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101화 (101/152)

편지를 쓰면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성을 느꼈다.

재석은 그렇게 손 편지까지 써서 포장한 후에 직접 직원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기까지 했다.

“음? 재석아, 이게 뭐냐?”

“선물이요.”

“고맙다.”

주명진의 대답은 간단했다. 워낙 가깝게 지내는 사이이다 보니 평범했다.

하지만 민철은 조금 놀랐다. 지금껏 선물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배, 이런 것도 할 줄 아세요?”

“문득 생각나서.”

“고마워요.”

그 외에 다른 직원들도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심지어 선물 안에 정성스레 쓴 손 편지까지 있자 다들 놀란 토끼 눈을 떴다.

그리고 재석이 쓴 편지를 읽은 직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모두 답례를 했다.

재석은 그 답례에 모두 화답해 줬다.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건넨 이들에겐 가벼운 포옹을 해 줬고, 마찬가지로 손 편지를 써 온 이에게는 또다시 편지로 답장을 건넸다.

“사장님이 참 감성적이네.”

“그러게요.”

“신기해요. 사장과 직원이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회사는 들어 본 적도 없거든요.”

재석은 그 한 번으로 이벤트를 끝내지 않았다. 이후에도 직원들뿐만 아니라, 배우들에게도 손 편지를 보냈다.

그에 남자와 여자들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랐다.

여자들은 작은 선물로 답례를 하거나 마찬가지로 편지로 답장했고, 남자들은 술자리를 만들어 재석과 술잔을 기울였다.

“오빠, 다음에는 이거 하지 마라.”

“왜.”

“그 편지 때문에 오빠랑 같이 있을 시간이 없어. 오빠 찾는 사람들 때문에.”

민경은 재석을 직원들에게 뺏긴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편지 이야기를 꺼낸 것이 자신이었기에 참고 있다가 결국 이야기를 꺼낸 거다.

“질투해?”

“응, 질투해.”

대놓고 질투한다면서 말했지만, 표정은 질투가 아니라 투정이다. 놀아 줄 시간 빼앗긴 어린이처럼 말이다.

“이리 와. 안아 줄게.”

“뭐, 그런다고 내가 풀릴 줄 알아?”

하지만 투덜대면서도 다가오는 게 민경이다. 그녀는 재석에 품에 안기면서 뭔가 진정이 됐는지 가만히 있었다.

*  * *

재석은 모니터링을 하면서 반보영의 연기가 날로 좋아지는 걸 느꼈다.

“아주 그냥 독특하네.”

그녀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었고, 그걸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고 있었다.

“민경아, 쟤 연기 잘하지?”

“응, 아주 좋은데. 우리 소속 배우지?”

“맞아. 연기가 좋아서 가까운 시일 내에 영화 한 편 찍어야겠어. 좋은 거 있으면.”

“에이, 그렇게 쉽게 좋은 시나리오가 나오겠어요.”

“없으면 말고.”

말이야 없으면 말고지만, 재석에게 영화 찍자고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오는 감독은 하나둘이 아니다.

게다가 봉도준 감독이 아직 휴직 상태이긴 하지만, 멀지 않은 시기에 새로운 시나리오를 작성해 찾아올 터다.

재석이 별다른 걱정 없는 모습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그때였다.

“오빠, 저거 봐! 눈 내려!”

“눈?”

이제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눈이었다.

“이제 많이 춥겠네.”

재석은 당분간 자기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운동을 하여 체력을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재석이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2008년 최고의 히트작 시나리오가 재석의 손에 들어온 거다.

‘아직 해도 안 바뀌었는데 벌써 들어오네.’

촬영은 여름에 시작하지만, 돈이 있어야 준비를 시작할 수 있으니 감독들은 예정된 촬영일보다 한참 이른 시기에 투자처와 제작사를 돌아다녀야 했다.

“빠르다, 빨라.”

재석은 내용을 한 쓰윽 보고 미소 지었다.

“과속삼대.”

강형진 감독이 내년 겨울에 상영시키는 히트작이었다.

“아직 1년이나 남았는데.”

하지만 지금부터 꾸준히 준비해서 배우들을 섭외해야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어이고, 힘들다.”

재석은 시나리오를 들고 비서를 불렀다.

“이 시나리오 들고 찾아온 강형진 감독과 내일 약속 잡아요.”

