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석은 참 곤란해하고 있을 때 민경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피디님이 나한테 직접 섭외 전화 걸어왔는데.)
“직접?”
일반적으로 다른 회사들 경우에는 직접 연예인에게 섭외 전화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제이이브에서는 재석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진행되는 일은 없었다.
“어딘데 날 거치지 않고 직접 해?”
살짝 짜증이 날려다가 민경의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드라마 ON이라는데.)
“아니, 그 드라마는…… 나한테도 섭외가 왔는데…….”
살짝 기운 빠지는 목소리로 재석이 이야기하자, 민경이 전화기 너머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한번 같이할까?)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째잖아.”
(영감님이 별걸 다 따져요. 그냥 한 다, 안 한다 결정만 하면 될 걸.)
“솔직히 두렵다.”
(난 스릴 넘치는데. 진짜 사귀는데, 드라마에서도 러브라인이잖아.)민경은 뭔가 짜릿한지 목소리 너머로 상당히 흥분되어 있었다.
“민경아, 진정하고 내 말 잘 들어.”
(오빠, 같이하자. 이런 기회 흔치 않잖아.)
“작년에도 했는데 굳이 이걸…….”
(거기서는 역할이 다르잖아. 여기는 우리 둘이 직접 연결되는 거고.)어찌 보면 드라마 시작 전부터 연기 몰입도 최고의 작품이다.
“아이고야.”
재석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오빠가 한다고 하면 나도 할 거야.)민경은 그래도 최종 결정을 재석에게 넘겼다. 이 드라마는 둘이 함께해야 의미가 있는 드라마였다.
“후우, 피디랑 작가랑 한번 이야기 좀 나눠 보고 결정하자.”
(그럼 나도 같이 나갈래.)
민경은 재석의 결정을 현장에서 듣고 싶었다. 너무 흥미진진해서 그녀가 더 난리를 치고 있다는 건 감출 수 없는 비밀이었다.
재석이 피디와 작가에게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좀 듣자고 연락을 하자 다음 날 약속이 잡혔다.
피디, 작가, 소속사 사장, 톱스타가 우연치 않게 한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다.
“어머, 제가 쓴 대본처럼 모여 있어서 정말 신기해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 느낌이 다른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김은미 작가님.”
“어머, 실제로 뵈니까 더 멋지시네요.”
“가, 감사합니다.”
립서비스를 확실히 날리는 이 김은미 작가는 지금도, 미래에도 꽤 잘나가는 작가다. 이번 드라마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야, 말로만 듣던 연예계의 신화를 쓰고 있는 대표님을 직접 만나 뵙다니 영광입니다.”
“제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하시네요.”
“금칠이라뇨. 진짜인데.”
“맞아요. 회사 차려서 10년도 안 됐는데 이렇게 성공한 기획사는 아마 한국에선 유일할걸요.”
김은미 작가는 나름 소문을 들었는지 재석의 성공신화에 대해 늘어놓았다.
“거기에 민경 씨랑 함께 시작하셨다면서요. 그렇게 시작해서 같이 일하고 한류스타가 되고, 아시아에서 민경 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잖아요.”
“그건 여기 옆에 있는 민경이와 함께한 겁니다. 혼자였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죠. 거기에 저와 함께한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죠.”
재석은 꽤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 나갔다. 민경 역시 그 말에 적당히 호응을 했다.
“그런데, 저희 쪽 출연 제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피디가 참지 못하고 재석에게 물었다.
“고민이 많습니다. 제의를 하신 걸 보면, 현재 이런 상황에 가장 맞는 연기가 가능할 것 같아 절 섭외하신 것 같습니다.”
“예, 가장 적합하게 모델이 될 수 있는 분이 직접 연기도 해 보시면 어떨까 해서요. 거기에 민경 씨랑 함께 작품도 한 번 하셨고요.”
“그건…… 솔직히 의도하지 않은 거였습니다.”
“작년에 출연했던 이야기는 제가 할게요.”
민경이 끼어들어 대신 이야기했다.
“그때 당시에도 오빠가 연기를 가르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이었거든요. 제 연기를 많이 도와준 연기 선생님 같은 분이죠.”
