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이죠. 강 감독님과 다음 작품까지 함께하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죠.”
재석은 그가 찍을 다음 작품이 뭔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다음에도 같이 하는 거다.
“그럼 크랭크 인에 들어갔을 때 같이 보도록 하죠.”
재석은 회사를 나서기 전에 봉도준 감독과 얼굴을 마주했다.
“형님, 이제 쉬는 건 끝났습니까?”
“동생, 내가 좋은 거 하나 들고 왔어.”
“형님이 하자는 건 바로 해야죠. 그럼 위로 올라가서 한번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죠.”
봉도준 감독이 신작을 들고 왔는데, 그가 들고 온 작품이 뭔지 재석은 알고 있다. 그 수익률이 얼마나 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손해 보는 장사 안 하는 감독이지.’
그렇게 재석은 봉도준 감독이 들고 온 시나리오를 한 번 보고 입을 열었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걸 다시금 생각하게 해 주는 내용이네요. 작업하죠.”
“이대로?”
“형님, 전 형님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자는 거죠.”
“그럼 돈은 많이 벌 것 같아?”
“흐음, 대충 투자금 총 합산하면 40억 정도 가겠고, 수익은 상영해 봐야 알겠지만 이익 좀 나겠네요. 형님 이름도 있으니.”
“대박은 어려울까?”
“이게 대박이라고 할 정도로는 보이지 않네요. 확실한 성공은 하겠다는 것 정도?”
봉도준은 재석이 한 말을 듣고 예상 수익이 적다는 걸 깨달았다.
“형님, 모든 영화가 다 잘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준수한 수준이죠. 이 전작이 초대박을 쳤으니까요.”
“뭐, 그렇지.”
“형님, 걱정 마시고 찍죠. 여기서 신작 안 하면 작품이 언제 나올지 어떻게 압니까.”
“흐음, 알았다.”
봉도준 감독은 재석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예상 수익이 전보다 적다는 것에 조금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해 준다는 게 어디인가.
한동안 휴직 상태에서 다시 일을 하는 거다.
“그럼 영화 제작 준비할 수 있지?”
“물론이죠. 형님, 저만 믿고 영화 추진하시면 됩니다.”
재석은 봉도준 감독 손을 꼭 잡고 같이하자고 했다. 미래에 봉도준 감독이 찍는 영화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흐음, 일단 동생 말대로 할게.”
그렇게 봉도준 감독은 재석의 제작사에서 다시 영화 촬영을 진행하게 되었다.
* * *
영화 과속 삼대의 크랭크 인을 하는 날, 재석은 이 자리에 참석했다. 민경도 따라와서 구경을 했다.
“액션!”
감독의 액션 소리에 차인혁은 차분한 목소리로 연기를 펼쳤다.
‘역시 잘해.’
연기가 너무 차분하게 흘러가서 정말 좋았다.
촬영장을 한참 구경하다가 잠시 휴식 시간이 찾아오자, 차인혁이 민경과 재석을 향해 다가오더니 투덜거렸다.
“아니, 둘이 쌍으로 와서 나 괴롭히러 왔어.”
“아이고, 제작자가 현장도 못 옵니까.”
“오빠, 오랜만인데 그렇게 투덜대는 거야?”
“아이고, 그래서 오늘 제작자님이 오셨는데 저녁에 회식하나요?”
“회식이 문제일까요? 영화 잘 된다면 그 정도 해 드리죠.”
재석은 회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 촬영장 사람들에게 외쳤다.
“오늘 일 끝나고 회식합시다! 메뉴는 삼겹살에 소주!”
딱 메뉴까지 정해서 하는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만큼 딱 적당한 회식 수준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출연해야 할 반보영도 불러서 자리를 함께했다.
반보영은 술은 안 했지만, 민경과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회식 자리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수다 떠는 사이가 되었다.
“언니, 대단하세요.”
“내가 대단하니, 재석 오빠가 대단하지.”
“사장님이야 지금까지 한 거 보면 대단하시죠. 근데 언니 일본에서 인기 최고라면서요.”
“일본도 그렇고, 중국도 인기 좋아. 다른 외국 가서도 괜찮고.”
“정말 세계적인 스타가 되셔서 정말 부러워요.”
반보영은 미래의 롤모델이 임민경이었다. 연예인 오브 연예인이 되어 버린 민경이다.
