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117화 (117/152)

물론 촬영은 성실히 임하겠지만 중국 드라마 촬영 일정이 있기에 어느 정도의 조율은 불가피하다고 말이다.

중국 드라마 촬영 시작은 11월, 그리고 그 전에 10월쯤에 배우, 제작진들과 사전 미팅 자리가 있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중국 촬영과 한국 촬영을 번갈아 가면서 열심히 뛰어다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작진들이 민경을 배려해 준다는 것이었다.

여왕 선덕 촬영 때에는 최대한 민경의 신을 먼저 찍어 주었고, 중국 쪽도 민경에게 적지 않은 배려를 해 주었다.

촬영 일정을 최대한 민경 중심으로 짜 준 것이다.

덕분에 재석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거기에 촬영장도 상해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후우, 다행히 공항에서 한 시간만 차 타고 들어가면 되는 거리네.”

미리 모든 동선까지 파악해 두었다.

1분 1초도 오차가 있어서는 안됐다.

“하지만, 안전사고에는 항상 유의해야지.”

재석은 만일에 있을 안전사고를 조심하며 준비를 했다.

“아우! 진짜.”

재석은 민경이 연기에만 몰두할 수 있게 철저히 준비했다. 한편 이번 일을 괜히 받아들였나 싶었다.

“다음에는 진짜 돈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이렇게는 하지 말자.”

그렇게 재석의 노력과 함께 중국 드라마 촬영 시작 날이 다가왔다.

재석은 민경과 함께 촬영장을 찾았다.

그런데 민경을 본 그쪽 배우들의 반응은 어딘지 기이했다.

“민경이다.”

“민경이야.”

자신들도 연예인이면서, 민경을 보고 꼭 연예인을 만난 팬처럼 놀라는 것이었다.

‘완전 딴 세상 사람 취급이네.’

중국에서의 첫 대본 리딩은 민경에게도 떨리는 순간이었다.

아시아에서 맹위를 떨치는 민경에게 스태프는 물론 배우들의 시선까지 집중되어 특히 더 그랬다.

그 시선 속에는 동경, 놀라움, 신기함 등등의 감정들이 담겨 있었는데 마냥 좋은 감정만 담긴 것은 아니었다.

배우들의 눈빛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경계심이 엿보였다.

‘난 굴러온 돌이야.’

굴러온 돌에 대한 경계는 어딜 가나 있다.

이곳에서 민경은 철저하게 굴러온 돌이었다.

민경은 이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재석은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선물을 꺼내 보였다.

“선물입니다.”

재석은 연습했던 중국어와 함께 선물을 나누어 줬다.

재석은 촬영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첫 만남을 기념하는 에너지 드링크를 줬다.

“어…….”

받은 사람들은 이런 걸 받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는지 다들 멍한 표정이었다.

“첫 촬영이니 힘내셔야죠.”

재석이 한국어로 말했지만, 바로 옆에 통역사가 붙어 있었기에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중국 촬영진들은 사람 좋은 미소로 에너지 드링크를 나눠 주는 재석을 신기하게 바라봤는데, 재석은 개의치 않고 감독에게 다가가 에너지 드링크를 건네줬다.

“감독님, 이거 드시고 활기찬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쁘지 않네.”

리딩장의 사람들은 재석이 선물한 에너지 드링크에 미소 지었다.

이런 작은 선물은 주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에게 부담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표현할 수 있으니 이런 자리에서는 필수였다.

실제로 촬영진들의 눈빛에 어린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들었다.

리딩이 시작되었다.

민경은 대본에 한국어로 빼곡하게 적어 놓은 중국 발음을 그대로 읽기 시작했다. 물론 뜻을 알아야 연기로 표현할 수 있기에 그 뜻 역시 다 적혀 있었다.

민경이 입을 처음 열었을 때 촬영장의 사람들 얼굴 위로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중국 표준어 발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

다들 민경의 발음에 크게 놀랐다.

중국어는 성조 때문에 발음이 너무 힘든데 민경은 아주 또박또박 정확하게 발음했을 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실어 대사를 친 것이다.

재석은 이들의 반응에 만족스러워졌다.

‘후시 녹음 안 해도 될 정도인가?’

하지만, 이런 발음을 위해서 민경은 하루 종일 대본을 붙잡고 발음 연습을 해야 했다.

“하아,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 가면서 대본을 붙잡고 있었지.”

