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93화 (93/152)

“하지만 이 자리에 나오신 이유는 이 영화에 도움을 주고 싶으신 거겠죠.”

“물론입니다. 이걸 보고 사람들이 도박에 손을 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의도 하나는 명확하군요.”

참여 의도가 명확하니 이쪽에서 해 줘야 할 것도 명확했다.

“사기도박 장면은 자주 넣어 드리죠.”

원래 이 영화는 도박사들의 삶을 통해 도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보여 주는 영화였다.

“우선 도박 관련 일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일 같은 게 있으십니까?”

“하아, 좀 오래되긴 했는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은퇴한 타짜 최만직의 과거사를 들으면서 재석은 필기와 녹음을 동시에 진행했다. 감독 역시 필기를 하면서 서로 중요한 부분을 기록했다.

최만직과의 만남은 거의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그만큼 그가 도박 세계에서 겪은 험난한 이야기들은 끝도 없이 많았다.

“촬영을 시작하게 되면 그때 찾아뵙겠습니다.”

“며칠 동안 즐거웠습니다.”

재석과 감독은 이제 본격적인 각본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각본 작업이 완성되어 가자 미완성본을 가지고 배우 섭외에 들어갔다.

물론 재석과 최명훈 감독이 둘 다 같이 뛰어다니며 일을 진행했다.

최명훈 감독은 여배우 선정을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노출 신이 있는 탓이었다.

“대표님.”

“네.”

“혹시 이번 영화에 임민경 씨를 출연시킬 의향은 없으십니까?”

“흐음, 이 역할에 맞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민경이가 스타가 되긴 했지만, 노출신이 걸립니다. 아주 뇌쇄적인 느낌의 배우여야 하는데, 아쉽게도 민경은 그런 뇌쇄적인 느낌이 아니죠.”

“허허허, 좀 쉽게 가나 했는데 어려워지네요.”

“일단 연기 좀 되고 몸매 좋은 배우들의 리스트를 뽑아 보죠.”

재석의 마음속에는 이미 한 사람이 정해져 있었지만, 고심하는 척을 했다. 어찌 되었든 캐스팅 문제는 감독의 권한을 무시할 수 없다.

“흐음.”

여배우뿐만 아니라 남배우도 주연으로 누구를 섭외 할 것인지가 걸림돌이 되었다.

“감독님, 젊은 배우 중에서 고민되는 사람이 있나 보네요.”

“예, 남자 주인공 역할을 할 사람이 마땅히 보이지 않아요.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하는데, 처음에는 도박에 도 자도 모르는 인간이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하는 모습까지 보여 줘야 하거든요.”

“음…… 그럼 조승준 어떻습니까. 이전에 민경이와 호흡을 맞췄을 때 연기가 대단하더군요. 순박한 고등학생부터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악착같은 모습까지 꽤 다변화된 모습을 보여 줬거든요.”

“아!”

재석의 추천으로 도박꾼 남자 주인공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거기에 고혜수에게 시나리오가 전달되었다. 고혜수는 시나리오를 받자 바로 재석과 감독을 만나기 위해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왔구나.’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달려온 건 할 말이 있다는 거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긴 시간 이야기할 수도 있어.’

“안녕하십니까.”

“네.”

“자리에 앉으시죠.”

민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선배이자 급이 다른 여배우다.

“시나리오를 보고 왔는데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어요.”

“네.”

재석은 속으로는 긴장했지만, 겉으로는 무척이나 평온한 표정이었다. 절대 젊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표정이다.

“이 시나리오, 제가 꼭 벗어야 하나요?”

배드신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물론 필요에 의해 하는 거지만, 찍는 여배우 입장에서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기도 했다.

“중요한 신이죠. 남자 주인공을 몸으로 붙잡고 돈으로 유혹하며 수렁에 빠트려야 하니까요.”

“굉장히 잔인한 표현이네요.”

“예, 영화에서 마담이란 캐릭터는 잔인하죠. 모든 걸 무기로 이용하고 상대를 조종하죠. 그러면서 고고한 여인이 되어야 합니다. 참 쉽지 않은 역할이죠.”

“그럼 감독님도 같은 생각인가요?”

“맞습니다. 대표님과 함께 각본을 짰으니까요.”

“솔직히 캐릭터 구상을 보면서 이걸 맡으실 분이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고혜수 씨께서 거절하신다면 아마 영화를 엎어야 할 겁니다.”

재석이 이 역할을 맡을 사람이 고혜수 당신밖에 없다고 에둘러 말하자, 그녀는 얼굴에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좋아요, 이 영화 하죠.”