“오호, 그런 비화가 있었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럼 더더욱 출연해 주십시오. 이번만입니다. 딱 한 번만 도와주시면 다음 드라마 캐스팅의 최고 우선순위로 제이이브를 넣겠습니다.”
최고 우선순위라는 말에 재석은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스케줄만 된다면 제가 원하는 드라마에 사람을 집어넣어 주시겠다는 겁니까?”
“약속드립니다. 이건 방송사에서 기획한 드라마입니다. 거기에 저 입김 셉니다.”
방송사 직원의 말이니 어느 정도 되긴 하겠지만, 최우선 순위라는 게 말이 그렇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것참…….”
“구미가 당기시죠?”
S방송사에서만큼은 나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거다.
‘한번 해 볼까?’
순간 고민이 됐다.
그렇지 않아도 고생하고 있는 배우 몇몇 있다. 그들이 성공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더 빨리 더 확실하게 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럼 이다음 드라마에 출연을 시키고 싶은 배우가 있습니다. 그것도 두 명입니다.”
“누구입니까? 프로필을 주시면 제가 확실히 일을 처리하죠.”
재석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드라마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피디는 그걸 보고 재석의 손을 꼭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재석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대본을 보자, 그의 눈앞에 있는 민경이 말했다.
“오빠, 어때요?”
“문제가 하나 있다.”
“무슨 문제요?”
“너 대본 끝까지 안 봤지?”
민경은 고개를 저었다.
“다 봤죠.”
“이거 못 봤어? 너 노래 불러야 해.”
노래라는 말에 민경은 말 그대로 멘붕에 빠졌다.
“어, 어디요?”
“여기.”
재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에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빠, 저 노래 못 불러요.”
“알지. 그런데 이미 계약서 사인했잖아.”
“아, 분명히 다 살펴봤는데…….”
민경은 전체적인 맥락만 파악하고 세세한 부분까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거였다.
“오, 오빠, 이거 어떻게 해. 나 자신 없어.”
민경은 카메라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에 굉장한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빠가 말해서 대본 바꾸면 안 될까? 별로 중요한 장면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이 노래해도 되고.”
“음, 스타가 노래 안 부르면 누가 부를까? 사장, 피디, 작가 셋이 남는데 사장은 나야, 메인이 아니지. 매니저 겸 대표니까. 피디와 작가는 이미지상 노래보다 다른 거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만능인 모습이 아니라.”
“……오빠, 살려 줘.”
“이야기는 해 보겠지만, 받아 줄지 의문이네. 그렇다고 계약을 파기했다가는 손해는 둘째 치고, 피디가 약속했던 드라마 캐스팅 우선권이 날아가게 되니…….”
“아아아!”
민경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재석은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하면서 약속받은 드라마 캐스팅 우선권으로 회사 내에서 가장 일거리가 없는 두 사람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민경도 그러한 재석의 생각을 알고 있었기에 계약을 파기하겠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오빠, 노래 선생님 좀 붙여 줘.”
“어이구, 그러니까 잘 좀 보고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지.”
“에휴.”
민경은 결국 다음 날 보컬 트레이너를 만나 노래 연습을 했는데, 그 트레이너가 처음 한 말이 민경을 더욱 힘들게 했다.
“자신 있는 노래 한번 불러 보세요. 그걸 듣고 무엇이 부족한지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저, 그냥 기초 연습부터 하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기초 연습부터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드라마 촬영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걸로 아는데, 속성으로 배워야죠.”
“으으으.”
민경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울 때 눈감으면 더 잘 보이는 그런 사람♬”
트레이너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음정, 박자 어느 것 하나 안 맞았다.
‘세상이 참 공평하네. 예쁜 얼굴을 주셨지만, 노래 재능은 단 하나도 없네.’
그나마 음정, 박자는 어떻게 맞춰 나갈 수 있다. 하지만 타고난 목소리는 어떻게 바꿀 수 없다.
민경은 노래를 끝내고 나서 아주 창피한 듯 얼굴을 감추고 의자에 앉아 얼굴을 감췄다.
“음, 뭐 잘할 거란 기대는 전혀 안 했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도 기대 안 할 거고요. 그래도 박자 정도는 맞춰 주실 줄 알았는데 제 기대가 너무 높았네요.”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없습니다. 이제 창피할 시간도 없습니다. 교정 들어갑니다.”
