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108화 (108/152)

재석은 자신이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거 소속 연예인들이 알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대충 힘들게 일을 한다는 것만 알 거다.

“난 오빠가 고생하는 거 다들 알아줬으면 하는데.”

“그거 안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을 거야.”

재석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민경이 너 하나는 꽉 잡았다.”

“내가 무슨 물건이야. 꽉 잡게.”

“물건은 아니지만, 너 어디 도망 못 가게 잡아 둔 건 사실이지.”

재석은 그 말을 하며 웃자, 민경은 뭐라 할 말을 잃었다.

“에휴, 붙잡힌 내 잘못이지.”

민경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탄스러워서 내쉬는 한숨은 아니었다.

며칠 뒤, 재석은 민철, 송근석과 함께 감독과 방 자매 작가를 만났다.

“시작하면 될까요?”

“네.”

송근석은 곧장 연기를 시작했고, 그 연기를 바라보는 감독과 작가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흐음, 캐릭터 연구가 잘되어 있네요. 앞서 나가지도 않고 적절하네요.”

감독의 말에 작가들도 동의했다. 거기에 송근석이란 인물의 얼굴을 보고 꽤 매력적이라고 여겼다.

“마스크가 굉장히 좋네요. 얼굴은 미소년인데, 목소리는 꽤 중저음에 반전 매력인데요.”

“저도 공감해요.”

재석은 작가와 감독의 반응이 좋자 속으로 됐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어떠십니까. 계약서에 사인할 정도는 되는 겁니까?”

“저희 둘은 찬성이에요.”

방 자매가 찬성을 하자 감독은 고심을 하는 눈치였다.

“감독님은 아직 아니시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데 제가 생각해 놓고 있는 배우가 있습니다. 이 점은 솔직히 감추고 싶지 않네요.”

완곡한 거절이었지만, 재석은 아쉬움을 표출하지 않았다.

‘결정이 조금 늦춰졌을 뿐이니까.’

결국 송근석이 강진우 역을 맡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재석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생각하신 배우가 안 됐을 경우에는 송근석을 가장 먼저 우선으로 염두해 주십시오.”

“그 부분은 확실히 고려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석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겨우 이틀이 지났는데 감독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대표님, 송근석을 강진우 역에 캐스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계약서에 사인하는 날 뵙죠.”

재석은 전화를 끊고 민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민철아, 송근석에게 그때 캐릭터 연구가 좀 모자랐다고 느낀 점 다시 준비시켜라.”

“예, 선배.”

이걸로 베토벤의 고통에 관한 문제가 해결됐다.

“오랜만에 김명진 한번 보러 가 볼까.”

재석은 시간을 내서 김명진과의 만남을 가졌다.

“사장님!”

“김명진 씨, 오랜만에 다시 뵙네요. 우리 회사에 소속된 배우인데 정말 만나기가 어렵네요.”

“하하하, 그래도 사장님 덕분에 이렇게 잘나가고 있습니다.”

“다 김명진 씨의 연기가 뛰어나서죠.”

“아닙니다. 사장님과 한강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저에게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습니다.”

“하하, 이번에 출연하실 드라마 살펴봤습니다. 큰 인기를 끌 드라마더군요.”

“그렇습니까?”

“김명진 씨가 생각한 연기를 그대로 펼치신다면 이번에도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을 겁니다. 하얀탑을 찍으셨을 때처럼 말이죠.”

김명진의 연기는 흥행에 상관없이 기억 속에 남는다. 그의 연기는 그런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성공하시면 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 활동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예? 제가 그 정도가 되나요.”

“일단 시도해 보는 겁니다. 대부분의 한류 스타들이 젊은 사람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어렵지만,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습니다.”

“도전이군요.”

“그렇죠. 한국에서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으니 새로운 영역으로 활동을 넓혀 보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도전이라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진 저도 가늠이 어렵습니다.”

재석은 정말 이건 미지의 영역이라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성공한 드라마가 있으니 살짝 얼굴을 내밀어 볼 만했다.

김명진과 송근석의 출연이 정해졌다.

여주인공은 이지온이었다. 퓨전 삼국지 사극, 대왕사신기를 시작으로 혜성처럼 나타난 연기자였다.

‘그리고…… 유명 가수랑 비밀 결혼하고 10년간 동거했던 사실을 모두에게 감추었던 여자지.’

혜성처럼 등장한 이지온은 한국 연예계를 돌풍처럼 휩쓸었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이면 예능, 화보면 화보, 대한민국 연예계를 장악하다시피 했는데, 항간에는 그녀 때문에 다른 엔터들 일거리가 줄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비밀 결혼과 이혼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은 그녀의 비밀이 밝혀지기 전, 그녀가 한창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시기였다.

“오빠, 이지온이면 작년에 그 대사기 찍은 배우 아냐?”

“그래, ‘대’사기 배우지.”

재석은 ‘대’라는 말을 강조했다.

‘대사기’라 불릴 정도로 충격적인 비밀을 숨겼던 그녀였다.

“첫 드라마부터 히트를 치고 부럽다.”

재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누가 누굴 보고 부럽다고 하는 거야? 아시아의 여신 임민경이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여배우 이지온을 부럽다고 한 거야?”

“흠흠.”

민경은 살짝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이 드라마 촬영 시작되면 내가 얼굴 좀 비출까 하는데.”

“뭐 하려고?”

“배우들 잘 좀 부탁한다고 인사나 하는 거지.”

사소해 보이는 일이지만, 이런 사소한 일들이 쌓이면 그게 곧 회사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배우를 생각해 주는 회사. 이런 이미지는 사소한 것을 챙기면서 쌓아 나가는 거지.’

“역시 오빠는 배우를 생각할 줄 안다니까.”

