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열고 들어가자 민경이 매서운 눈으로 재석을 바라보았다.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민경이 재석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주유랑 술 마시고 농구 좀 한판 했어.”
“아니, 술 마셨으면 곱게 집에 올 것이지, 지금이 몇 시인데 이제 들어와.”
“미안, 좀 늦었어.”
재석이 민경의 품에 슬며시 안기자 민경은 그걸 거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내가 화 풀릴 것 같아?”
“응.”
“…….”
민경은 별말을 못하고 재석을 살짝 흘겨봤다.
“봐줬다.”
결국 그렇게 민경은 화를 풀고는 곧바로 재석의 옷을 받아 들었다.
재석의 노력으로 주유는 걱정을 덜어 냈고, 결국 한류 스타가 되어 일본과 중국에서 인기를 끌게 된다.
하지만 그 사실 국내에선 그다지 이슈화되진 않는다.
이미 상당수의 스타들이 해외로 진출한 상황이었기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거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국외에서는 밀려드는 수많은 한류 스타들에 열광하고 있었다.
* * *
민경은 현재 국내 일정은 거의 없고, 국외 일정만 한가득 생겼다.
영화 촬영이 끝난 직후라서 좀 쉬어야 하지만, 쉬는 건 내년이다. 그 전까진 물들어올 때 노 저어야 했다.
민경은 쉴 틈 없이 중국과 일본,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순회를 계속했다. 아시아를 휩쓸며 아시아의 여신이 된 민경이었다.
“오빠, 이번에는 어디야?”
“인도.”
“멀리도 가네.”
그렇게 멀리 갔다 와도 실질적인 활동 무대는 한국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웰컴 투 여막골의 결과 보고가 있었는데, 그 수익률 80퍼센트에 도달했다.
“투자금 회수하고 얼마 번 겁니까?”
“60억입니다.”
직원의 보고에 재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막대한 돈을 집어넣고 그 결과가 굉장히 좋았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이런 올인성 투자를 망설이지만, 재석은 망설이지 않았다.
‘다음은 왕의 광대인가?’
김명진은 불멸의 장군이 끝나고 나서 한동안 휴식기를 가졌다. 거의 1년 가까이 한 작품에 매진한 상태라 그 작품에서 탈피를 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거기에 재석은 김명진을 직접 만나 심리 상담을 받아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심리 상담?”
“예. 혹시 이영주 씨 아시나요?”
“알지, 유명 여배우잖아. 최근에 우울증 때문에 쉬고 있고.”
“이영주 씨는 자신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여서 결국 우울증에 이르렀던 거거든요. 저는 그 일을 통해서 스트레스라는 게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흐음…….”
이 바닥에서 이영주가 현재 잠정적 은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장기간 휴식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형님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 스트레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난 지금 무척 멀쩡한데…….”
“만일을 위한 겁니다.”
“뭐, 나쁘지 않지.”
그렇게 김명진은 재석의 권유대로 심리 상담을 받았고, 정상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재석은 그제야 안심을 했다.
그는 몸 상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건 알게 됐지만, 당장 다른 작품을 시작하기보다는 한동안 불멸의 명장을 통해 얻은 인기를 이용하여 여러 광고 촬영을 진행했다.
일이 잘되어서 한동안 바쁘지만, 그는 지금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제 김명진은 드라마 쪽에는 문제가 없어. 나머지는 영화야.’
김명진의 가장 큰 약점은 영화였다.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닌데, 찍은 영화 중에서 대박을 터트린 건 없었다.
‘이건 운이 없었지.’
그래도 계속 찾아주니까 영화는 찍긴 찍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볼 생각이다. 그에게 맞는 성공할 만한 영화를 찾아줄 생각이다.
‘류태룡은 잘하고 있나?’
그는 회사와 계약한 이후로 단역부터 착실하게 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단역만이 아니라 CF 쪽으로도 메인은 아니지만, 보조로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니까 류태룡의 주머니도 나름 괜찮게 채워지고 있었다.
