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스타가 전 세계적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했다.
물론, 임민경의 중국 드라마 진출을 모두가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입성이 비중화권 연기자들의 중국 드라마 진출에 물꼬를 터 비중화권 연기자들이 중국 드라마 시장을 장악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재석은 어느 쪽 반응이든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국 드라마 시장을 비중화권 연기자가 장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한류 스타들이 임민경처럼 다른 나라 드라마에 진출하는 것은 미래에도 특별한 경우였다.
좋은 쪽 반응은 설레발에 불과했고, 나쁜 쪽 반응은 사서 고생하는 느낌이랄까.
“걱정도 팔자다.”
재석은 의미 없는 걱정들을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개 개인이 한 나라의 드라마 판을 뒤집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겨우 개인이 돈 좀 버는 것 가지고 말이야.”
미래를 알고 있는 여론에 신경을 거두고 민경을 가르칠 중국어 선생님과 중국 연기 선생님을 찾는 데 더 열을 올렸다.
그사이에 여왕 선덕은 신지경의 출연을 시작으로 변화를 맞이했다.
하지만, 시청률을 견인하고 있는 배우는 신지경이 아니라 미진 역을 맡고 있는 고민정이었다.
‘여왕 선덕의 주인공이 사실은 미진이라고 떠들어 대고 있는데…… 과연 이번에도 그럴까?’
임민경은 여왕 선덕의 덕만 역으로 출연한다.
재석은 민경이라면 이런 여론을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경의 연기가 꿀리진 않지. 고민정이 강적인 건 사실이지만 말이야.’
고민정의 연기는 악역임에도 배역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연기를 해서 그런지 정말 무섭기 짝이 없었다.
물론 신지경이 연기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혹독한 훈련 덕분에 나름 괜찮은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인 거지.’
아무리 연기를 잘한들 상대가 잘하는 것을 넘어서 소름끼치는 연기를 펼치면 상대적으로 묻히는 것이다.
‘무섭네.’
방송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다들 미진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재석은 그걸 아주 잘 알기에 민경이 걱정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민경과 고민정의 연기 대결이 기다려졌다.
“아주 기대가 된단 말이야.”
재석은 기대감을 품고 일을 진행했다.
민경은 중국어 선생님과 중국 연기 선생님을 초빙해서 매일같이 중국어와 연기에 관한 수업을 받았다.
기본적인 감정이야 인간이라면 다 똑같았기에, 민경은 중화 문화권만의 고유의 감정선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으로 연기를 배워 갔고, 여왕 선덕의 준비도 놓치지 않고 해 나갔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노력하는 민경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름다웠고 열정적이었다.
한편 신지경은 여왕 선덕 촬영분이 끝나자 곧바로 시트콤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서 신지경은 바보같이 순박하기만 한 역할이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시청자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져 인기를 얻는다.
‘참 신기해.’
신지경은 시트콤에 알맞은 연기를 위해 여왕 선덕에서 보였던 사극의 느낌을 지우는 데에 신경을 집중했다.
신지경이 바빠지면서 새로운 로드 매니저가 붙었다.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가다듬는 등 신지경은 시트콤 준비에 열을 올렸다.
신경 써야 할 것은 작품 내적인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시트콤 촬영 속도에 맞추기 위해 움직여야 했고, 촬영장의 상황과 분위기도 파악해야 했다.
어린 연기자들은 대다수 그 속도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서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고비만 넘어가면 시트콤 촬영이 조금은 수월해진다.
마침내 신지경의 첫 시트콤 촬영 날이 다가왔다.
재석은 응원차 촬영장에 따라가 분장하는 신지경의 곁을 지켰다.
‘음, 예쁜 거지네.’
하지만, 웃기지 않았다. 거지꼴도 신지경의 미모를 가릴 수 없었다.
‘내가 끼어들어서 좀 더 거지처럼 만들어 볼까?’
“저기 아티스트님.”
재석의 부름에 분장하시던 분이 약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장을 좀 더 진짜 거지처럼 하면 안 될까요? 얼굴이 너무 안 웃겨서요. 시트콤인데 좀 웃겼으면 싶어서요.”
“아, 정말요? 그래도 배우이신데.”
