할 수 있도록 움직였다.
그 첫 번째는 병원과의 계약이다. 주기적인 상담을 받으며 위험이 있는 사람이 정신적 치료와 상담을 병행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전문 병원과 계약을 하자, 병원에서는 두 손 들고 만세를 외쳤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때까지는 의사들이 정신과 치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혹은 사람들의 인식이 정신병에 걸린 게 마치 미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며 좌절감을 느끼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지금 정신병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도 내 사람은 내가 지켜야지.’
재석은 이영주가 집으로 혼자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자 걱정이 되었다.
“오빠, 표정이 안 좋아. 언니가 걱정돼서 그래요?”
“얼굴이 핼쑥하고 식욕, 수면욕이 없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거든. 사람의 3대 욕구 중에 2대 욕구의 상실은…….”
재석은 뒷말을 삼켰지만, 3대 욕구의 상실은 죽음과 가깝다.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민경은 아픈 사람에게 조금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재석의 말은 그 질투를 없애 버렸다.
“우울증 중증인 것 같아서 그래.”
“우울증이요?”
“그것도 심각해 보여. 얼핏 증상을 봤을 땐 이유 없는 답답함과 더불어 몸에 통증도 동반된 상태일 거야. 그리고 혹시 어제 둘이 대화를 나눌 때 이영주 씨가 말이 별로 없진 않았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말이…….”
민경은 이영주의 말수가 부쩍 줄었다는 걸 어제 느끼긴 했지만, 좀 피곤해서 그런 거라 여겼다.
“우울증이 심각해지면 어떻게 돼요?”
“정신적으로 끝까지 몰리면 최악의 경우에는 자해까지 하기도 해.”
민경은 자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면서 울상이 되었다.
“오빠, 저한테 겁주려고 그러는 거죠?”
“아니, 실제로 내가 아는 사람이 비슷하게 심각한 우을증에 빠진 적이 있어서 잘 알아.”
재석의 단호한 말에 민경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쉬는 거야. 그걸로 일단 심리적 안정감을 찾을 수 있지. 물론 쉰다고 해서 바로 완치되진 없겠지만,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거야.”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어요?”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할 수 있도록 확실히 알려야지. 우울증은 스스로 낫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니까.”
“하지만 쉽게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 무엇보다 스스로가 우울증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우울증이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시되지 않고, 몇몇 유명인들이 우울증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후에야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현재로써는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은 탓에 이영주는 스스로가 그러한 병에 걸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할 거다.
‘큰일이야. 알고 있으니까 더더욱 마음이 불편해!’
언제 큰일이 벌어질 수 없으니 더더욱 그랬다.
이렇게 되면 적극적으로 부딪치는 게 방법이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오빠, 그럼 나는 뭘 하면 돼?”
“일단 연락이야. 시간이 날 때마다 연락을 계속해서 상태를 확인하는 게 중요해. 다만 절대로 우울증 이야기는 꺼내지 마. 오히려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
“알았어.”
재석은 그렇게 민경에게 이영주를 부탁했다.
그가 직접 나서면 부자연스러울 수 있었는데, 민경이 협력함으로써 원활히 이영주를 도울 수 있게 됐다. 민경이라면 자주 연락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 터다.
재석은 일단 민경이 이영주를 만나기 쉽도록 스케줄을 정리했다.
우선 국내를 벗어나는 일본 스케줄을 딜레이했고, 드라마 촬영은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끝낼 수 있도록 요청을 넣었다.
이영주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한다는 게 사실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재석은 그래도 사람이 죽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둘 순 없다고 생각했다.
“언니, 오늘 볼 수 있어요?”
(너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쁘잖아.)
“아, 괜찮아요. 드라마 촬영이 일찍 끝났거든요. 언니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안 돼요?”
이영주는 민경이 보고 싶다고 애교를 부리자 이내 승낙했다.
이날 저녁, 민경과 이영주는 곧바로 만남을 가졌는데, 오늘도 이영주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어디 아파요?”
“아, 머리가 좀 아파. 하지만 괜찮아.”
재석과 민경은 그걸 보고 단순히 머리가 아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곳은 안 아파요?”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아.”
“어머, 언니 보약이라도 먹어야겠어요.”
“보약은 무슨.”
민경은 그녀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건강해야죠. 제가 잘 아는 곳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용해요.”
“용해?”
“네, 아주 용해요. 그치 오빠?”
“제가 잘 아는 곳입니다. 얼마나 용한지 아주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죠.”
“그럼 한번 갈까?”
이영주는 몸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살짝 혹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손에 이끌려 그곳에 간 곳은 한의원이었다.
우울증 치료에 무슨 한의원이냐 할 수 있겠지만, 재석은 일단 그녀의 몸 상태부터 회복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의원에서 진단을 받는데, 그 의원이 용하긴 용했다.
“음…… 호흡이 불안정해서 가슴이 답답하고, 뼈마디가 쑤시지 않소? 게다가 두통이 심해서 잠도 잘 안 올 거요. 하루에 두 시간은 자나?”
“세상에…….”
이영주는 한의사가 겨우 진맥 한 번 짚는 것으로 자신의 상태를 줄줄이 읊자 깜짝 놀랐다.
“이건 약을 먹는다고 해결되진 않아. 몸이야 어느 정도 회복을 하겠지만, 중요한 원인은 마음의 병이오.”
“네? 마음의 병이요?”
“정신적으로 쇠약해져서 몸이 아픈 거니, 약을 먹어 당장 몸이 회복한다고 해도 다시 곧 몸이 아파질 거요.”
사실 재석과 한의사는 말을 맞춘 상태였다. 보약을 빌미로 해서 진단을 받으며 몸 상태의 원인이 정신 쪽에 있음을 지적하려 한 거다.