“하아, 나도 저렇게 됐어야 하는데.”
차인혁은 지금의 민경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시작할 때는 차인혁이 라이징 스타였지만, 지금은 그게 아닌 상황이다.
“어허, 인혁 씨. 이번 영화 찍고 나면 상황이 바뀔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죠? 그럼 다음에 저 회사 옮기면 받아 주시는 겁니까.”
“받아 줍니다. 계약 종료 날짜나 말해 보세요.”
“내년이요.”
“아직 일 년이나 남았으니 그거 끝나면 오세요. 확실히 해 드릴테니까.”
“그 약속 지키세요. 꼭 갑니다.”
차인혁은 그 자리에서 내년에 소속사를 제이이브로 옮긴다고 선포했다.
‘그래, 와라. 안 말린다.’
재석은 과속삼대 촬영장에 간혹 얼굴을 비추며 응원했다.
그사이 봉도준 감독의 신작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의 각본은 이미 영화판에서 많은 기대를 모았고, 배우들이 저마다 출연하겠다며 덤벼들었다.
‘순조로워.’
손댈 게 없었다. 봉도준 이름 석 자는 영화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재석이 이끄는 제작사 또한 히트작을 뽑아내는 곳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과속삼대는 너무 평범한 영화가 아니냐며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오빠, 사람들이 이번에 찍는 영화가 너무 평범한 거 아니냐고 하던데?”
“평범한 영화라…….”
겉으로 드러나는 내용만 보면 평범할 수도 있겠지만, 연기가 더해지면 몰입되지 않는 장면이 없는 영화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재석이기에 주변에서 무어라 떠들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넌 그 말에 신경 써?”
“아니, 신경 안 써. 전혀!”
민경은 재석을 믿는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재석은 항상 기대 이상의 결과를 보여 줬고, 실망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됐어. 남이 뭐라 하든 좋은 결과를 보여 주면 돼. 그때가 되면 인식이 바뀌겠지.”
* * *
다음 날, 재석은 배우들의 주간 보고서를 받았다. 그리고 그 보고서 속에서 재미난 걸 찾았다.
“베토벤의 고통.”
재석은 제목을 보자마자 당장 주명진과 최민철을 불렀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 드라마 배역 다 정해졌습니까?”
“아직인데. 이제 막 대본 돌리는 드라마야. 우리 쪽은 김명진에게 제의 왔어.”
“다른 배역은요?”
“대부분 미정일걸?”
“그럼 여기 저희 쪽 사람 한 명 더 집어넣읍시다.”
“누구?”
“송근석.”
“어떤 역에 넣을 건데?”
“강진우 역에 넣죠.”
두 사람은 대본을 이미 봤기 때문에 그 역할이 어떤 역인지 알고 있다.
김명진이 연기할 배역과 대척점에 서 있다가, 이후 변화를 맞이해 그의 편으로 돌아서는 배역이었다.
그 감정 변화를 능숙히 연기할 수 있는 젊은 연기자는 흔치 않을 터였다.
“선배님, 송근석이 잘 할 수 있을지……. 너무 위험 부담이 큰데요.”
“민철아, 네가 맡고 있는 배우인데 자신 없어?”
“아뇨. 제가 어떻게 그 녀석을 관리했는데 자신이 없다뇨!”
민철은 송근석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근석의 의지를 보았다. 그는 정말 근성과 재능이 넘쳤다.
“그럼 된 거야. 성장하려면 어떤 역이든 계속 도전해야지. 당장 송근석에게 연락해서 대본 숙지하라고 해. 아니다, 오늘 나랑 면담 좀 하자고 전해.”
“알겠습니다.”
송근석은 그날 저녁 회사로 급하게 왔고, 최민철과 함께 재석을 만나게 되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자리에 앉아요.”
재석이 자리를 권하자 송근석은 약간 뻘쭘하게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 하고 싶습니다.”
자신감은 넘쳤다. 쉽지 않은 연기가 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물러섬이 없었다.
그에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 자매가 집필한 드라마라서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긴 합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 그럼 편하게 말하지. 근석아, 이 역할은 단순히 네가 이 캐릭터를 완벽히 연기할 것만 생각해선 안 돼. 문제는 상대역이 김명진 씨라는 거야.”
그 순간 민철도 잊고 있던 부분을 상기할 수 있었다.