“네, 사장님.”

약속 잡기 무섭게 강형진 감독은 지금 당장 달려 올 수 있다고 연락했고, 재석은 오라고 했다.

강형진 감독은 바람처럼 달려와서 재석에게 감사의 인사부터 했다.

“감사합니다. 제 영화를 선택해 주셔서.”

“뭘요. 시나리오가 좋아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배우나 이런 것들을 준비하시려면 시간이 좀 빠듯하실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넉넉합니다. 이미 사전에 준비를 다 했습니다.”

사전 준비를 끝냈다는 말은, 어디서 촬영을 할 건지 조사가 끝났다는 거였다.

‘준비가 철저한데.’

“하지만 아직 시나리오 상태라 대본부터 완성해야 합니다.”

“절반 정도는 완성한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부족합니다.”

“그럼 완성은 나중에 한다고 치고, 계약부터 좀 해야겠는데요.”

재석은 이 영화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사람들 반응은 망하지 않을까 걱정부터 했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저예산인 터라 부담이 적었기에 그리 큰 걱정은 아니었다.

“일단 앉아서 계약 이야기 좀 진득하게 나누고, 계약서 작성부터 하죠.”

“예, 알겠습니다.”

분명 감독이 재석보다 나이가 많은데, 분위기는 재석이 어른이고 감독이 어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작중 성인 배우들보다 이거 아역을 구하는 게 일인 것 같은데요.”

“그건 공개 오디션을 좀 해야 할 겁니다.”

엄마들의 치맛바람 좀 날리는 오디션 현장이 될 것 같았다.

‘그 꼬마를 찾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극성인 엄마들 상대하는 건 싫은데 말이야.’

하지만 어린 아역을 출연시키려면 부모를 꼭 만날 수밖에 없다. 미성년자의 출연에는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니 말이다.

“대본 제작하면서 공개 아역 오디션을 진행해야겠네요. 혹시 나이 제한 있나요?”

재석이 묻자, 감독은 한 손을 다 폈다.

“5세 전후의 똘똘한 소년이면 좋습니다.”

“만 5세?”

“아니요. 한국 나이로 5세입니다.”

“준비하도록 하죠.”

재석은 감독과 함께 과속삼대에 출연시킬 주연 배우 섭외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이 일단 여주인공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하자, 그에 재석이 말했다.

“제가 여주인공으로 적절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혹시 임민경 씨를 이야기하시는 건 아니시죠?”

“에이, 감독님. 영화 컨셉이 있는데, 현직 고등학생이나 이제 막 20살이 된 연기자를 뽑아야죠.”

“대표님 소속사에 적당한 배우가 있나 보군요.”

“예.”

“안 됩니다.”

“갑자기 안 된다뇨.”

감독은 거부 의사를 표시했고, 재석은 그에 당황스러웠다.

“대표님이 안목은 인정합니다. 지금껏 많은 신인들을 띄우셨죠. 그리고 이번에도 신인을 이 영화에 출연시키자고 하시려는 거 아닙니까?”

감독은 재석의 생각을 완벽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저는 실력이 검증된 배우를 뽑고 싶습니다.”

이 영화에서 여배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더더욱 실력이 검증된 배우를 찾고자 했다.

“그러면 오디션을 통해 뽑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좋습니다.”

과속삼대의 여주인공을 뽑는 오디션이 진행된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곧 오디션이 진행됐다.

심사에 재석은 참여하지 않았고, 오로지 감독 혼자만 관여했다.

‘어차피 반보영이 된다.’

하지만 재석은 염려하지 않았다. 반보영의 연기력은 이미 상당했고, 이번 영화에 딱 맞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15번 참가자 들어오세요.”

반보영이었다. 감독은 반보영의 얼굴을 보더니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캐릭터에 맞는 얼굴이었다.

“시작하세요.”

반보영이 준비한 건 자유 연기였다. 약간의 흥얼거림이 있는 아빠와 함께 데이트를 즐기는 딸이었다.

느낌은 평상시처럼 하는 연기였지만, 감독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감독은 보영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게 했다. 몇 개를 더 보면서 다른 것도 시켰다.

“노래도 좀 합니까?”

“그렇게 잘하진 못합니다.”

“그래도 한번 해 보세요.”

“네.”