“그럼 약은…….”
“먹어야지. 이대로 내버려 두면 한 달도 못 가서 병원에 눕게 될 거요. 그렇게 되면 부모가 걱정하지 않겠소?”
부모가 걱정할 거라는 말에 이영주는 약을 먹기로 했다.
“이거 제가 살게요.”
민경이 나서서 약값을 지불했다.
진단을 받고 나온 이영주는 표정이 안 좋았다.
“언니, 정말 마음에 병이 있어요?”
“아니, 난 그렇지 않아.”
아직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영주였다.
‘아직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어.’
겨우 잽 한 번 날렸다. 그걸로 KO가 될 거라 기대하진 않는다. 계속 인식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병원 앞에 서게 해야 한다.
‘몇 번이나 더 해야 할까?’
알 수 없지만, 일단 1차 목표인 시기를 빗나가게 하는 건 달성 가능해 보였다.
민경은 자주 연락을 하면서 이영주의 심리적 불안감을 줄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렇게 신경을 써 줘서 그런지 이영주는 민경에게 약간이지만 속내를 터놓았다.
“언니, 한약 잘 먹고 있어요?”
“응, 먹고는 있는데 몸이 좋아진 것 같진 않아.”
재석은 이영주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우리 게임 하나 하지 않을래요?”
“어떤 게임이요?”
“혹시 보드게임이라고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보드게임?”
잘 모르는 분야라 민경과 영주는 신기해했다.
“요즘 대학로에서 빠르게 생겨나고 있는 건데, 저도 심심해서 가볍게 할 수 있는 몇 가지를 구매해 봤습니다.”
재석이 갑자기 게임을 제안한 이유는 간단했다.
‘일시적이지만 승리를 통해서 우울함을 날려 버릴 수 있을 거야.’
재석은 일부러 게임에서 질 생각인 것이다. 그는 민경에 눈짓을 보냈다.
‘일부러 못하는 척?’
민경이 재석의 의도를 눈치채고 입모양으로 말하자, 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겠네요! 언니, 우리 한번 해 봐요.”
“그래.”
재석이 가장 먼저 내민 건 정말 단순한 게임인 할리갈리였다.
“자, 설명할게요. 간단히 말하자면 종을 치는 게임인데…….”
민경과 이영주는 간단한 규칙 설명을 듣고는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게임이 시작되자 이영주는 빠르게 집중을 했다.
땡!
종을 먼저 친 건 당연히 이영주였다. 그 뒤에도 이영주는 승승장구했고, 한 번씩 재석과 민경도 종을 치면서 티 나지 않게 판을 조율해 나갔다.
민경은 순간순간 움찔거리며 손이 튀어 나가려는 걸 간신히 참아 가며 게임을 했다.
‘이걸로 일시적으로나마 호전이 될 거야.’
물론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된다. 하지만 시간 벌이로는 충분했다.
‘다음에는 확실히 병원에 보내야 한다.’
이영주는 게임이 이어질수록 한껏 기분이 고양됐고, 얼굴이 활짝 폈다.
게임을 모두 끝내고 집으로 갈 때는 활짝 웃으며 돌아갔다.
“언니, 들어가요.”
“어, 오늘 고마웠어.”
“다음에 또 봬요.”
이영주가 가 버리자 민경이 물었다.
“오빠, 이거면 되지 않았어요?”
“아니, 멀었어. 너도 오늘 게임 하는 걸 봤잖아. 우울증 중증 환자의 집중력 저하 상태를 말이야. 지금 한 건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정도에 그쳤어.”
“후우. 그럼 아직도 멀었네요.”
“이 다음은 이영주씨 부모님을 만나야겠어.”
“정말 본격적으로 하네요.”
“우울증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서는 쉽사리 치료할 수 없는 병이니까.”
“근데 영주 언니의 부모님께서 오빠 말을 믿어 줄까요?”
“믿지 않으시면 이영주 씨가 위험해.”
“솔직히 전 우울증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오빠 말이니까 믿고 최대한 협력할게요.”
“고맙다.”
“아니에요. 그럼 제가 영주 언니 어머니에게 조심스레 연락을 취해 볼게요.”
***
재석은 이틀 뒤 이영주의 어머니와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전재석입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우리 영주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지금 영주 씨에 대해 불편한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에 이영주의 어머니는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뭐죠?”
“이런 말씀드리기 조금 그렇지만, 따님이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중증입니다.”
“네?”
재석의 말을 듣자 그녀의 표정은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분노로 일그러졌다.
“아니, 어디서 감히 우리 딸을 미쳤다고 말해!”
짝!
이영주의 어머니는 재석에게 거침없이 뺨을 때리면서 그 분노를 표출했다.
“어머님, 따님의 말수가 평소보다 적고 항상 힘겨워 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그 입을 나불대!”
이영주의 어머니가 다시 손찌검을 하려고 하자 재석이 그 팔을 잡았다.
“어머니, 전 몇 번이고 뺨을 맞아도 단순한 아픔으로 끝나지만, 따님의 우울증은 치료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이어집니다.”
“아니, 그래도!”
다른 손이 날아오자 재석은 그 팔도 잡았다.
“거기에 따님이 불면증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과 두통, 소화 불량에 시달리지 않습니까?”
“그 무슨…….”
재석이 정확하게 딸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어서 놀라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힘든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호흡이 거칠어질 때가 있지 않나요?”
그녀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요즘 체중이 많이 줄었을 겁니다. 따님께서는 인간의 3대 욕구가 극단적으로 줄어든 상태입니다. 우울증이 심각한 단계에 접어들 때 나타나는 증상이죠.”
“요, 요즘 그냥 일이 힘들어서, 몸이 아파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우울증으로 많은 고생을 하시다가 결국 자해까지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