김명진은 나날이 연기력이 향상되더니, 함께 연기하는 연기자들을 집어삼키며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강진우 역을 맡게 된다면 그런 김명진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근석아, 할 수 있겠어?”
재석의 말에 송근석의 표정은 단단히 경직되었다.
하지만 입에서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할 수 있습니다.”
재석은 그의 표정에서 남다른 각오를 보았다.
‘의지 하나만은 최고네.’
물론 송근석은 의지만 훌륭한 배우는 아니다. 연기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하루아침에 벼락 스타가 된 케이스가 아니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활동하여 빛을 본 인물이다.
“좋아. 근석아, 대본 한 화 분량 숙지하는 데 시간 얼마나 필요하니?”
“단순히 외우기만 한다면…… 길어야 이틀?”
굉장한 수준이다. 역시 아역 시절부터 꾸준히 해서 그런지 말도 안 되게 짧았다.
“캐릭터 연구까지 포함하면?”
“그러면 시간이 좀 많이 들겠는데요.”
“그럼 내일 나랑 대본 연습을 같이하자. 기본적인 틀은 내가 제시해 줄게. 그렇게 하면 캐릭터 연구를 하는 데 시간이 줄어들 테니.”
“감사합니다!”
“일주일 안에 끝내고 작가랑 만나자. 이 역은 근석이 네 거야. 다른 누구에게도 뺏겨서는 안 돼.”
재석이 확고하게 말하자 송근석도 결연해졌다.
“걱정 마십시오, 사장님. 꼭 따내겠습니다.”
송근석을 그렇게 가 버리고 재석은 따로 작가에게 연락을 취해 사전에 먼저 만나야 했다.
어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자리하게 되었다.
“어머, 사장님. 저 기억나세요?”
“물론이죠. 기억납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보조 작가셨죠. 거기에 동생이 작가 일 어렵다고 말렸는데 말 안 듣고 글 써서 방송 작가가 됐다는 것도 기억합니다.”
“세상에,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그걸 기억하시네요.”
“언니, 사장님한테 그 이야기했어?”
“미선아, 그때 내가 너 뜯어말린 거 미안하다고 했잖아. 벌써 몇 년 전 일이니. 이제는 내가 너 없으면 어떻게 글을 쓰냐.”
“으흠!”
동생은 언니 말에 진정이 됐는지 표정이 조금 거만해졌다.
‘언니가 고생이 많네.’
과거의 일 때문에 동생에게 꽉 잡혀 사는 모양이다.
“제가 이렇게 자리를 만든 건, 나중에 한 사람을 소개시켜 드리려고 하는데 그 사람의 연기를 보고 평가해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평가요?”
방 자매는 재석이 소개시켜 주겠다고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연기자일 것이라는 건 확실히 이해했다.
“저희보다는 감독님을 만나는 게 빠를 텐데.”
“그 자리에 함께 나오실 겁니다. 아직 연락은 안 드렸지만.”
강진우 역은 많은 이들에게 돌고 돈 뒤에 결정되는데, 재석은 그렇게까지 시간을 질질 끌고 싶진 않았다.
‘빡빡하게 할 거 없이 여유를 주면 훨씬 편하지.’
매니저가 할 일이 이런 거다.
“그럼 그때 다시 뵈도 될 것 같은데 왜…….”
“요즘 바쁘셔서 이런 곳에서 식사도 못하셨죠? 이 기회에 분위기도 내고, 맛있는 것도 한번 먹어 보는 겁니다. 전 작가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호호호,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으시네요.”
언니 방은미는 웃었다. 그 동생도 같이 웃었다.
“주문한 음식 나왔습니다.”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자 셋은 그렇게 식사를 했지만, 재석은 별로 먹지 않고 맛만 조금씩 봤다.
작가들은 왜 안 먹냐 물었지만, 재석은 배불뚝이 아저씨 모습이 싫어서 조절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작가들은 재석이 건강을 챙기는 것이라 여겼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오빠, 저녁 먹었어요?”
“조금,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
그렇다. 민경이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서 조금 먹은 거다.
“오늘 작가들 만나고 왔다면서요.”
“어. 이렇게 해서라도 드라마에 송근석 출연시켜야지.”
“오빠가 이렇게 뛰어다니는 거 다들 아는지 모르겠네.”
“모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