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에 재석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 주는지도 설명해 주자, 재석에 대해 잘 몰랐던 민경의 어머니는 생각이 싹 바뀌었다.
“민경아, 너 저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마음 같아서는 하고 싶은데 오빠 마음이 조금 걸려.”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닌지 걱정인 민경이었다.
“그럼 너 입 다물고 내 옆에 있어. 근데 그 사람 집은 어디야?”
“그게…… 옆집인데.”
“뭐, 옆집?”
다시 한번 충격을 받은 민경의 어머니였다.
결국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이년이 미쳤구나, 미쳤어.”
“아, 처음에 그런 뜻으로 이사 온 거 아니었어.”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머니는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기회가 됐을 때 잡아야 해.’
지금 딸이 인기 절정이라 상관없지만, 어떤 여자도 그 미모가 시들시들해지면 인기도 시들시들해진다는 걸 세상살이로 알고 있었다.
젊고, 잘나가는 사업가와 만날 기회가 다시 오리란 보장은 없었다. 비록 한 짓이 괘씸하긴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너 앞장서.”
민경의 어머니는 민경을 앞세워 재석의 집으로 들이닥쳤고,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자리하고 있던 재석은 다시 민경의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자네, 하나 묻겠네.”
“예.”
“우리 민경이 책임질 건가?”
“책임지겠습니다.”
“뭘로 그걸 증명할 건가?”
“증명이라 하시면……?”
“내 딸 지금 잘나가는 스타지만, 언제까지 잘나간다 보장할 수 없지. 더 젊고 예쁜 애들이 나올 테니 나이 든 내 딸은 밀리는 거고, 그때 버림받으면 내 딸만 상처받는 셈이네.”
재석은 민경의 어머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게 되었다.
“전 절대 민경이를 버리지 않을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 목숨을 걸고 대답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재석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민경의 어머니는 순간 움찔거렸다.
‘어머나, 세상에. 심지 굳은 것 좀 봐. 확실히 성공한 사업가라 그런지 마음가짐부터 다르네.’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전 지금껏 한 번 내뱉은 말을 어겨 본 적이 없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더더욱 그래야 했고, 약속한 일을 이행하기 위해 전력투구해 왔습니다.”
“그럼 확실하게 미래도 책임지는 건가?”
“물론입니다, 어머님!”
확신이 담겨 있는 말투에 민경의 어머니는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우리 딸 서른 넘기기 전에 결혼해 줬으면 하는데…….”
재석은 서른이라는 부분에서 걱정이었다.
‘민경이는 서른이 되어도 잘 벌 텐데······.’
굳이 그때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데, 서둘러 결혼을 했다간 회사의 입장에선 금전적 손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은퇴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일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하긴, 민경이나 나나 당장 일을 그만둬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지.’
“이 약속 못 지키면 후회할 줄 알게.”
물론 재석에게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민경의 어머니가 걱정하고 있는 것과 달리, 설령 시간이 흘러 민경이 늙고 인기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재석은 자신의 마음이 변치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오히려 민경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그였다.
“그럼 오늘 저녁에 같이 밥이라도 먹지.”
“예, 어머니.”
민경의 어머니는 재석이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자 입가가 살짝 씰룩거렸다. 무게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툭!
민경이 엄마를 살짝 건드리면서 자리를 벗어나자는 신호를 보내자, 두 사람은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하아, 갔네.”
하지만 30분 정도 지나자 민경이 다시 찾아왔다.
“오빠.”
“왜 왔어? 엄마랑 더 같이 있지.”
“엄마 잔소리 때문에 도망쳐 왔어.”
“바로 옆이면 쫓아올 거 아냐.”
“걱정 마. 안 쫓아와. 그리고 오빠, 나랑 꼭 결혼한다는 약속 말이야…….”
“걱정 마라. 약속은 지킨다.”
민경은 굳이 그 약속 안 지켜도 된다고 말하려 했는데 재석이 먼저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른 전에 결혼하게 되면 손해는 감수해야 될 거야.”
