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석은 배우들의 프로필을 들고 직접 감독을 찾아갔다.
“안녕하십니까.”
“제이이브에서 오셨네요.”
“그렇습니다. 이번 단편극 정글에 출연시키고자 하는 배우들입니다.”
재석이 조심스럽게 프로필을 보여 주자 감독은 그걸 한 번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한 회사에서 두 사람을 밀어 넣으려고요?”
“못할 것도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독님이 직접 보시고 결정하실 문제 아닙니까.”
“그래도 다른 회사에도 기회를 줘야죠.”
“제가 뭐 그 사람들 앞길을 막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이번 단편극에 서로 다른 역을 주셔도 됩니다. 한번 보시고 결정하시죠.”
재석은 살살 감독을 달래면서 조용히 에너지 드링크를 내밀었다.
“이거 하나 드시면서 기분 푸세요.”
재석의 트레이드마크의 등장에 감독은 살짝 헛기침을 하며 그걸 마셨다.
‘먹었으니 일단은 얼굴은 봐 준다는 거지?’
그 자리에서 안 먹었으면 조금 걱정이었는데, 먹었다는 건 최소한 얼굴은 보겠다는 거다.
“제가 내일 두 사람을 데리고 올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직접요?”
“그럼요. 중요한 자리인데 직접 움직여야죠. 시간과 장소만 말씀 주십시오. 그럼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재석이 다 알아서 한다며 나서자 감독도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럼 내일 여기로 오후에 오세요. 어느 때라도 상관없습니다.”
“아이고,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죠.”
재석은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면서 조용히 물러났다.
이튿날, 김조현과 반보영은 그날 서로 얼굴을 처음 보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두 사람은 서로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에 재석이 직접 운전하는 차량에 탔다.
“사장님이 직접 운전하십니까?”
“오늘은 특별히요.”
둘 다 매니저가 있지만, 아직까진 두 사람이 일거리가 그리 많지 않아서 다른 배우 로드를 해 줘야 하는 상황이 많았다.
“차량 두 대 움직일 것 없이 한 번에 가면 편하니까. 둘 다 대본은 숙지했지?”
“예, 사장님.”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대답했고, 재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저희들 배역은 뭔가요?”
“이번에 결정지으러 갈 거야. 그러니까 확실히 보여 줘야 해. 너희 둘을 주인공으로 만들 거니까.”
재석은 아직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두 사람의 매니저 역할을 하자, 마치 민경과 처음 일하던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아, 그래. 이 기분이야.’
민경을 처음 만나 그녀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 발로 뛰어다녔던 그 느낌 말이다.
“흐흐.”
절로 미소가 흘러나오며 재석은 차를 운전했다.
감독이 있는 사무실에 도착하자, 김조현과 반보영은 감독에게 인사를 꾸벅했다.
“김조현입니다.”
“반보영입니다.”
“크흠.”
감독은 두 사람 얼굴을 한 번 보더니 김조현은 나름 괜찮게 봤지만, 반보영의 얼굴을 보고는 썩 달가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감독님, 일단 가볍게 연기부터 테스트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재석은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의 연기를 선보이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야 감독이 평을 할 거다.
“그럼 한번 보죠. 둘 다 대본은 봤지?”
“예, 감독님.”
“그럼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 대사 하나씩 해 봐.”
그 말에 누가 먼저 나서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재석이 입을 열었다.
“조현이가 먼저 해 봐.”
“예.”
김조현이 먼저 숙지한 대본에 있는 연기를 펼쳤다. 그러자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 배우로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라 여겼다.
이제 반보영의 차례가 되었다.
“이거 다 엄마, 아빠 욕심 때문에 하는 거잖아. 난 싫어. 숨 막혀 죽을 것 같다고.”
한 박자 쉬고 반보영은 혼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에 눈물 연기까지 스트레이트로 펼치자 감독의 표정이 바뀌었다.
한순간에 감정을 잡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
“오호.”
감독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반보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러지 않아도 배역에 대한 걱정이 많았는데, 참 속 시원하게 해 주시네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절대 감독님들을 실망시켜 드리진 않죠.”
