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89화 (89/152)

인사를 나눈 직후, 갑자기 송근석이 태양을 보며 말했다.

“매니저님, 저 태양빛을 받으니까 제 몸이 태양이 된 것처럼 뜨거워지고 있어요.”

“네?”

나왔다. 그 이상한 허세.

“안 느껴지세요? 태양의 힘을 받아 태양처럼 찬란해지는 느낌.”

“아…….”

민철은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송근석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말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폐기된 약품을 버리는 거였다.

“철수할 테니까 약품 다 폐기해.”

“폐기는 따로 절차에 따라…….”

“무슨 절차야? 그냥 하수구에 버려.”

“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이건 명령이야.”

“네…….”

지시를 받고 약품을 하수구에 버리는 남자는 바로 재석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탓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지만, 찌푸려진 미간을 통해 독한 약품을 버리고 있다는 것이 아주 잘 표현됐다.

“컷! 아주 좋아요.”

봉도준 감독은 재석의 연기가 생각보다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재석아, 표정을 좀 더 찡그려 볼래?”

“예, 형님.”

한 번 더 촬영을 진행한 뒤 봉도준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역시 잘해.”

몇 장면을 더 찍었지만, 재석의 연기는 표정이 아주 좋아서 얼굴만으로도 상황 전달이 완벽했다.

“OK!”

좋다는 결과를 받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재석은 이제 자신의 역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디 가?”

“이제 끝났으니까 가야죠.”

“아니, 안 끝났어?”

“네?”

봉도준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재석을 부려 먹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 써먹어서 제작비 얼마나 아낀다고 그럽니까.”

“어허, 단역 몇 번이면 회식비 나와.”

과장된 표현이긴 했지만, 그만큼 아끼는 건 사실이다.

봉도준은 그러지 않아도 돈 많이 들어간다며 이런저런 곳에서 티 나지 않게 돈을 아껴 먹기 시작했다.

반면 민경은 재석이 직접 단역을 소화하는 걸 보고 신기한 듯 바라봤다.

“오빠, 연기 잘한다.”

“아이고, 내가 연기 잘해 봐야 무슨 소용이라고.”

“뭐, 어때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거죠.”

민경은 재석이 바쁜 건 알지만,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건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차하면 사업 말고 다른 걸로 진출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난 배우가 적성에 안 맞는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하는데요.”

연기의 어색함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결국 얼굴을 가리며 나가는 단역 대부분은 재석이 맡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렇게 할 거면 돈을 줘요.”

“제작자가 돈 타령이라니.”

핀잔을 주는 감독이었다. 어떤 의미로 재석보다 더 짠돌이다.

재석은 촬영이 끝나고 잠시 따로 자리에 앉았다. 제작자라고 쓰여 있는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나오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사장님, 임민경 씨의 영화 결산 내역이 들어왔습니다.)

“얼마입니까?”

(16억 엔입니다.)

“세금 뺀 거죠?”

(예.)

“총이익은 얼마였죠?”

(38억 엔입니다. 그중 배급사가 사용한 마케팅 비용, 영화관에 들어간 비용 등 배급사 지분을 제외하고 순 이익이 16억 엔입니다.)

“좋네요. 일본 지사 일 년 운영비 계산해서 그거 제외하고 한국으로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수준의 액수였다.

하지만 재석은 그에 딱히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이제 더 많은 돈을 손에 쥘 거다.’

재석은 이제 민경 못지않은 부자가 됐다. 아니, 민경을 뛰어넘게 되었다. 아직 그 차이는 근소하지만, 이것도 금방이다.

웰컴 투 여막골은 이제 곧 촬영이 끝나고, 왕의 광대도 촬영이 절반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둘 다 개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군.’

여막골의 투자 수익은 80퍼센트, 왕의 남자는 100센트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제는 꼭 천만이 아니더라도 수익 나는 영화들은 투자해야 해.’

재석은 따로 영화 투자 전문 인력을 고용할까도 고민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내가 직접 하는 게 더 이득이지.’