“감사합니다. 계약서는 소속사로 보내 드리죠.”

도박꾼의 준비가 순차적으로 진행되던 그때, 어느새 왕의 광대가 개봉되었고 폭풍의 눈이 되어 버렸다.

왕의 광대는 상영관마다 매진 행렬이 이어지면서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갔다.

재석은 이미 이 영화가 잘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나중에 정산 때나 관심을 보였다.

“흐음, 140억 들어왔네.”

아주 깔끔했다. 왕의 광대로 벌어들인 수익이 투자금의 100퍼센트를 넘긴 거다.

이 영화의 대박을 통해서 충무로에서는 재석이 마이더스 손으로 통하게 됐다.

그러지 않아도 돈 냄새 나는 인간인데 돈 잘 버는 인간이 되어서 관심 가지는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재석의 돈을 탐내는 인간들은 많지만, 재석은 그런 인간들의 군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오는 이들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익이 많이 나올수록 세금 문제는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하아, 이번 달 세금도 어마무시하네요.”

“많이 번 만큼 많이 나가는 거지.”

“뭐, 그렇긴 하죠.”

재석이 생각해도 개인이 버는 돈치고는 굉장한 수치의 액수를 벌어들이고 있는 거다.

수익이 들어오고 난 뒤에 세금 제하고 나면 상당히 줄어들지만, 그래도 막대한 이익을 챙긴 건 변하지 않았다.

재석은 막대한 수익이 생겼어도 영화 제작에 집중을 했다. 배우 캐스팅이 끝나면서 각자 일정 조율에 들어갔고, 크랭크인 날짜를 잡고 있었다.

“오빠, 진짜 돈 잘 번다.”

“너도 잘 벌잖아.”

“나야 오빠가 일 잡아 준 거 열심히 할 뿐이지만, 오빠는 알아서 찾아 돈 벌잖아.”

“사업하니까 알아서 찾아야지.”

재석은 사업을 하고 있으니 일을 찾아다녀야 했다. 멈추면 그대로 끝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발전시켜야 유지되는 게 사업이다.

“그럼 오빠는 이 회사 크게 키우고 나서 자식한테 물려줄 거야?”

“흐음, 어렵지 않을까? 이게 적성에 맞아야 해. 일단 기본은 매니저 일인데 이게 쉽지가 않아.”

“그럼 어떻게 하려고?”

“내 자식이 재능이 있다면 일을 맡기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난 회사를 처분하거나 아니면 주식회사 형태로 바꿀 거야. 그 뒤에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길 거야.”

“전문 경영인?”

민경에게는 생소한 단어지만, 재석에게는 익숙한 단어였다.

“이 바닥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전문가에게 사업 경영을 맡기고 난 일선에서 물러나는 거지.”

“벌어 놓은 돈 많다 이거지?”

“부정은 못 한다.”

이제 돈이 돈을 버는 상황에 직면한 상태라서 재석은 못할 것이 없었다.

“다음은 뭐 할 거야?”

“한동안 촬영 현장에 나가야겠지.”

“나도 구경 가면 안 돼?”

“구경 나와도 되는데, 다들 바쁜 상황에서 너 혼자 자리 지키는 건 어려울 텐데.”

“아이, 따라가기도 그러네.”

재석은 영화 도박꾼의 관계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가장 관심을 받는 인물은 다름 아닌 진짜 타자인 최만직이었다.

“진짜 타짜였습니까?”

“예, 과거에 그랬습니다.”

모두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서 재석이 나섰다.

“여기서 몇 가지 쇼를 보여 드리죠. 최만직 씨는 준비된 자리에 앉아 주세요.”

그곳에는 카메라가 자리 잡은 자리였다. 한쪽에는 큰 화면으로 모두가 볼 수 있게 해 줬고 말이다.

“최만직 씨 저랑 한 게임 하면서 타짜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세요.”

“그러죠.”

최만직은 아주 평범하게 화투패를 섞었고, 그 과정에서 패가 최만직이 원하는 대로 순서가 맞춰지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후 게임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재석이 어떠한 패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 여러분 아시겠죠. 이게 타짜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본인들이 찍어야 할 세상의 일부분을 본 겁니다.”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고, 이 영화가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와 고스톱이나 섯다를 하면서 직접 경험을 하고 나니 도박의 세계가 전혀 새롭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도 고스톱과 섯다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타짜의 기술을 배워야 하는 주연들은 한쪽에 모여 최만직의 개인 교습을 받았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원하는 패를 놓고 이런 식으로.”