“좋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주인공 배역을 드리죠.”
“감사합니다. 그럼 일 이야기도 끝났으니, 나가서 저희끼리 어떻습니까?”
재석이 술잔을 터는 손짓을 하자 감독은 조심스럽게 OK 사인을 보냈다.
‘이걸로 한 건 해결이군.’
드라마 정글의 촬영은 미리 섭외해 둔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이거 원 아주 단막극이라 촬영 일정이 살인적이네.”
원래 드라마 일정이 빡빡한 편이긴 한데, 드라마 정글은 다른 드라마와 비교해도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아침에 시작된 촬영이 저녁 9시에 끝나면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더 길어지기도 했다.
촬영이 길어지자, 재석은 자연스레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동안 두 사람을 계속 따라다녀 볼까.’
재석은 두 사람이 유명해지기 전에는 어땠는지 개인적인 호기심이 있었다.
일정은 살펴보니 아직 영화가 촬영을 시작하지 않아서인지 회사 일도 별로 없고, 한동안 여유가 있을 듯했다.
‘민경이가 이해를 해 줄지 모르겠네. 미리 말해 놔야겠다.
그날 재석이 김조현과 반보영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민경이 되물었다.
“오빠, 그럼 우리가 도와주기로 한 다른 두 사람은?”
“도중기와 류태룡 씨는 이미 출연이 확정돼서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래? 류태룡 씨가 많이 좋아하셨겠네. 일거리가 생겨서.”
“그렇지. 그동안 많이 힘들었으니까.”
류태룡은 재석이 일거리를 물어다 주자, 직접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했었다.
“근데 그 두 신인을 밀어주려고?”
“밀어준다기보다는 당분간 어떤지 살피는 정도지.”
“뭐, 그런 거라면야…… 여행은 문제없는 거야?”
“당연하지. 어디로 가고 싶어?”
재석과 민경은 일정에 여유가 있을 때 함께 여행을 가기 위해 여행지를 고르던 중이었다.
“타히티.”
“휴양지네.”
“너무 멋진 섬이라고 소문이 나서.”
“거기 좀 비싼데.”
남태평양에 위치한 타히티 섬은 프랑스 땅이다. 비행기를 타도 16시간을 가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서 일주일 만요.”
“알았다.”
“오빠, 고마워요.”
민경에게 해 주지 못할 건 없다. 거기에 혼자 쉬는 것도 아니고 함께 죽치고 쉬는 거다.
* * *
재석은 같은 단막극에 출연하는 김조현과 반보영을 함께 태워서 움직이고 있었다.
“둘이 서로 이야기 좀 나눠 봐. 당분간 계속 얼굴 보고 지내야 할 텐데.”
김조현과 반보영은 두 사람 다 낯을 가리는지 저번에 한 번 얼굴을 마주쳤음에도 아직은 서먹한 모습이었다.
“그게 아직은 좀…….”
“뭐, 친하게 지내라고는 말 안 할게. 하지만 둘 다 주인공이야. 서로 얼굴 붉히는 관계는 되지 마라.”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됐고.”
어차피 둘은 잘 지낼 거다. 이 바닥에서 계속 일하는 한, 앞으로 자주 얼굴을 마주치게 될 테니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점차 친해질 거다.
김조현과 반보영은 도착하기 무섭게 사전 준비를 하면서 대본을 보았다. 첫 촬영이니만큼 긴장감이 엿보였다.
그때 감독도 뭔가 열심히 생각을 하는지 대본을 보고 있었다.
“태평하네.”
신인인 두 사람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반면, 감독은 태평한 모습이었다. 겨우 단막극 따위는 후다닥 처리할 수 있다는 여유가 엿보였다.
하지만 그 여유는 촬영이 시작되고 몇 시간이 지나며 와르르 무너졌다.
“이번에는 좀 더 약하게 해 보죠.”
촬영이 시작되고 3시간 동안, 감독은 한 장면을 계속해서 리테이크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감독은 배우들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요구를 반복했다.
재석은 매니저로 살아온 세월만 수십 년이다. 이런저런 감독들을 만나 왔고, 이제는 한 번만 일하는 걸 봐도 척하면 척이다.