* * *
영화 괴수의 편집이 시작되자 전문 편집자들을 고용해 움직였다.
재석은 편집된 걸 보고 몇 차례 이런 식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다면서 주기적으로 의견을 제시했고, 편집자들은 그 의견을 반영해 편집해 나갔다.
이제 슬슬 배급사를 선정해 마케팅도 하고, 상영관을 잡아야 했다.
“봉 형님, 긴장되십니까?”
“긴장된다. 배급사랑 계약하는 거니까.”
두 사람이 찾아간 회사는 C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배급사 관계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이진수입니다. 그 유명한 감독님과 투자의 귀재인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투자의 귀재라니,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최근에 상영이 끝난 여막골에서 상당한 이익을 보신 걸로 압니다. 그 뒤에 나올 영화도 기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크흠, 전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서 거기에 투자를 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화까지 제작하신 거고요?
“물론입니다. 좋은 시나리오라서 이번엔 제가 직접 제작자로 나선 겁니다. 물론 봉 감독님 없었으면 힘들었을 거고요.”
봉도준 감독은 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감독이라는 직급은 있지만, 제작사와 배급사 간의 이야기에 끼어들 틈은 없다.
“그럼 저희들이 어떻게 해 드리면 될까요?”
배급사 관계자가 상당한 저자세를 보이자, 재석은 의문을 표했다.
‘내가 돈 좀 굴릴 줄 아니까 이것도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결국 배급사도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이니만큼 그렇게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태도였다.
“저희가 만든 영화입니다. 한번 보시고 결정해 주십시오.”
배급사에서도 어차피 내용물을 보고 상영관을 얼마나 잡아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연락드리죠.”
그리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서 배급사에서 연락이 왔고, 재석은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
(한국에서 이런 괴수 영화를 찍어서 어디 성공하겠습니까? 이거 상영관 300개 잡아도 많이 잡은 거겠네요.)
“아니, 뭐라고요?”
재석은 이 영화가 그런 상영관 숫자로 가면 안 되는 걸 알고 있다.
“당장 저 좀 보시죠.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재석은 차를 타고 바람처럼 배급사를 찾아가 관계자를 만났다.
“아니, 상영관 300개라뇨. 이게 말이 됩니까? 거기에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그걸로 끝이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하지만 괴수물 아닙니까. 그걸로는 한국에서 성공 못 합니다.”
배급사에서 곤란하다는 식으로 나오자, 재석은 초강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
‘성공할 영화를 여기서 무너트릴 수 없다.’
“그렇다면 배급사에서 원하는 게 뭡니까?”
“이 영화에 투자한 금액을 일부 드릴 테니, 저희도 끼워 주시죠.”
목적은 이거였다. 꽤 잘 만들어진 영화고, 투자의 귀재가 된 재석이 만든 영화라서 돈이 된다는 거다.
“콩고물 좀 먹겠다는 겁니까?”
“에헤, 콩고물이라뇨. 저희도 당당히 투자하고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이런 날도둑놈 새끼들.’
아마 투자금 대부분을 줄 거다. 재석에게 돈 냄새가 무척 많이 나니까.
‘그래, 내가 돈 냄새 많이 난다 이거지.’
돈을 잘 버니까 돈 좋아하는 이들이 그 돈 빨아먹으려고 들러붙는 거다.
“그럼 못하겠네요.”
“네?”
“이렇게 나오시면 전 다른 회사 찾아가야겠습니다.”
재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갑자기 그 직원이 재석을 붙잡았다.
“에헤, 대표님. 왜 이러십니까. 다 아는 사람들끼리……. 저희도 먹고살아야죠.”
“너무 날로 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갑자기 갑과 을이 바뀌었다.
“날로 먹다뇨. 투자금을 드리겠다는 건데.”
“이미 돈 다 들어갔는데 무슨 투자금입니까. 안 받습니다. 대신 마케팅에 들어갈 비용을 투자금으로 퉁 친다면 생각해 보죠.”