“그럼 뭘 해 주면 될까?”

“야식?”

가장 무난한 거다.

하지만 현장에서 제일 티내기 좋은 게 간단한 야식이다.

“메뉴를 조금 업그레이드시켜 줘야겠네.”

재석은 야식으로 방향을 잡고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베토벤의 고통은 1화 촬영을 끝내고 2화 촬영의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2화는 바로 베토벤의 고통 명장면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드라마의 명장면이 어느 정도 스토리의 흐름을 탄 후에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베토벤의 고통은 2화에서 명장면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재석은 그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늦은 밤 촬영장을 찾았다. 배우들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야식을 들고 말이다.

촬영 중 몸 관리를 해야 하는 배우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간단한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늦은 밤까지 주린 배를 붙잡아 가며 촬영하는 배우들에게 재석은 한 줄기의 빛이었다.

더군다나 먹기 간편한 샌드위치라서 특히 더더욱 그랬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많이 있으니 더 드시고 싶으신 분들은 더 드세요.”

그렇게 준비한 샌드위치를 배우들에게 쫙 뿌리는데, 민철이 다가왔다.

“선배님, 이런 건 제가 해야 하는데…….”

“괜찮아, 대표가 나서서 하는 것도 회사 이미지에 도움이 되니까. 소속 연예인들한테도 소속감 만들어 주기 딱 좋지.”

간단한 야식 타임이 끝나고 촬영이 재개되었다.

촬영장 분위기는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피곤함과 배고픔에 다들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는데, 배라도 채우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진 것이다.

“자, 마지막 신 가겠습니다.”

재석은 마지막 신이라는 말에 감독 뒤에 섰다.

감독이 보는 모니터를 통해 카메라에 담기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였다.

“액션!”

감독의 호쾌한 소리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곧바로 김명진의 대사가 울려 퍼졌다.

“아줌마 같은 사람들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죠. 구제 불능, 민폐, 걸림돌 이런 것들로 말입니다. 그런데, 난 그중에서도 이렇게 불러 주고 싶네요. 똥. 덩. 이.”

“…….”

순간 배우들이 숨을 죽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송근석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니, 뭐 저런!”

“OK!”

감독의 사인이 떨어졌다.

김명진은 곧장 상대 배우에게 다가가 사과를 건넸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제가 너무 무례한 말을 듣게 한 것 같네요. 미안합니다.”

“호호, 조금 기분이 나쁘긴 했는데 괜찮아요.”

상대 배우는 가볍게 웃으며 사과를 받아 주었다.

재석은 촬영장의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

‘이야, 한순간이구나.’

명장면이라 여러 차례 촬영을 진행할 줄 알았는데 김명진의 연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 신을 한 번에 끝내 버렸다.

감독은 그대로 촬영을 접었다.

재석은 김명진과 함께 차에 올랐다.

“이야,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대사를 자연스럽게 뱉을 수 있는지…….”

“허허허,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해 주시니까 더 기쁘군요.”

“그렇습니까?”

“예, 처음 만났을 때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했던 그때가 떠올라서 기분이 좋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도 가볍게 술 한잔하면서 그때처럼 대화를 나누는 건?”

김정진과 재석은 마음이 맞았다.

둘은 늦은 새벽이었지만, 집 앞 편의점에 들러 소주와 육포, 마른 오징어를 샀다.

매니저를 먼저 돌려보낸 둘은 술잔을 기울였다.

“이렇게 마시는 거 참 오랜만이네요.”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거 같네요. 그런데 요즘 집안은 걱정 없습니까?”

“없습니다. 아내는 걱정 말라며 항상 응원해 주고 있고 아이는 조금, 뭐랄까……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없어서 아쉬워하고 있죠.”

“그럼, 이번 드라마가 끝나면 가족끼리 여행 한번 다녀오시죠.”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돈 벌어서 어디다 쓰겠습니까. 해외라고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요. 가까운 일본은 한 시간 조금 넘는 거리입니다. 가족 챙기세요. 이번 드라마 잘될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바쁘게만 살아왔던 김명진도 이제 뒤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김명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가족끼리 여행도 좀 다니고 그래야겠습니다.”

아예 약속까지 받아 냈다. 이번 드라마가 끝나면 가족끼리 여행 한번 다녀오기로.

그렇게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는데, 김명진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사장님, 요즘 연애하시죠?”

“풋!”

마시던 소주를 뱉어 낼 정도로 충격적인 질문이었다.

“이런, 한번 찔러본 건데 정답이었나 보네요.”

‘젠장.’

“뭐, 젊은 나이라서 연애를 할 수도 있죠. 근데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하세요. 즐길 수 있을 때 열심히 즐기세요.”

‘아, 그건 이미 물 건너갔는데요.’

이미 임민경에게 붙잡힌 몸이다.

그런 미인을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다.

특히 그녀의 성격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음, 아쉽게도 단단히 붙잡혀서 어려울 것 같네요.”

“허허, 이런. 별로 즐기지도 못하고 끝났군요.”

“괜찮습니다. 뭐, 짝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고, 결혼도 안 해 보는 것보다 해 보고 후회하는 게 낫죠.”

김명진의 말에 재석은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다.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에 큰 힘이 되어 준다.

“그 말에 공감합니다.”

홀로 살다 죽어 본 재석은 그 사실을 특히 잘 알았다.

옆에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건 참 힘든 일이었다.

*  * *

드라마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방 자매는 쪽대본을 내놓는 일이 없었고 스토리도 탄탄했다.

방영도 순조로웠다.

첫 회 성적은 좋다고 할 수도 없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앞으로 진행되는 스토리에 따라 승부가 갈릴 성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승부를 가르는 장면은 오래지 않아 방영되었다.

바로 2회 차가 방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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