그는 저 감독이 제대로 된 인물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봤다.
하지만 무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촬영장에서 감독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존재니까.
‘일단 지켜보자.’
배우들의 불만도 점점 쌓여 갔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이럴 때면 베테랑 배우가 따지고 들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배우들 중 그럴 수 있는 배우는 없었다.
‘다들 인지도 부족한 연기자들뿐.’
힘없는 이들은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감독이 별짓을 다하며 한 장면을 찍고 난 뒤에는 더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장면에서 좀 더 말을 서사적으로 했으면 하는데.”
“예, 감독님.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사람은 김조현이었다. 아직 감독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이다. 이런 건 어떻냐는 제안도 불가능한 상태다.
‘또 시간 잡아먹는 건가.’
걱정이었다. 첫 장면을 찍을 때부터 감독의 능력이 드러난 상황이다.
‘자기 능력이 부족한 걸 알면 전날에 철저하게 생각해 와야 되는 거 아닌가?’
재석이 아무리 화가 나도 당장은 어쩔 수 없다.
‘딱 한 번만 더 참는다.’
하지만 사람 하나 붙잡고 두 시간이 넘어가자, 재석은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웠다.
“감독님, 저랑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예, 그러죠.”
쉬는 시간을 통해 재석과 감독은 이야기를 나눴다.
“감독님, 지금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는 겁니까. 한 신을 찍는 걸, 그것도 사람 하나 붙잡고 시간을 이렇게 잡아먹다뇨.”
“신인의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아서요.”
“아니, 그럼 정확히 지시를 해 주셔야죠. 좀 더 강하게 해 봐라. 이런 지시가 배우에게 얼마나 힘든 지시인지 아십니까?”
“배우라면 그 정도는 해야죠.”
“물론 그래야죠. 하지만 신인들입니다. 베테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정도 현장 경험을 쌓은 이들이 저 안에 누가 있습니까?”
더 이상 이대로 상황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감독을 다그쳐서라도 변화를 줘야 했다.
“이건 감독님이 현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보고 있는 겁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촬영을 하신다면 저희는 못 합니다.”
“아니,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제대로 된 디렉팅이 되질 않는데 계속 현장에 붙어 있어야 합니까? 이대로 간다면 새벽입니다, 새벽.”
“아, 그거야 제가 알아서 합니다.”
“지금 그렇게 해서 제대로 되고 있지 않잖습니까.”
“대표님!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앞으로 제이이브에 드라마 제의가 가기 어려울 겁니다.”
“뭐요?”
재석은 눈빛이 바뀌었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겁니까?”
현재 제이이브에는 몇몇 신인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스타급 배우들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일거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임민경 이름 하나만 팔아도 드라마 국장까지 만날 수 있는 재석이다.
하지만 그동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다음부터 이 외주사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에는 저희도 소속 배우를 출연 안 시킬 겁니다.”
현재 이 단막극을 제작하고 있는 건 방송사에서 의뢰를 받은 외주사였다. 서로 척을 진다면 손해를 보는 건 누구일지 뻔했다.
“어허, 제가 언제 협박을 했다고 그럽니까.”
감독이 꼬리를 말자, 재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정확한 디렉팅을 해 주십시오. 신인들이 뭘 안다고 그런 식으로 하십니까? 물론 이런저런 상황에 따른 제안을 할 수도 있지만, 신인이라는 점은 배려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흠.”
“제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일단 한 시간 쉬게 해 주십시오. 제작진들과 배우들 모두 피곤한 상황입니다.”
“하아, 알겠습니다. 한 시간 쉬죠. 그리고 디렉팅은 좀 더 세세하게 하죠.”
결국 감독이 한발 물러서는 걸로 일이 일단락되었다.
재석은 김조현과 반보영, 두 사람을 데리고 차로 돌아왔다.
“한 시간 휴식이야. 잠시 앉아서 눈이라도 붙여.”
“아닙니다. 그 전에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봐.”
“이번 신은 어떻게 연기를 하면 좋을까요?”
김조현은 몇 시간째 한 장면을 다시 찍고 있자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재석이 도움을 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