재석은 중국어 발음을 위해 했던 민경의 노력이 떠올라 작게 한숨 쉬었다. 저 발음은 민경의 철저한 노력이 만들어 낸 성과였다.

“언제 그런 연습을 한 겁니까?”

감독인 량신취엔이 민경의 중국 발음에 놀라 물었다.

하지만 민경은 그 말을 알아듣진 못했는데, 통역사가 옆에서 감독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민경은 통역사를 통해 말했다.

“그냥 매일같이 연습했습니다.”

민경의 대답에 량신취엔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류 스타이기에 어느 정도 거만함이 배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본 민경은 그런 거만함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하하하, 좋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후시 녹음 따윈 안 해도 되겠네요.”

후시 녹음을 안 하면 그만큼 제작비를 아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후시 녹음을 하면 어느 정도의 이질감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감독 입장에서는 민경의 노력이 고마웠다.

민경의 노력으로 대본 리딩은 원활하게 좋은 분위기에서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재석은 곧장 민경을 태우고 곧바로 공항으로 달려가 한국으로 날아갔다.

“민경아, 아무래도 전세기를 좀 빌려야겠다. 여왕 선덕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비싸지 않아요?”

“걱정 마, 우리가 내는 거 아니야.”

“그럼, 중국 제작사에서?”

“그럼, 말하면 아마 해 줄걸? 배우 컨디션도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하거든.”

재석의 말에 민경은 그쪽에서 정말 그렇게 해 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다음 중국행에서는 정말 전세기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세상에, 전세기를 타고 중국과 한국을 오가게 될 줄이야.”

중국 제작사는 한류 스타 민경을 위해서 정말 큰돈을 들여 중국 전세기를 대여해 주었다.

“한류 스타 대접이 이 정도는 돼야지.”

물론 스케줄이 빡빡하지 않았다면 굳이 전세기까지도 필요하지 않았을 거다.

민경은 그렇게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 촬영이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달픈 나날이 시작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중국과 한국을 왔다 갔다 했다.

어떨 때는 아침에 중국, 저녁에 한국 촬영을 할 때도 있었다.

촬영 준비에 철저한 성격인 민경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길 정도였다.

“하아, 이거 괜히 하자고 한 거 같다.”

“괜찮아, 오빠. 내가 하자고 한 거야.”

민경은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달랬다. 그런 민경에게 재석은 하나를 약속했다.

“민경아, 중국 작품 끝나면 일주일, 아니 2주는 모든 스케줄을 다 빼 줄게. 푹 쉬자.”

“그럼, 그때 같이 있어 줄 거야?”

“그래, 같이 있을게.”

“고마워.”

민경은 그 말을 하면서도 대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홀로 연습을 하고 또 연습을 해 나갔다.

여왕 선덕에서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고민정과 팽팽한 연기 대결을 펼쳤다.

사람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민경의 연기를 보며 칸에서 괜히 여우주연상을 받은 게 아니라며 감탄했다.

중국 촬영 현장에서도 괜히 한류 스타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줬다.

재석 역시 열심히 움직였다.

재석은 중국 제작진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꾸준히 입에 뭔가를 넣어 줬다. 한국 과자가 되었든 음료수가 되었든 큰돈 들이지 않고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들로 말이다.

제작진들은 재석의 소소한 선물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

재석은 제작진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유달리 좋아하는 물건을 발견하면 다음 촬영 때 한 박스씩 챙겨 와 제작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재석의 아낌없고 세세한 씀씀이에 제작진들은 호감을 느꼈다.

“재석 씨는 배포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저희들을 이렇게 세세하게 챙겨 주시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가 않는군요.”

“하하하, 뭘요. 서로 돕고 돕는 관계인데 이 정도 가지고요.”

남들이 보기에 재석이 공짜로 베풀어 주는 것 같겠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었다.

‘아무리 한류 스타라 하지만, 이들에게 나와 민경은 이방인이야. 좋은 인상을 심어 줘야 일을 그르치지 않고 민경이가 더 수월하게 일할 수 있어.’

이 모든 것이 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 보였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한 일이었다.

너무 과하면 부담스러워하고 어설프면 안 주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아예 선물이라는 생각도 안 들 정도로 사소한 것들을 주는 것이다.

겨우 한국에서 파는 음료수와 스낵 종류로 환심을 산 것이었다.