“손해?”
“너는 서른이 넘어도 인기가 좋고, 일거리가 많이 들어올 거야. 결혼을 하게 된다고 은퇴해야 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일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오빠, 난 괜찮아. 이미 돈은 충분히 벌었는걸. 난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거지, 돈에 얽매여 살고 싶진 않아.”
민경은 지금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좋아, 네가 그렇다면 사람을 찾아 놔야겠네.”
“무슨 사람?”
“만약 네가 일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회사에 돈을 많이 벌어다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일과 행복을 다 가지려면.”
그 말에 민경이 폴짝 뛰어 재석에게 안겼다.
“우웅, 우리 영감님 너무 사랑스러워.”
“그놈의 영감님.”
“어머, 오빠, 내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 볼래요?”
민경은 그러면서 재석의 이름을 보여 줬다.
-우리 영감님♡-
핸드폰 저장된 이름도 영감님이었다.
‘그놈의 영감님에서 벗어날 수가 없네.’
저녁이 되자 재석은 민경의 집으로 갔고, 그곳에는 아주 멋지게 한상이 차려져 있었다.
“차린 건 없지만 들게.”
“아니, 이게 차린 게 없다뇨. 상다리 부러지게 생겼는데요.”
“젊은 사람이 잘 먹고 힘내서 일해야지.”
“하하하, 감사합니다.”
재석은 넉살 좋게 음식을 먹었다. 그러자 민경의 어머니는 표정은 한결 부드러졌다.
그는 민경의 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마음을 아는지 민경의 어머니는 점점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이날 밤, 민경이 몰래 재석에게 가려 했지만 엄마한테 덜미가 잡혀 가진 못했다.
“이것아, 그렇게 좋아?”
“응, 너무 좋아.”
“그래도 오늘은 안 된다.”
“알았어.”
결국 민경은 어디 가지 못하고 조용히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민경은 엄마가 집에 있는 동안 재석의 품에 제대로 안겨 보지도 못했다.
“엄마 때문에.”
혼자만 삭일 뿐이었다. 그래도 얼굴을 못 보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자, 민경은 재석의 품에 안겨서 그간 갈구했던 재석의 애정을 마음껏 받아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그 뒤에 광고 촬영에서도 그녀의 행복함이 온몸으로 표출이 되어서 그런지 촬영을 하는 포토그래퍼가 주문을 했다.
“좀 더 섹시하게 남자를 유혹한다는 표정으로.”
이미 잡은 물고기를 한 번 더 잡는다는 느낌으로 사진을 찍자 꽤 특이한 느낌이 나왔다.
“좋습니다. 다른 각도로 한 번 더 가죠.”
다른 촬영에서도 민경의 행복감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플러스적인 요인으로 적용되었다.
한참 민경이 일을 하고 있을 때 재석의 핸드폰으로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화려한 휴일 관객 수 손익 분기점 돌파.
하지만 이익은 투자 대비 60퍼센트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수십억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했었기에 그 이익이 적진 않았다.
“어차피 큰돈 바라고 한 건 아니니까.”
재석은 투자금이 회수되자 또 다른 투자할 만한 작품을 찾았고, 바로 그때 한 감독이 그를 찾아와 자신 있게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허 화백님의 영화?”
“대표님, 이 영화를 위해 투자해 주십시오. 이미 검증된 흥행 원작 아니겠습니까.”
“숙수라…….”
도박꾼의 원작자 허 화백님의 또 다른 작품이었다. 스토리는 탄탄했기에 각본과 각색에 집중한다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영화였다.
“그럽시다. 합시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허 화백의 또 다른 작품인 숙수라는 영화를 찍게 되었다. 이미 준비된 팀이 있었기에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촬영 장소와 이런저런 것들을 준비했고, 캐스팅도 감독이 직접 나서서 발로 뛰어다니며 처리했다.
관계자들은 재석이 투자한 영화라며 많은 기대를 했지만, 재석은 전적으로 감독에게 일을 위임한 후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건 큰돈 들어가는 영화는 아니니까. 내가 진짜 노리는 건 내년인데…….’