반보영은 노래를 했고, 이번에는 상큼하게 했다. 딱 그 나이에 맞는 모습이었고, 감독의 눈에는 더 없이 좋아 보였다.

“잘 봤습니다.”

반보영 뒤로도 몇 사람이 더 오디션에 참가했지만, 결국에는 다 떨어졌다. 반보영만큼 괜찮은 인물이 없었다.

그리고 감독은 반보영을 뽑고 나서야 그녀가 재석이 처음에 추천하려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독님, 제가 능력 없는 사람 추천하진 않습니다.”

“끄응! 이번에는 졌습니다.”

“그럼 여배우도 뽑았고, 남은 건 남주인공하고 아역입니다. 어떤 배우를 선택하실 겁니까?”

“이번에 오디션을 해 보니 괜찮더군요. 아역도 오디션으로 뽑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판을 좀 키워서 전국 오디션으로 하죠.”

이 부분에서는 재석과 감독의 뜻이 일치했다.

정말 똘똘한 아이를 찾아야 했기에 서울에 한정되어선 쉽지 않았다. 전국을 돌며 사람을 찾아야 했다.

아역을 뽑는 오디션이 진행한다는 사실을 인터넷과 전단지를 통해 알리자, 엄마들이 아이를 이끌고 함께 오디션장에 찾아왔다.

재석과 감독은 치맛바람이 무섭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어떻게 준비를 한 건지는 몰라도, 아이들이 하나같이 무서울 정도의 지식을 쌓고 있었다.

벌써 한글을 깨우친 아이부터, 노래를 잘하는 아이 등 기타 여러 장기를 지닌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허허, 대단하네.”

아이들이 하나 같이 총기가 흘러넘쳤지만, 재석이 원하는 건 총기가 아니라 감성이었다. 연기는 감성을 요구하는 직업이었으니까.

“흐음.”

그렇게 서울 지역 오디션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재석이 원했던 아이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죠?”

“왕동현입니다.”

또박또박 말을 하는 게 의사 전달이 확실했다.

“동현이는 뭘 잘해요?”

“따라 하기요.”

자기가 뭘 잘하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답변하는 수준 역시 좋았다.

“그럼 아저씨가 하는 얼굴 따라 할 수 있어요?”

“네.”

재석은 몇 가지 표정을 보여 주자 그걸 바로 따라 했다. 다른 아이들은 따라 하는 게 어설펐는데 동현은 얼굴 표정이 상당히 풍부했다.

“잘 봤어요. 엄마랑 같이 나가 보세요.”

“안녕히 계세요.”

동현이 나가자 재석은 감독에게 물었다.

“괜찮은 아이 같은데 어떠십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발음이 좋아서 대사 전달력이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이 따라 하라는 표정 역시 잘 따라 하고, 어린아이라고 보기에는 대단합니다.”

“우선 다른 아이들도 다 보고 결정하죠.”

재석과 감독은 오디션을 끝까지 진행했지만, 참가한 아이들 모두 각기 자랑할 만한 장기를 가졌고 총기가 넘치는 아이들이라 정말 고민이 많이 됐다.

“대표님,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요? 다들 총기 넘치는 아이들뿐이라 걱정입니다.”

“전 그때 왕동현이란 아이가 좋아 보이더군요. 발음이 정확하고, 흉내 잘하고, 아이가 그 정도 능력이라면 연기가 될 겁니다. 성인 연기자들이 이렇게 따라 해 봐, 저렇게 해 봐 지시만 해도 진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흐음. 하지만 다른 장면이 걱정되는데요.”

“혹시 아이의 재능을 보이는 장면이라면, 대역을 쓰면 됩니다. 오디션 보러온 아이들 중 굉장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 많지 않았습니까?”

“대역…….”

연령대가 비슷한 아이들만 참가한 오디션이었고, 하나같이 뛰어난 애들이었기에 쓸 만한 대역은 넘쳐났다.

“그럼 상황에 따라 필요할 경우 대역을 구하도록 하죠.”

재석은 감독와 하나씩 상의하면서 상황을 맞춰 갔다. 이제 남은 건 이 상황을 잘 컨트롤해 줄 남자 배우다.

*  * *

재석은 시나리오를 보낸 배우의 답을 기다렸는데, 그 배우가 거절을 했다.

‘차인혁이 거절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원래 이걸 받아들이는 걸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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