물론 민경의 열정이 대단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 배우들은 연기에 있어서 철저한 민경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고, 이제는 민경이 무언가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나서서 연기에 대해서 조언을 해 줄 정도였다.

그렇게 힘들게 촬영하는 새에 어느덧 여왕 선덕의 촬영이 끝이 났다.

곧바로 민경과 재석은 중국 촬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민경이 대본을 붙잡고 사는 건 변함이 없었다.

“쓰쒸쓰으.”

민경은 기본적인 중국어 발음에 굉장히 신경을 쓰며 대본을 연습했다.

이럴 때 보면 민경이 참 독한 여자다. 표정 연기만 하고 중국어는 어설프게 해도 후시 녹음을 하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그 후시 녹음이란 것을 용납할 수 없는지, 민경은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서 연습에 매진했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 말도 안 걸고 열심히 연습했네.’

평소에는 시시콜콜 잘도 재잘대던 민경이 말도 안 걸고 연습에 집중한 것이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런 민경이 참으로 사랑스럽다.

중국에 있으면서 재석은 한국의 사정을 중국 지사를 통해 보고받았다.

“미남이네가 그나마 인기를 끌고 있네.”

사실 미남이네의 한국 성적은 딱히 좋지 않았다.

현재 동시간대에 방영 중인 블록 버스터 첩보 드라마 아이린에 시청률이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래와는 큰 차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미남이네는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이슈가 된 드라마였다.

해외에 판권이 팔리기도 했고 드라마가 리메이트 되기도 했다. 그렇게 팔린 미남이네는 출연자들을 한류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내년 가을에는 두 사람 일본 일정을 잡아야겠어.”

재석은 박신연과 송근석에게 일본어 공부를 지시했다.

내년 10월 정식 일본 진출을 위한 준비였다.

재석은 다음 보고로 넘어갔다.

다음 보고는 반보영의 일본 음반 활동에 대한 보고서였다. 재석은 반보영의 음반 활동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주 좋은데.”

반보영은 순조롭다 못해 성공적으로 활동 중이었다.

완전히 가수로서 정착을 해 버린 것이다.

콘서트 수입 외에도 일본의 여러 행사에 참여하면서 일본 열도를 휩쓸고 다녔다.

“이건 민경보다 더하네.”

반보영은 물 만난 고기처럼 일본을 쓰윽 돌면서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일본 지사에서 반보영이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했는데 한 달 평균 20억 원을 웃도는 상황이었다.

“아주 쭉쭉 긁는구나, 긁어. 휴식이 필요하겠어.”

재석은 반보영에게 내년에 편안하게 쉬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다음 보고는 영화 제작사 쪽 보고였다.

현재 들어온 영화 시나리오의 리스트가 적혀 있었는데 그 보고를 본 재석은 곧장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건 내가 직접 가야겠는데.”

재석은 곧바로 민경을 만나 잠시 한국에 갔다 와야겠다는 말을 했다.

“얼마나 있다 오려고?”

“길게 있을 생각은 없어. 잘해 봐야 일주일이야. 어차피 한국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뭐, 일주일이면 길긴 하지만, 다녀와요. 근데 새로운 매니저는 보내 줄 거죠?”

“물론, 지사에서 사람이 올 거야.”

“알았어요.”

재석은 급하게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 날씨는 싸늘했다.

“따뜻한 중국 남쪽에 있다가 서울에 오니 정말 춥네.”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라 재석은 한껏 몸을 움츠리며 회사로 찾아갔다.

가는 동안에 영화 시나리오 하나가 눈에 띈다면서 그 작품의 시나리오를 준비한 감독에게 연락해 달라고 했다.

정말 바쁜 시간 쪼개서 만나는 것이었다.

다행히 재석은 바로 그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범진이라고 합니다.”

“음? 왠지 익숙한 이름이네요.”

“뭐, 어디선가 들어 보신 이름일 수도 있죠.”

“그것보다 보내 주신 영화 시나리오 정말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감사합니다.”

“이 영화 아재 내용도 좋고, 스토리 흐름이 느와르 장르의 정석 같은 느낌이더군요. 많은 흥행 요소들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신 겁니까?”

“아뇨, 특별하게 염두에 둔 배우는 없지만 그래도 제목대로 아재 느낌 물씬 나는 배우를 섭외하고 싶었습니다. 40대의 진짜 아재를 표현할 수 있는 배우 말이죠.”

“흐음.”

감독의 말에 재석은 순간 그림이 팍 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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