“배우라면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줘야죠. 어떨 때는 진짜 거지처럼, 어떨 때는 천생 미녀처럼. 지금은 진짜 거지처럼 보여야 할 때인 것 같아요.”
분장사는 잠시 신지경의 얼굴을 바라봤다.
신지경이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해 주세요. 솔직히 얼굴이 안 웃기긴 해요.”
신지경도 시트콤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어서 재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연기자라면 다양한 연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그렇게 신지경의 분장은 전보다 더 거지스러워졌다. 다만, 눈망울이 너무 맑아서 눈만 보고 있으면 빠져든다는 게 함정이다.
‘아무리 분장을 해도 눈은 답이 없네.’
어쨌든 최대한 웃기게 분장을 끝냈다.
곧 신지경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하는 내내 사람들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감독은 흥분하며 좋아했다. 그는 머릿속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며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면 곧바로 OK 사인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 신을 촬영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보통 촬영은 하루 종일 진행되는데 그날 찍을 수 있는 장면은 모두 다 찍는다.
야외 촬영은 번개처럼 찍고 빠지고, 스튜디오 촬영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좀 더 공을 들인다.
신지경은 열심히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 쉬는 시간에도 대본을 보며 다음 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흐음.”
그런 신지경의 모습에 재석은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하지 마. 그럼 머리 터져.”
“하지만, 다음 촬영이 금방인데.”
“걱정 마. 연기를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건 흐름을 이해하는 거야. 잘 알지?”
“네, 알죠.”
“그럼, 머릿속으로 흐름을 그려가면서 해 봐. 이미 알고 있는 거니까 길게 말하지 않을게. 시골 소녀가 더부살이 하면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 편할까? 아니면 불만이 많을까?”
“눈치를 보지 않을까요.”
“그럼, 기본적인 행동은?”
“누가 말하기 전에 먼저 움직인다?”
“그건 너무 약삭빠르지 않을까? 순박한 소녀라면 조금 바보 같아야 할 것 같은데.”
“바보라면?”
“순박하게 작은 걸 얻어도 순수하게 좋아하고, 동생을 위해서라면 남들이 나서기 싫어하는 일에 나서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우직함이 포인트일 것 같아.”
재석은 신지경에게 조언을 해 주고 시트콤 촬영을 구경했다.
신지경이 맡은 배역은 어떻게 보면 미련해 보이는 우직함을 가진 캐릭터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바보처럼 보이는 거다.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들었다.
신지경이 맡은 캐릭터뿐만이 아니었다.
시트콤에서는 한 명, 한 명 모든 배역이 희화화되어 있었다. 다들 과장되고 웃겼고 그런 면에서 시트콤만의 재미가 나왔다.
“크크크.”
재석은 한쪽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웃었다.
이미 한 번 봤는데도 재미가 있었다.
아니, 이미 본 장면이기에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장면이 다시 연출된다 생각하니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던 거다.
그래도 촬영에 방해가 안 되게 하려고 혼자 숨죽여 웃었다.
“아, 이거 너무 웃긴데.”
급기야 재석은 촬영에 방해될까 봐 자리를 피해야 했다.
“지경아, 나 간다. 회사 일이 바빠서.”
“예, 들어가세요.”
재석은 신지경에게 인사를 하고 촬영장을 나섰다.
그럼에도 회사에서 일을 보다가도 지금쯤 어떤 신을 촬영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영될 때 정말 재미있게 봤던 시트콤이라 계속 생각나네.”
재석은 하루 종일 혼자서 피식거렸다.
며칠 뒤, 민경의 여왕 선덕 촬영일이 다가왔다.
재석은 민경과 함께 여왕 선덕 촬영장에 따라나섰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새롭네.”
민경의 남장 모습은 정말 신선했다.
그간 민경이 보였던 모습은 천생 여자 그 자체였는데, 남장을 한 모습도 좋았다.
“어때요, 좀 남자 같아요?”
“아니, 미소년 같아.”
“치, 누가 그런 말 하면 속을 줄 알고.”
둘만 있을 때처럼 자연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지만, 둘의 이야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목소리 톤 다듬는 거 잊지 말고.”
“어, 어.”