회의야 매니저들과 함께하면서 서로 대박이 날 작품을 찾는 게 빨랐다.

늦은 시간 재석이 사무실에 돌아오자 주명진이 한마디 했다.

“재석아, 너 비서 좀 둬라.”

“갑자기 웬 비서입니까?”

“너 찾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우리가 그걸 다 챙겨 줄 수가 없어.”

“혹시 시나리오나 대본 봐 달라는 사람들이요?”

“그래. 특히 투자 좀 해 달라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야.”

“흐음.”

비서가 필요하긴 할 것 같았다.

“그럼 비서 한 명 고용하죠. 제 일정 관리도 해야 하니까.”

지금까지는 직접 했지만, 비서를 둔다면 해야 할 일에 순서가 정해질 거다.

“그럼 당장 고용해야지.”

당장 고용한다는 말에 재석의 비서 문제가 해결됐다. 미리 준비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주명진이 바로 이야기했다.

“내일부터 출근할 거야.”

“뭐가 그리 빨라요?”

“그럼 빨라야지. 사장의 비서야. 최소한 네가 하는 일을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우리도 편해.”

재석은 알았다는 말만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정말 다음 날 비서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일단 재석은 비서에게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부터 알려 줬다.

하지만 재석이 워낙 다양한 업무를 맡아서 진행하고 있던 터라 하루 만에 모두 숙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경은 회사에 비서가 왔다길래 찾아왔는데 웬 예쁜 여자가 바쁘게 뭔가를 하는 걸 보고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오빠, 갑자기 비서를 들여놨어?”

“주 팀장님이 들여놓으래.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고 비서를 통해 관리하라는데, 이제는 그렇게 해야지.”

“근데 예쁜 여자네.”

“너보다는 안 예뻐.”

재석의 말에 민경은 금세 기분이 풀어졌는지 재석의 품에 안겼다.

“비서랑 놀아나면 죽는다.”

“별걱정을 다 한다.”

재석은 비서와 놀아날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 물론 일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될 순 있지만, 거기까지다.

‘민경이가 먼저 고백 안 했다면 평생 서로 일적인 관계로만 남았겠지.’

비서가 생기고 다음 날, 재석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다.

어느 회사 사람들인지, 그리고 어떤 인물들이 연락을 했는지 비서가 다 연락을 받고 나서 재석이 순번을 정하기 시작했다.

“대다수는 영화 제작자들이야.”

재석에게 투자를 받거나 하려는 인간들이었다. 재석이 영화 몇 개에 투자를 했고, 그가 투자한 내 기억 속 지우개의 일본 수익이 엄청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려온 거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일을 진행했는데, 만나 볼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연말 연초에 개봉하는 영화들로만 이뤄졌다.

“저희 영화 시나리오입니다.”

“읽어 보고 연락드리죠.”

재석은 그 말만 남기고 그들을 돌려보냈다이 영화들 중 막대한 이익을 내는 영화는 별로 없다.

하지만 박스오피스 1, 2위를 하게 될 영화만으로도 나머지 모든 영화를 합친 것만큼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재석아, 쓸 만한 거 있냐?”

“있긴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수익을 내는 작품은 없네요. 그리고 돈 들어왔다고 이리저리 집어넣기도 그렇고요.”

“그럼 몇 개나 하려고?”

“잘해 봐야 세 개 정도 유지할까 합니다.”

“음.”

그 정도 수준만 해도 엄청난 거다. 영화를 저렴하게 찍어도 30억 수준인데, 그거 3개면 90억이 넘어간다.

거기에 요즘 영화 찍는 데 비용 상승이 되고 있다. 장비 가격과 배우들의 몸값, 스태프들의 인건비 등 이런 비용 상승은 무시하지 못할 요인이다.

“이야, 영화 세 개 면 돈 100억 단위네. 돈 좀 부어야 하는 영화라면 300억 그냥 날아가고.”

아무리 이익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런 액수는 부담이 안 갈 수가 없다.

“뭐,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회사가 가용할 수 있는 자금만을 운용할 거니까요.”

