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가장 좋은 건 병원에 가도록 설득하는 겁니다. 하지만 전 따님이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어머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재석은 뺨을 맞았지만, 이영주 하나 살리는 데 이 정도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재석은 이영주의 어머니를 집으로 돌려보낸 뒤 뺨을 어루만졌다.
“참 아프게도 때렸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만나서 설득에 성공 한 거다.
이영주의 어머니는 재석에게 자신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그에 재석은 티를 내지 않은 채 관심을 쏟아 주는 게 좋다고 알려 줬다.
“후우.”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는 가족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제 마지막은 이영주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병원 치료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며칠 뒤, 민경은 어렵사리 스케줄을 조정해서 이영주의 어머니와 함께 이영주를 병원에 데리고 가게 되었다.
“엄마, 꼭 가아 해?”
“그럼 가야지. 몸도 건강해야 하지만, 정신도 건강한지 확인해야지. 요즘 연예인들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는 일이 좀 많냐. 아무리 신경 안 쓰려 해도 스트레스 안 받는 게 이상한 거야.”
병원에서의 진단 결과는 역시나 우울증 상태가 심각한 것으로 나왔고, 이영주의 어머니는 다시금 눈물을 보였다.
의사는 따로 이영주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상태가 많이 심각합니다. 언제 극단적인 선택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 그 정도인가요?”
“예, 세심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재석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닐 거라고 부정했는데, 의사의 진단 결과를 듣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거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의사와의 면담을 종료하고, 밖에서 기다리는 자신의 딸을 꼭 끌어안았다.
“우리 딸, 엄마는 항상 네 편이다. 같이 이겨 내자.”
“언니, 저도 있어요.”
민경도 같이 격려를 해 주자, 이영주는 치료에 전념하기로 하고 휴식 기간에 들어가게 되었다.
“후우, 이제 됐네.”
재석은 민경을 통해 이영주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죽을 사람 하나 살렸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증상이 완화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꾸준한 관심을 줘야 한다.
이틀이 지난 후, 이영주의 어머니가 재석을 다시 한번 찾았다.
이영주의 어머니는 재석을 보기 무섭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과했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선의로 도와주신 건데, 제가 순간적으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재석은 한 사람의 어머니인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갔기에 굳이 사과를 받을 생각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앞으로는 따님에게 관심을 더더욱 기울여 주십시오. 치료만 잘 받는다면 충분히 호전될 수 있는 병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영주의 어머니는 진심을 담아 재석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두 달 뒤, 이영주는 어느 정도 우울증 증상이 완화된 뒤에 재석을 찾아왔다.
“아, 영주 씨!”
재석은 드디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이야기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제 증상을 알고 계셨다면서요. 이전에 아는 분이 똑같이 극심한 우울증을 앓으셨다고…….”
“예, 맞습니다.”
“그 사람은 잘 계시나요?”
“잘 계십니다. 아주 건강하게요.”
재석이 아는 지인이라며 둘러댔던 사람은 이영주다. 회귀 전 사건을 통해 그에게 우울증의 위험함을 알렸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 그 일은 쓰레기통에 던져야 할 기억이 됐네.’
“그런데 절 찾아오신 건 혹시 계약 때문인가요?”
“아니요. 한동안은 연기를 할 생각이 없어요.”
“물론 그러시겠죠. 다시 연기가 하고 싶어지면 그때 찾아오세요.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제가 내건 조건을 바꾸진 않겠습니다.”
재석은 그 말을 남기고 이영주를 돌려보냈다.
“언제 다시 복귀할지 알 수 없구나.”
재석은 그녀가 아예 이 바닥을 떠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 *
재석은 오랜만에 안준혁이 운영하고 있는 연기 학원에 갔다.
“대표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연기 학원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는지 확인 좀 하려고 왔습니다.”
“쓸 만한 인재가 그렇게 쉽게 나오겠습니까. 거기에 여기 학생들이야 아직 배우는 단계에 불과한데.”
“뭐, 상관없습니다.”
재석은 연습하는 학생들을 한 번 쭉 봤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학원에서 쓸 만한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없네.’
재석은 미래의 스타들을 찾기 위해 정말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쉽게 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제 이곳도 좀 유명해져서 한 번쯤은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텐데…….’
연기 학원에서 선생으로 일하고 있는 안준혁의 인지도가 상당히 오른 상태였다.
“흐음, 별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네요.”
“뭐, 그렇죠. 이번에 들어온 학생들 중 두드러지는 변화를 보이는 학생은 없으니까요.”
연기 선생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별로 기대치를 가진 학생이 없다는 거다.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세요.”
“예.”
그렇게 밖으로 나간 재석은 두리번거리고 있는 한 남학생을 발견했다.
“아, 여기 근처라고 했는데 어디지?”
곱슬머리를 한 학생이 뭔가를 찾는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학생, 뭘 찾나요?”
“네? 여기에 연기 학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길을 잃어버려서요.”
“그 학원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면, 저한테 이름 좀 알려 줄래요?”
재석은 그 남학생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기 위해 이름을 물었다.
“제 이름은 왜 물으시죠?”
“서로 알아 두면 좋을 거 같아서요. 제가 연기 학원과 관계있는 사람이라서요.”
재석의 말에 남학생의 표정이 밝아졌다. 재석을 연기 학원의 선생으로 생각한 거다.
“김조현입니다.”
“반가워요. 전재석입니다.”
재석은 그러면서 김조현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아…….”
김조현은 명함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엔터테인먼트 대표 명함이었기 때문이다.
“연기 학원 선생님이 아니시네요.”
“선생님은 아니지만, 연기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죠. 그리고 학원은 이 안으로 들어가서 4층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중에 관심 있으면 연락 줘요.”