트레이너는 민경을 붙잡고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속성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낼 때 너무 성대를 혹사시킵니다. 그리고 저 멀리 던진다는 느낌으로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 이렇게 해 보세요.”
민경은 트레이너가 하라는 대로 정말 충실히 따라 했다.
그랬더니 소리가 좀 달라졌다.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 어머나!”
“어때요? 좀 괜찮죠.”
“네, 괜찮네요.”
“그럼 절 전적으로 믿을 수 있으시죠.”
“네, 믿겠습니다.”
민경이 그렇게 노래 연습에 몰두하는 사이 드라마 준비가 끝나고 어느새 대본 리딩날이 되었다.
재석과 민경이 나란히 대본을 들고 들어오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대표님, 이제 연기자로 전업하시는 겁니까?”
“딱 이번만입니다. 다음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합니다.”
재석은 못을 박듯이 하는 말에 사람들은 키득대며 웃었다. 어차피 한 번 발을 들여놓았으니 한동안 섭외 전화에 시달릴 거다.
“에이, 그래도 고향에서 하는 연기를 봤는데 꽤 수준급이시던데요.”
“그건 아주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이번에는 아니고요?”
“이건 더 특수합니다. 나중에 소문내 주세요. 제이이브 대표는 더 이상 민망해서 연기 못하겠다고 말이죠.”
“푸하하하! 아니, 그런 연기를 보여 놓고 민망하다뇨. 다른 사람들은 다 죽어야 합니까?”
모여 있는 사람들은 재석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를 내던지며 개그를 해 버린 꼴이지만, 진심이었다.
‘아아, 이런 반응을 원했던 건 아닌데.’
잠시 후 대본 리딩이 시작하자 다들 진지한 분위기가 되었다.
거기에 재석도 진지하게 임했다. 리딩에서 보여 준 연기는 다들 몰입도가 높았다. 다들 방송가에 관련된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들 나름 전문가들이라는 거네.’
피디의 모습, 작가의 모습, 기획사 사장의 모습 등 다들 보고 경험한 이들이라서 그런지 연기 감정선은 아주 정확했다.
“그럼 촬영 날 뵙겠습니다.”
그렇게 편하게 헤어지면서 재석은 민경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오빠는 회사 가려고?”
“가서 일해야지. 드라마 출연을 하는 건 하는 거고, 회사 대표로서 해야 할 일이 많거든.”
“응, 다녀와. 집에서 기다릴게.”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게.”
“알았어.”
재석은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는 눈앞에 있는 결재 서류들의 내용과 각종 드라마 진행 영화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일이 끝나고 나서 집에 돌아오자 민경은 재석을 붙잡고 반쯤 매달리다시피 했다.
“흐응, 너무 오래 기다렸어용.”
재석이 없는 사이에 민경의 혀가 반토박이 났다.
재석은 그녀를 가만히 안아 주며 다독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빠, 이번 촬영에도 계속 같이 다닐 수 있으려나?”
이전에 고향을 찍을 때는 둘이 거의 같이 다녔다. 주인공 두 사람이 안 나오는 장면이 적기도 했었다.
“이번에는 따로 다니는 일이 더 많을 수 있어.”
“그래도 오빠가 매니저니까 따라오는 거지?”
“회사 일 때문에 단독 신이면 어려울 거야.”
“아, 그건 좀…….”
그렇지 않아도 민경에게 새로운 로드 매니저가 붙은 상황이다. 메인은 재석이지만, 그가 갈 수 없을 때는 로드 매니저가 고생을 하고 있다.
“아, 점점 오빠랑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싫어진다.”
민경은 그 시간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가벼운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드라마 첫 촬영이 시작되는 날이 다가왔다.
***
카메라가 돌아가자 민경이 무섭게 외쳤다.
“뭐라고요? 공동 수상?”
“수상 안 해?”
“아니, 어떻게 그 여자랑 공동 수상을 해요. 전 싫어요.”
민경이 거칠게 자리에 일어나서 가 버리는 패악질을 하자 그걸 말리기 위해 매니저가 달려갔지만, 이미 민경은 저 멀리 가고 난 뒤였다.
시상식장에서는 민경이 사라졌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이미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민경은 지하 주차장에 있는 피디를 보자마자 뺨부터 후려갈겼다.
짝!
“감히 날 속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