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95화 (95/152)

“여기 좋지 않아?”

“좋긴 하지. 멋지고 예쁘고. 이것만 없었다면 말이야.”

민경은 손에 들린 대본이 원수 같았지만, 그래도 재석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에 열심히 도왔다.

그렇게 휴가를 가서도 끊임없이 대본 연습을 한 결과, 한국에 돌아온 민경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확실히 연기 잘하긴 하네.”

“진짜?”

“응, 원래 오빠 잘했는데 더 잘해진 느낌이랄까.”

“함께 있으면서 연습 많이 했으니까.”

재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그래도 새로운 걸 도전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영화 고향의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재석은 틈틈이 연습을 했고, 동시에 화려한 휴일의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

유인명과 함께 제작을 하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게 움직였다. 그 덕분에 준비가 정말 빨리 끝났다.

“전 사장님 덕분에 정말 일이 빨리 끝났습니다. 촬영을 곧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봄철에 찍어야 할 텐데요.”

“봄철이 아니어도 미리 찍을 수 있는 장면이 몇 개 있습니다. 그거부터 찍고, 봄철에 다시 다른 장면을 찍으면 여유롭게 갈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간다면 정말 여유롭게 가는 거다.

“오랜만에 사람들 확인을 좀 해야겠어.”

재석은 회사에 소속된 배우들의 기록들을 살펴봤다. 그러다가 송근석이 새로운 드라마에 캐스팅되었음을 알았다.

‘아, 이 드라마가 첫 성인 역이었지.’

문자영과 마찬가지로 첫 성인 역에 도전해서 당당히 배역을 따낸 거였다.

재석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최민철을 불렀다.

“선배, 송근석의 주변 반응이 안 좋습니다.”

“안 좋아?”

“예. 이전에 출연했던 시트콤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연기도 못하는 인간이 하지연의 상대역이라면서 드라마를 망친다는 반응입니다.”

“방송 쪽 사람들도 그래?”

“약간의 우려 섞인 말들이 좀 나옵니다. 뭔가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 다른 배우로 교체될 거 같습니다.”

재석은 이 이야기를 듣고 뭔가 선수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필 이럴 때 그러다니.”

“송근석은 주변에서 안 좋은 시선이 느껴지는지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더 심각하다. 그 송근석이 의기소침한 상태라는 게 말이다.

“흐음. 민철아, 너도 권진우 이후로 새로운 담당 연예인은 처음이지?”

“예.”

“너한테도 변화를 줘야 할 때가 왔다. 단순히 직급이 올랐다고 해서 매니저가 된 게 아니야. 매니저는 사람을 만드는 거야. 네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아직 어린 송근석의 미래가 결정될 거야.”

재석의 말에 민철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

“한 사람의 미래가 저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어요.”

“그냥 네가 올바르다 생각하는 걸 잘 알려 줘. 매니저가 배우의 부모는 아니지만, 마치 부모가 된 느낌으로 옆에서 돕는 거야.”

재석은 민철에게 모든 걸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짜 매니저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어쩔 때는 부모처럼, 어쩔 때는 친구처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다.

*  * *

송근석은 열심히 연기 연습을 했지만, 무언가 힘이 안 느껴졌다.

“형, 힘들어요. 좀 쉬었다 해요.”

“그래.”

민철은 의기소침해진 송근석에게 어떻게 응원을 해 줘야 할지 걱정이었다.

‘선배가 나에게 맡겼으니 내가 해결해야 한다.’

민철은 조심스럽게 근석에게 말을 걸었다.

“근석아, 너 처음 시작이 모델이었지?”

“예, 어린이 모델이요. 그때부터 돈을 벌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저희 집이 원체 가난했거든요.”

“그랬어?”

“예, 엄마하고 외할머니, 저 이렇게 셋이 살았거든요.”

“아버지는?”

“이혼하셨어요. 엄마가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데도 아버지란 인간은 한 번도 찾아오질 않았죠.”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난 좀 달라. 무척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어.”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은 서로 속을 터놓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형이랑 저랑 비슷하네요.”

“그래, 서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는 거. 그리고 난 꼭 돈 벌어서 고생한 엄마한테 효도할 거야.”

“저도요. 엄마한테 효도하고 싶어요. 하지만 연기가 잘 안 되니까 짜증이 나요.”

“거기에 사람들 반응도 그렇지?”

“예.”