“아, 예.”
하지만 김조현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창 시절에는 정말 내성적인 아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인 모양인데.’
김조현 달과 해, 은밀한 바보, 별에서 왔다 등 여러 히트작에 출연하며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다.
‘이 연기 학원에 다니려는 거 같으니 앞으로 종종 얼굴 좀 비춰야겠네.’
김조현은 아직 재석에게 관심이 없는 듯 보였지만, 앞으로 계속 마주친다면 점차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재석은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한 채 회사로 돌아왔다.
“오늘 학원에 다녀오더니 얼굴이 펴졌어. 무슨 좋은 일 있나 보네?”
“좋은 일은 아니고 오히려 아쉬운 사람을 한 명 만났습니다.”
“아쉬운 사람이면 캐스팅 제의를 거절당했구나.”
“예, 뭐.”
“요즘 일이 잘 안 되는 모양이네. 거절도 당하고.”
“뭐, 제가 모든 걸 다 성공하는 사람은 아니죠.”
“무슨 소리 하냐. 지금까지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너인데.”
“그건 운이 좋아서죠.”
재석은 지금껏 자신이 해 온 일이 스스로가 잘나서가 아니라, 많은 정보를 알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아이고, 그렇게 말하기에는 네가 번 돈이 어마 무시해.”
“그거야 도박에 성공해서죠.”
실제로는 다 알고 한 투자니 도박이라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둘러대는 게 다른 사람들이 납득하기 편했다.
“어찌 됐든 오늘은 피곤하네요.”
“그래도 할 일 많다.”
“예, 예. 알고 있습니다.”
재석은 곧장 회사 업무를 처리했고,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퇴근했다.
집에 돌아가자 민경이 그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오빠.”
“응.”
“나도 정신과 상담 한번 받을까?”
“정신 건강 확인하게?”
“응, 영주 언니 사건을 겪고 나서 나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 가자. 시간 내서 말이야.”
“내일 스케줄 많은데?”
“일이 건강보다 중요한 건 아니니까.”
“으으, 역시 오빠밖에 없어.”
민경은 재석의 품에 안겨서 행복감을 느꼈다.
“이제 드라마 다 끝났는데 뭐 할래?”
“잠깐 정도만 쉬어도 좋겠는데, 가능할까?”
재석은 이전에 민경에게 드라마와 영화 촬영이 끝나면 마음대로 쉬라고 했지만, 역시 민경은 성격상 그러지 못했다.
“그러면 일본 일정 끝내고 이틀 정도 온천 여행 갈래? 그 정도 여유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데.”
“좋아요. 오빠, 일본에 노천탕도 있다던데 같이할 수 있어요?”
“어,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가득한 것 같은데.”
“아, 아니거든!”
민경이 강한 부정을 했지만, 노천탕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재석도 머리에 음란마귀가 들어앉았다.
“근데 어쩌나, 난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생긴 것 같은데.”
“아니, 뭐…….”
민경은 여기서 딱히 싫다고 하지 않았다.
* * *
재석은 권진우의 남은 계약 기간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이야.’
재석은 민철을 불러 이야기를 했다.
“민철아.”
“예, 선배님.”
“권진우와 재계약 안 할 거다.”
최민철은 그 이야기를 듣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네 선택에 달렸다. 권진우를 따라갈지, 안 따라갈지. 참고로 내 개인적으로는 안 갔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걸 강요하진 않을게.”
재석은 분명한 뜻을 비치고 그에게 선택을 맡겼다. 어차피 개인의 선택까지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민철의 입에서는 놀라운 말이 나왔다.
“전 회사 안 떠날 겁니다.”
“권진우와 친하잖아.”
“어차피 형은 저 아니어도 새로운 매니저 구할 수 있어요. 다른 회사에 가도 괜찮은 대접을 받을 거고요.”
민철이 곧바로 대답을 해 줘서 재석은 고민이 없어졌다.
“권진우 씨에게도 말해. 그동안 함께해서 즐거웠다고. 그리고 다른 회사에 가서도 잘 지내라고.”
“예.”
재석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후에 민철은 권진우에게 재석이 한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권진우는 원래 떠날 생각을 하고 있어서 재계약을 하지 않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문제는 최민철의 선택이었다.
“나랑 같이 안 간다고?”
“예, 전 이 회사에 남을 거예요. 여기서 지내면서 더 경력을 쌓을래요. 거기에 저 승진했잖아요. 월급도 올랐어요.”
“민철아, 나랑 같이 나가면 다른 곳에서 돈 더 받게 해 줄게.”
“아니요. 저도 이 바닥에서 지낸 지 5년이에요. 매니저는 연예인과 달라요. 저를 이 정도 돈을 지불하면서 고용할 회사는 없어요.”
“아니야, 내가 해결할 수 있어.”
“그럼 알아보고 난 뒤에 이야기해 주세요. 지금 여기서 받는 월급보다 더 많이 준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을걸요.”
최민철은 바보가 아니다. 그 회사에도 매니저가 있는데 굳이 그 사람 놔두고 최민철을 고용한다는 건 절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더더욱 월급을 더 많이 준다는 것은.
“좋아, 내가 꼭 알아본다.”
재계약을 안 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라 권진우는 일정이 없는 날 직접 이런저런 회사와 접촉했다.
많은 이들이 권진우가 회사를 옮긴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지만, 최민철과 같이 가겠다는 말에 다들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혼자 오시죠. 매니저라면 저희 회사에 잉여 인력이 넘칩니다. 거기에 그쪽에서 팀장급이라면 월급을 상당히 줘야 할 텐데 저희는 그럴 자신은 없습니다.”
권진우는 원하지만 최민철을 원하지 않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