최만직은 영화를 위해 보여 주긴 했지만, 그걸 따라 할 수 있는 배우는 없었다. 그냥 손안에 감추는 것까지는 어떻게 했지만, 그 이상이 안 됐다.

“생각보다 어렵네.”

아무리 연기를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해 줘야 하는데 이게 만만치가 않았다.

탁탁탁.

“타짜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네요.”

“동시에 위험한 직업입니다. 잘못 걸리면 칼 맞으니까요.”

최만직은 이 바닥이 무섭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도박 세계의 험난함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단어였다.

탁촤악! 스르륵.

재석은 한순간 손안에서 패가 마음대로 돌아가는 걸 느꼈다. 물론 어설펐지만 말이다.

“어, 된다.”

스스로가 깜짝 놀라서 한 말이지만, 순간 다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보여 주세요.”

“예.”

재석은 가르쳐 준 걸 했고, 티가 좀 나긴 했지만 처음 한 사람치고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대표님이 손재주가 있으시네요. 이거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저도 놀랐습니다.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이야, 다음부터 전 대표님이랑 고스톱이랑 섯다는 안 쳐야겠네.”

배우들과 감독이 재석과 게임 못하겠다면서 놀리자 재석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장난질 치다가 손모가지 날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하하하!”

“대표님, 연습 더 하셔서 나중에 대역으로 손 좀 내 보냅시다. 조승준 씨랑 손 비슷한데 딱 쓸 만하네.”

“대표님, 저도 연습은 하겠지만, 대표님처럼 재주는 없습니다.”

조승준의 말에 재석은 웃으며 화투패를 잡았다.

“틈틈이 연습하죠.”

오로지 영화를 위한 연습이지만, 정말 열심히 했다. 간혹 민경의 해외 스케줄이 있는 곳에 가도 한쪽에서 화투를 잡고 놓지를 않았다.

“오빠, 정말 타짜 할 거야?”

“아니, 대역으로 출연할 건데, 현실감 넘치려면 연습 많이 해야지.”

재석은 영화 도박꾼의 크랭크인에 들어갔을 때도 손에서 화투를 놓지 않았다.

“액션!”

재석은 손 대역으로 출연하던 와중, 감독은 도박장에 나가는 선생님 역을 해 보지 않겠느냐며 제안을 받았다.

그 말에 재석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얼굴 안 나가는 거야 별 부담이 없지만, 얼굴이 나가는 거는 부담되는데요.”

“뭐, 어때요. 한번 해 봐요. 대사도 다 알잖아요.”

알기야 안다. 같이 작업했으니까. 연기자들 지문에 어떻게 하면 된다는 내용까지 자세히 적었었는데 모를 리 있는가.

“하아, 10분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감독은 다른 장면을 먼저 찍으면서 재석을 기다렸다. 그렇게 10분 지나자 재석이 힘들게 한마디 했다.

“후우, 하죠. 하지만 딱 세 컷 해 보고 안 되면 사람 바꾸세요.”

“알았어요.”

감독은 여유롭게 대답하면서 재석에게 준비를 시켰다.

재석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손질하고, 메이크업도 적당히 받았다.

“사장이 연기 처음해서 어쩌누.”

연기계의 선생님으로 불리는 백운식이 농담조로 말했다. 그리 큰 기대 따윈 없다는 표정이었다.

재석은 그 기대가 없는 표정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차피 잘하든 못하든 세 컷만 찍으면 끝이잖아?’

재석은 갑자기 자신감이 생기면서 조금씩 톤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어어어, 어어.”

백운식은 재석이 발성 잡는 걸 보고 갑자기 시선이 달라졌다.

‘어라? 이것 봐라.’

단순한 제작사 사장이나 임민경의 매니저라고 생각하기에는 심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백 선생님 잠깐 상대 좀 해 주십쇼.”

“그러지.”

“한 800만 땡겨 주십쇼.”

“직업이 뭐이가?”

“선생이에요. 고등학교.”

“교육 공무원이니까니 특별히 천으로 해 주갔어. 근데 선생이 노름이나 하고 있으면 학생들은 뭘 배우갔어.”

“아니, 뭐……. 애들도 크면 다 알 텐데요, 뭐.”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걸 상대해 준 백운식이나 대사를 한 재석이나 연기력이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가벼운 연습이었지만, 백운식은 재석을 달리 봤다.

“거, 연기를 정식으로 배운 적 있어?”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습니다.”

“그래? 아주 재능이 있어 보이는데…….”

“어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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