인터넷에는 왜 이런 인간을 캐스팅했냐며 부정적인 의견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연예인도 결국은 사람인지라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너 짜증 난다고 했지.”

“예, 많이요. 정말 짜증 나요. 왜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욕하는 거죠. 제가 시트콤에서 보여 준 모습 그거 하나 때문에?”

송근석은 분노했다. 참을 수 없었다. 남들보다 힘들게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근석아, 너 정말 화나지? 복수하고 싶지?”

“예! 복수하고 싶어요. 그리고 외치고 싶어요. 나 송근석, 직업 배우라고.”

“그럼 일어서!”

송근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최민철이 한마디 했다.

“사람들의 비난에 당당히 복수하고 싶으면 연기 연습을 계속하는 거야.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거, 내가 할 수 있는 거 다 하는 거야. 그리고 보여 주는 거야. 나 이만큼 노력했다. 나 이만큼 할 수 있다!”

민철의 말에 근석은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보여 주고 싶었다. 모든 걸 다 걸고 보여 줘서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스스로가 궁금해졌다.

“저 다 할게요. 연기 선생님을 찾아가서든, 사장님을 찾아가서든 할 수 있는 거 다 해 볼게요.”

“나도 있는 힘껏 도와줄게.”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자 분위기는 불타올랐다. 그리고 송근석은 다시 연습을 했고, 민철은 그걸 도왔다.

다음 날이 되자 민철은 적극적으로 재석에게 조언을 구했다.

재석은 알았다면서 민철에게 도움을 줬다. 바로 캐릭터에 대한 연구 방법에 대해서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지금 이 상황에 캐릭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이해하는 걸 알려 줬다.

그래야 대본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에 알려 준 것이다.

민철은 다시 대본을 확인하면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했는지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송근석은 연기 선생님을 만나고 와서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근접한 답을 찾아갔다.

며칠 뒤, 송근석을 데리고 대본 리딩을 다녀온 민철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민철아, 좋은 일 있냐?”

“예, 오늘 감독님에게 칭찬을 받고 왔습니다.”

“어떤 칭찬.”

“연기가 아주 적절하다고요.”

상황에 맞는 연기를 펼쳤다는 건 정말 좋은 징조다. 그만큼 몰입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송근석은 한 고비를 넘겼어.’

나이가 어린 송근석이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는 아직도 아주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이걸로 큰 고비를 넘겼다 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송근석은 연기를 하는 데 있어서 자세가 바뀌었을 것이다.

‘남은 건 그 미친 허세만 좀 조절하면 되는데…….’

재석이 걱정하는 건 그거다. 그놈의 별거 아닌 허세 때문에 팬도 많지만, 안티도 많았다.

“그래, 그거 단속할 수 있으면 한번 해 보자.”

재석은 아직 그 허세가 드러나기 전이라 민철에게 단속을 좀 시킬까 했다.

재석은 조용히 민철을 불러 타일렀다.

“민철아, 혹시 근석이 이상한 행동을 하면 좀 말려라. 가령 해변에 누워 있으니 내 몸이 타오르고 있어요, 라면서 이상한 사진과 함께 글을 올린다든지 말이야.”

“아…… 그런 건 이미 하고 있는데요?”

“뭐?”

“어둠 속에서 절 보면 뭔가 어둠의 정령을 보는 것 같지 않아요, 라든지…….”

재석은 골머리가 아파 왔다.

“그거 절대로 막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거 인터넷에 못 올리게 해.”

“아,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이건 허세가 아니야. 환자야, 중2병 환자!’

그게 표출되면 송근석은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았다.

“반드시 막아라. 그런 말 계속하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아.”

“예, 선배. 말은 해 둘게요. 근데 계속 저러면 몇 년 뒤에 사람들 사이에 알음알음 알려질 텐데…….”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일단 최대한 막는 거야.”

민철의 표정은 딱히 자신이 없어 보였다. 지금 당장이야 어떻게 막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그리고 시간 나면 상담 받아. 송근석의 정신적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정신과 상담을 말이야.”

“예.”

재석이 그렇게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비서가 보고서 하나를 들고 왔다.

“이게 뭐죠?”

“사내 운동회 계획서입니다.”

“운동회?”

친목을 다지자는 의미에서 운동회를 진행하자는 거였지만, 모두 모이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

“각자 스케줄 때문에 바쁜데 이 일정을 어떻게 다 뺄지…….”