그 전에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재석이 고민에 잠긴 채 TV를 보고 있는데, 내시를 주제로 한 사극이 방송되고 있었다.
“흐음.”
스토리가 이리저리 꼬여 있는 드라마였다.
재석이 내용에 실망하며 채널을 바꾸려던 그때,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재석은 당장 전화기를 들고 주명진에게 걸었다.
“주 이사님, 내일 당장 사람 하나 찾아야겠습니다. 그쪽에 확인 좀 하려고요.”
(아, 밤중에 전화질이야. 내일 이야기해도 되잖아.)
“지금 당장 필요하거든요.”
(아, 귀찮게 하네. 누군데?)
“내시를 주제로 한 사극에 출연한 어린 여자 배우입니다. 아역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았어. 내일 알려 줄게)
재석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차지하고 싶었다. 미래에 돈을 많이 벌어다 줄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름 반보영. 현재 소속사는 없고, 부모가 직접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음.”
다음 날 곧바로 올라온 주명진의 보고를 들은 재석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아직 계약되어 있지 않단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좋아.”
재석이 웃자 최민철이 물었다.
“선배, 어떤 배우인데 그렇게 웃어요?”
“미래에 보석이 될 만한 배우지.”
재석은 곧장 반보영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취했고, 약속한 날에 반보영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반보영은 재석을 보자 예의 바르게 고개 숙여 인사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알아보니 굉장히 잘나가는 연기자가 많은 회사더군요.”
“예, 저희 회사에 성공한 스타들이 많은 편이죠.”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저희 딸도 그렇게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만든 것이기도 하고요. 어느 분야에서 성공하길 원하십니까? 드라마? 영화?”
재석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반보영의 어머니는 조금 당황스러워했다. 좋은 계약 조건을 이끌어 내기 위해 기선을 제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영화죠.”
“그럼 더 쉽습니다. 2년 안에 스타로 만들어 드리죠. 만약 실패한다면 곧바로 계약을 파기해 드리겠습니다.”
재석이 더 당당하게 말하자 반보영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그렇게 자신 있으세요?”
“임민경을 지금의 스타로 만든 사람이 접니다. 지금은 회사를 떠났지만, 권진우 역시 제가 만들었습니다.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커피왕자의 주유를 만든 것도 저죠. 시간은 걸리겠지만 전 반드시 저와 계약한 연예인을 스타로 만듭니다.”
허황된 말은 아니었다. 재석은 실제로 여러 연예인을 스타로 키워 냈고, 지금의 회사를 만들어 냈으니까.
재석의 너무나 확신에 찬 태도에, 반보영의 어머니는 잠시 망설이고는 말했다.
“답은 내일 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고민해 보고 연락 주십시오.”
반보영과 그녀의 어머니가 자리를 떠난 뒤 재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바로 계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자리에서 바로 계약하진 못했지만, 재석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단지 결과가 미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남네, 남아.”
생각보다 미팅이 일찍 끝난 터라 시간이 비자, 재석은 창밖을 바라보며 뭘 할지 고민에 빠졌다. 창밖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또 걸어 볼까?”
반보영 모녀를 만난 장소는 대학가였다. 많은 학생들이 다니는 길이라 그런지 젊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좋은 사람 없나?”
미래의 스타를 사냥하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놈의 욕심이 멈출 생각을 안 하는 재석이었다.
그는 대학로를 지나다니며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어떤 이는 연예인을 해도 될 정도로 예쁘거나 멋졌지만 느낌이 부족했다.
“될 정도지, 연예인 해도 되는 얼굴은 아니야.”
정말 그 한 끗 차이는 미묘했지만, 그 차이가 연예계에서는 엄청난 차이였다.
그렇게 홀로 평가를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재석의 눈에 들어왔다.
“오, 괜찮은 얼굴인데.”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인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봐야겠어.’
재석은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조금씩 다가갔지만, 인파가 엄청났다. 가까워지기는커녕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