민경은 최대한 남자의 톤으로 연기하기 위해 목소리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 목소리를 다듬자 꽤나 어색하지 않은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때요?”
톤이 차분하게 가라앉자 재석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원래 여자가 목소리를 가라앉힌다고 남자 목소리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가깝게 흉내는 내야 했다.
‘꼭 필요한 부분이지만, 연출이 너무 힘들어.’
“자, 촬영 갑니다.”
그렇게 대강의 준비를 마쳤을 때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역에서 성인으로 바뀌는 신부터 시작했다.
민경은 물통에 얼굴을 담갔다가 들어 올리며 외쳤다.
“이번엔 내가 꼴찌 아니지, 그렇지?”
겨우 한 줄의 대사였지만, 아역에서 성인으로 바뀌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계속 촬영은 이어졌다. 민경은 거칠게 살아온 인물, 덕만을 확실히 표현했다.
살아남기 위해 이것저것 안 해 본 일 없는 질긴 인물이 바로 덕만이었다.
그렇게 첫날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촬영이 끝나고 옷도 갈아입고 분장도 깨끗하게 지운 민경이 기다리고 있는 재석에게 다가왔다.
재석은 분장을 지운 얼굴을 보았다.
“아, 힘드네요. 남장하는 역은 처음인데 정말 지치네요.”
“그럴 거야. 푹 쉬어.”
민경은 차 안에서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집에 도착하자 눈을 뜨더니 힘겹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은 빼놓지 않았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안 피곤해? 난 그냥 쓰러져 잘 줄 알았는데.”
“그렇게 지저분한 상태에서는 침대에 못 누워요. 그리고 오빠, 밥 먹어야죠.”
“아직 배 안 고파.”
“운전하랴 저 옆에서 도와주랴 고생했잖아요. 배가 안 고프다 하지만, 슬슬 밥 먹을 시간 됐어요.”
민경은 저녁을 함께 먹기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을 준비했다.
“나도 도울게.”
재석은 민경과 함께 저녁을 준비했다.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 둘의 모습은 부부라 해도 믿을 정도로 가까워 보였다.
“오빠, 그거 알아?”
“뭔데.”
“나 서른 되는 거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알아, 그리고 슬슬 너한테 들어오는 일거리도 줄어들고 있어.”
“내가 점점 인기가 없어지는 구나.”
“인기가 없는 건 아닌데, 이젠 몸값이 너무 비싸서 널 못 쓰는 거지. 쉽지 않아.”
“이대로 가면 내가 너랑 결혼해도 별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야.”
“오빠는 이걸 예측하고 기다린 거야?”
“예측했다기보다 다른 배우들이 그렇게 되고 있으니까 생각한 거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배우들이 등장하고 그만큼 기존의 스타들이 사라지고, 그러잖아.”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
“그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런 거지. 여전히 민경이 너는 최고의 여배우야. 그건 변하지 않아. 나이가 들면 그에 걸맞은 역을 내가 꼭 찾아줄게.”
“오빠,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오빠 덕분에 연기 안 해도 나 먹고살 수 있어. 오빠가 그만큼 돈 벌 수 있게 해 줬으니까.”
민경은 오히려 재석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평생이 걸려도 벌지 못할 만큼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오빠가 지금은 나보다 더 벌잖아. 보니까 미국에서 들어오는 주식 수익 보면 엄청나던데.”
수억 원의 배당금이 재석의 계좌로 입금되기 시작한 지 한참 됐다.
‘그러고 보니 이제 주식이 뻥튀기될 시기가 거의 다 됐네.’
민경이 덕분에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관련 뉴스가 터지는 것을 시작으로 연관된 주식들이 동반 상승할 것이다.
재석은 그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가 터졌다.
더즈니가 머블 엔터테인먼트 인수를 발표하면서 머블의 주식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상승세가 얼마나 거센지, 주식은 매일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었다.
그 뒤에 머블에서 나오는 히어로 관련 상품들이 무섭게 팔렸는데 한국에까지 물건들이 밀려 들어올 정도였다.
“아주 잘나가네.”
덕분에 재석의 재산이 쭉쭉 불어나고 있었다.
“아직까진 괜찮겠어.”
머블의 주식은 엄청난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