“아하하하, 역시 대표님이십니다.”
좋은 작품 앞에서는 갑과 을의 반전이 빠르다.
“하지만 상영관 600개를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년 6월로 잡아 달라는 겁니다. 아직 반년 더 남았습니다.”
봉도준 감독의 영화 괴수는 여름철 영화다. 배급사도 그걸 모를 리 없다.
“하아…… 뭐, 좋습니다. 서로 정확한 거래를 하는 게 좋기도 하고.”
“그리고 마케팅 비용 뻥튀기할 생각 마십시오. 저 그냥 딴 배급사 찾으러 가는 수가 있습니다.”
재석이 으름장을 놓자 직원은 할 말이 없었다.
‘상부에서 지시한 내용이 있는데 하나도 못 얻겠네.’
결국 결과는 재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좋은 작품을 다른 배급사에 빼앗기는 것보다 붙잡는 게 더 중요했다.
결국 배급사는 내년 6월, 상영관 600개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워낙 기간이 많이 남았기에 상영관 확보는 쉬웠고, 일정도 빨리 나왔다.
“하아, 힘들다.”
재석은 퇴근을 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왜, 무슨 일인데?”
“영화 배급사랑 한바탕 씨름하고 왔어.”
“배급사랑? 그쪽에서 뭐라는데.”
재석은 민경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고운 미간이 절로 찡그려져 있었다.
“그 사람들 너무하네. 오빠가 힘들게 만든 영화를 날로 먹으려고 들고.”
“그래서 나도 협박 좀 했지. 원하는 대로 안 해 주면 다른 배급사 찾아간다고.”
“잘했어, 오빠.”
민경은 항상 재석을 응원했고 믿었다.
“근데 오빠. 우리 또 언제 놀러가?”
요즘 재석이랑 함께 어디론가 가는 게 그렇게 좋은 모양이었다.
“음, 올 겨울은 지나야지.”
“아잉, 너무 멀어. 국내라도 좋으니 가고 싶어.”
“국내라…….”
갈 곳은 많지만, 사람들 시선 때문에 힘들다. 그나마 좋은 곳을 찾는다면 있긴 있다.
“겨울에 제주도 한번 가자. 겨울 등산 한번 하는 거지.”
“……등산?”
등산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그녀가 재석의 말에 등산을 하게 생겼다.
“힘든 거 싫은데…….”
“걱정 마. 그렇게 힘든 거 아니야. 좀 걷기는 하지만, 예쁜 광경 많이 보게 될 거야.”
“진짜지? 예쁜 거 못 보면 복수할 거야.”
“알았어.”
재석은 그렇게 민경을 달래고 집에서 편히 쉬었다.
* * *
재석은 제주도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최동훈 감독과 만났는데 혼자는 아니었다.
“감독님 옆에 분은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최만직입니다.”
“혹시, 은퇴한 타짜?”
“맞습니다.”
타짜라는 말에 재석은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드디어 영화 제작을 시작할 수 있겠구나.’
재석은 미소를 지으며 최만직과 악수를 나눴다.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죠.”
“그러죠.”
탁탁탁, 휙휙!
타짜의 손놀림은 그야말로 빨랐다. 예시로 한 번 보여 달라고 했을 뿐인데도 무서운 손놀림이었다.
“섯다로 하면 여기 장땡, 요기가 일땡.”
“예, 해 드리죠.”
재석과 감독이 타짜의 손을 제아무리 유심히 쳐다봐도 티가 나지 않았고, 어떻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화투패를 원하는 대로 가지고 놀았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걸 알 길이 없네요.”
“손은 눈보다 빠르죠.”
그는 한 번 씨익 웃었지만, 곧바로 씁쓸한 현실을 이야기했다.
“전 은퇴했지만, 이건 사기도박입니다. 다시는 벌어져선 안 될 일이죠.”
은퇴한 그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