“아, 그리고 권진우 말이야. 다른 소속사랑 계약을 했는데, 조금 안 좋은 쪽으로 연결된 회사 같아.”

“어디 조폭이랑 연결된 건가요?”

“뭐, 비슷하지 않을까?”

“권진우 씨와 저희의 관계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에 대해 저희가 뭐라 말할 필요는 없죠.”

재석은 권진우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었다. 그리고 그의 정신적 미성숙함은 이런저런 일을 한번 겪어 봐야 나아질 터다.

‘조폭과 한 번 연류가 되긴 되지.’

의도치 않는 형태로 연결이 된다. 그걸로 그는 법적 공방에 휩쓸리고, 그러는 와중에 출연 드라마와 관련해서도 논란이 터진다.

‘민철이는 조금 걱정하겠지.’

친하게 지냈던 관계이니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을 거다.

얼마 후, 권진우는 뉴스에 나왔다. 조직 폭력배와 연관된 소속사에 들어간 게 문제가 터진 것이다.

재석은 뉴스가 터지자 조용히 민철을 불렀다.

“민철아, 뉴스 봤냐?”

“봤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니?”

“도와주시게요?”

“정확히 말하면 도와줄 마음은 없다. 민철이 네가 원하는 걸 해 주는 거다. 난 떠난 사람을 위해 뭔가 하지 않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원하는 걸 해 주지.”

“그렇다면 도와주지 마세요. 진우 형은 선배님 아니어도 돈도 있으니 변호사를 고용할 겁니다. 그리고 상대가 조직 폭력배라고 해도 이렇게 뉴스에 나오게 되면 어쩌지 못할 테니까요.”

그 말은 맞다. 지금 매스컴에서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 뭔가를 하는 건 어려울 거다.

“알았다, 민철아.”

“그래도 절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

“아니, 난 내 식구를 챙긴 거야.”

재석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을 나눴다.

‘권진우가 만약 다시 돌아오겠다고 해도 난 받아 주지 않을 거야.’

재석은 떠난 사람에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더 잘나가는 스타들은 널리고 널렸다.

권진우 관련해서 한참 언론이 시끄러울 때, 영화 괴수의 촬영이 절반 정도 끝났다. 배우들의 촬영분이 끝난 거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언론이 잠잠해지자 권진우는 법적 소송을 통해 소속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그리고 재석에게 연락을 취해 만나자는 제안을 했고, 재석은 그걸 받아들였다.

“사장님, 다시 회사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흐음.”

재석은 권진우의 대답에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다.

“굳이 제이이브를 찾을 필요는 없을 텐데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밖에 나오니 이전 회사가 좋은 회사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시 받아 주십시오.”

재석은 다시 받아 줄 수도 있지만, 그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서 받아 주긴 곤란해.’

“죄송하지만 어렵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됐는데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사장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이러고 말고는 없습니다. 저희 회사와는 이제 인연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회사 찾아가세요. 조건 좋은 곳 많은데 왜 과거에 집착하십니까.”

재석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권진우와 할 말이 없는 거였다.

권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재석의 회사에 더 이상 권진우가 들어올 자리는 없다.

그리고 그는 여기 아니어도 갈 곳 많은 사람이다. 미래를 봐도 꾸준히 이 바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고 말이다.

‘나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야.’

재석은 떠나간 사람보다 남아 있는 사람, 그리고 미래에 들어올 사람에게 신경 쓰기로 했다.

물론 그들 중 회사를 떠날 사람도 있겠지만, 떠나지 않을 사람도 있을 거다.

재석은 남는 사람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할 거다.

*  * *

민경과 재석은 함께 운동을 시작했다. 쉴 시간 없이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해외 일정 등을 소화하면서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다는 걸 몸소 체감하고 난 뒤 그걸 이겨 내기 위해 운동을 시작한 거다.

같은 건물에서 민경은 필라테스를, 재석은 헬스를 했다.

둘 다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 힘차게 시작했고, 재석의 목표는 권진우처럼 몸을 만드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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