“그래서 일단 시기는 여유를 두고 계획할 생각입니다. 사장님께서 결재만 해 주신다면 일정을 조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뭐, 합시다. 한 번쯤 다 같이 모이는 자리가 있어서 나쁠 거 없겠죠.”

아마 다 모이게 되면 숫자가 좀 될 거다.

재석이 보고서에 서명을 하고 통과가 되자, 이제 그 일정에 맞추기 위해 각자 조정에 나서기 시작했다.

다들 바쁘게 일하는 이들이라 그 일정 맞추는 게 쉽지가 않았다.

송근석이 출연한 드라마 기생이 첫 방영하는 날, 하지연의 상대역으로 활약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처음에는 비난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그게 첫 회에만 그럴 뿐 그런 반응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오히려 연기 잘하는 하지연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어우러지는 연기를 펼치는 것에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 많아졌다.

*  * *

재석과 민경은 집에서 둘이 TV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오빠는 소속사 배우들이 연기를 못할까 봐 걱정한 적 없어?”

“걱정 안 해. 주 팀장님이 아주 철저하게 매니저들을 가르치니까. 내가 그 팀장님 밑에서 큰 사람이야.”

“지금은 직급 역전인데.”

“직급 역전이면 뭐해. 주 팀장님은 내가 평생 함께할 사업 파트너야. 사업을 준비할 때 함께하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재석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고, 가장 고마운 사람이다.

“그럼 난?”

“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지.”

재석은 살짝 닭살 돋는 멘트를 날렸지만, 민경은 그게 좋은지 배시시 웃으며 기분 좋음에 몸부림쳤다.

“어떤 의미로?”

“사업적으로나 연인으로나. 너 없었으면 난 아마 평생 혼자였을 거야. 그리고 사업도 성공 못했겠지.”

“아니야, 오빠는 나 없었어도 크게 성공했을 거야.”

“말이라도 고맙다.”

하지만 재석은 민경이 아니었다면 정말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재석은 화려한 휴일의 대본을 점검하는 도중, 제작자 유인명과 이야기를 나눴다.

“광주 항쟁의 비극을 표현하는데, 너무 영화적 관점으로만 본 건 아닌지 우려됩니다.”

“하지만 너무 고증만 치우치면 그건 영화가 아니라 다큐입니다.”

“아무리 허구라지만 그래도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꼭 고증을 재검토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제작비가 또 상승합니다.”

“상관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부분이라면 제작비 상승은 괜찮습니다.”

“…….”

돈 문제에 있어서 괜찮다는 말에 유인명은 고심을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관련 자료와 전문가들을 모아 확인 작업을 한 번 더 거치도록 하죠.”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라고 해서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만 보여 주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재석은 이 영화만큼은 허구를 최소화하고 싶었다.

그 탓에 일정이 살짝 미루어졌고, 그사이에 배우 캐스팅을 진행했다. 다행히도 회귀 전에 참여했던 이들이 고스란히 제의를 받아들이며 순조롭게 흘러갔다.

이윽고 화려한 휴일의 촬영이 시작됐지만, 재석은 더 이상 그곳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민경과 함께 캐스팅이 되었던 영화 고향의 대본 리딩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본 리딩의 첫 대사는 민경이었다.

“예? 예?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아까 밀양 5킬로라는 표지판을 보긴 했는데요…….”

민경의 대사는 정말 현실감이 넘쳤다. 새파랗게 젊은 처녀가 아줌마처럼 톤을 바꾸고 연기하고 있었다. 거기에 표정 또한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준아, 여기가 아빠 고향이야. 아빠가 항상 입버릇처럼 돌아가서 살고 싶다고 했던 밀양.”

아빠 고향이라는 대사에서 무척이나 쓸쓸함이 느껴졌다.

“으음.”

감독은 민경의 대사를 들으면서 과장됨 없이 전달되는 연기에 꽤 만족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재석의 순서가 찾아왔다.

“끙끙, 밀양에 처음이십니까?”

다음 신이 넘어가자 재석의 첫 대사가 시작되었다.

“행님, 종찬입니다. 어딘교? 제가 일 때문에 손님이랑 함께 있는데 손님이 밀양에 집을 구한다카네요.”

누가 들어도 자연스러운 사투리 연기였다.

감독은 재석의 대사를 들으면 들을수록 흡입력이 있음을 느꼈다.

대본 리딩이 끝나자 연신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생각 이상으로 재석과 민경의 연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이야, 캐스팅을 할 때도 괜찮다고 느끼긴 했는데, 그때와도 전혀 다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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