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배우들은 다 소속사가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소속사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배우들을 물색하고 있기에, 새로 나타나는 배우를 먼저 찾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일단 아역부터 끝내고 다른 걸 봐야지.”
아역 배우 측은 다음 날 아침 바로 대답했다.
출연하겠다는 것이다.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지만 원진이 출연한다고 하니 기회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감독이 알아서 하겠지.”
재석은 더 이상 캐스팅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는 영화 촬영이 잘되는지 확인하면 된다.
이틀 뒤 회사에 밝은 얼굴로 찾아온 이범진 감독은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그쪽 배우와 계약까지 끝마치고 왔습니다.”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일이 빨리 끝났네요.”
“그쪽에서 흔쾌히 출연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이쪽으로 와서 연기를 같이할 겁니다.”
“그리고 감독님이 없을 때 제가 제의를 보내서 답이 온 아역입니다. 그리고 프로필과 필모도 같이 있습니다.”
“대표님이 고르신 아역 배우라……. 한번 보겠습니다.”
이범진 감독은 아역 배우의 자료를 훑어봤다.
의외로 많은 경력이 존재했다.
“기억이 없을 때부터 모델 활동을?”
“아기 시절부터 부모가 직접 발로 뛰어다닌 모양입니다.”
“흐음, 그렇다면 철저하게 이쪽 계통을 교육받은 사람이네요.”
“그렇죠.”
재석이 선택한 배우는 영화 아재에 출연할 김세진이다. 지금 나이가 9살이었지만, 연기 실력은 그 나이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아직 감독은 그걸 모르니 일단 김세진을 만나려고 했다.
“감독님이 마지막 결정하시고 저한테 알려 주세요.”
“예, 대표님.”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이 연락했다.
감독은 김세진의 캐스팅을 확정 짓겠다며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영화 캐스팅이 완료되었다.
동시에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촬영 준비에 돌입했다.
크랭크 인 날짜가 잡히고 발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
대본 리딩이 있는 날에 모든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대본 리딩장에 찾아온 재석은 한 배우를 보고는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 영화의 제작사 대표 전재석이라고 합니다.”
킬러 역할을 맡을 배우는 태국 배우, 캄차였다.
나이는 원진보다 많았고, 상당히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재석이 영어로 이야기하자 캄차 역시 능숙한 영어를 선보였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불러 주셔서.”
서로 악수를 하고 재석은 다른 배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석은 배우 한 명, 한 명과 직접 악수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가 재석은 한 배우에게 질문했다.
“어디서 많이 본 분 같습니다. 혹시 드라마 ON에 출연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비중도 작은 엑스트라에 가까운 배역이었는데, 절 기억하시네요.”
“인상이 강렬해서 기억합니다. 눈빛이 워낙 강렬해서 말이죠.”
재석이 대화를 나눈 상대는 김숭오다.
영화 ‘아재’에 출연한 후 조연으로서 크게 활약하는 배우가 된다. 악역이던 아니던 말이다.
“이번에 악역 동생으로 나오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거기에 재석은 김희정과 악수를 했다.
이름만 보면 여자 배우로 오해할 만한 이름이었는데, 이쪽이 메인 악당이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고, 죽는 그 순간까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는 진짜 악당 말이다.
“하하, 안녕하세요. 대표님.”
김희정은 숫기가 없는지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성격도 착하고 알고 보면 약골이라지. 악역이랑은 전혀 안 어울리는데, 연기를 너무 잘한단 말이야.’
김희정은 연극 바닥에서 오랜 세월 구르다가 영화에 진출한 배우로, 스크린에 데뷔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아이고, 대표님. 그렇게 배우들 한 명, 한 명 다 악수하시다가는 리딩할 시간도 없겠습니다.”
“어이고, 제가 시간을 다 빼앗을 뻔했네요. 그럼 시작하시죠.”
재석의 말에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그 누구도 빠지지 않고 쟁쟁하게 연기를 펼쳤다.
캄차는 대본 리딩인데도 불구하고 표정 연기에 돌입하면 진짜 킬러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겨 줬다.
그리고 생각보다 영어를 잘해서 의사소통에 큰 문제점을 안고 있진 않았다.
감독은 캄차에게 좀 더 진지하고 감정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연기해 달라고 지시했다.
캄차는 감독의 지시대로 대본 리딩을 할 때 확실하게 감정을 억눌렀다.
‘태국은 조금 과장되게 연기하는 특징이 있긴 하지.’
하지만, 캄차가 감정 조절이 서투른 것은 아니었다.
감정 조절은 연기자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필수였다. 뿐만 아니라 캄차는 태국 스타일 연기를 금세 지울 수 있을 정도로 관록이 있었다.
그 외에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좋았다.
단순히 대사만 주고받는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라디오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이야, 겨우 듣는 걸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자극이 되다니 대단해.’
일부러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회귀 전에 봤던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는 대단했다.
재석은 영화 아재의 크랭크 인이 들어갈 때 멋진 이동식 뷔페를 보내 배우들의 사기를 북돋아 줬다.
물론 첫날만 그런 건 아니고 가끔 뷔페를 보내자 배우들이 하나같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 제작사는 너무 좋아.”
먹는 거 하나만큼은 아낌없이 지원해 줬다.
재석은 그간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그 돈을 영화나 배우들에게 투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영화 촬영도 잘되고 있으니 이 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았다.
재석은 최근 밖을 돌아다니면서 모델들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모델을 보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중에는 모델들 중에서 연예계에서 성공하는 이들이 생기는데, 이런 스타들을 미리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정확한 모델 활동 시기는 모르지만, 드라마 데뷔 시기는 알고 있었다.
‘아마, 내 기억대로라면 모델 소속사와는 이미 계약이 끝났고 지금쯤 배우 소속사를 찾고 있을 거야.’
재석은 이것을 고려해 미리 회사 차원에서 소문을 흘렸다. 모델 출신 중 연기자로 쓸 만한 인재를 모집한다고 말이다.
소문이 퍼지자 모델들의 개인적인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제이이브면 성공이 보장된 회사라고 할 만하다.
난리가 난 것은 모델들뿐만이 아니었다.
모델들을 데리고 있는 소속사들 역시 난리가 났다.
계약 만료 상황인 모델들을 괜히 들쑤신다며 모델 소속사 사장들이 재석을 만나기 위해 직접 행차를 할 정도였다.
“갑자기 절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정말 모른 척하시깁니까?”
“설마…… 요즘 돌아다니는 이야기 때문에 그러십니까?”
“잘 아시네요. 솔직히 상도덕이라는 게 있습니다. 괜한 이야기 퍼트려서 저희 애들 흔들어 놓지 마십시오.”
“흐음, 전 괜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닙니다. 모델들 중 연기에 잠재력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모델만을 두고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습니다. 저희는 언제나 배우가 되고 싶은 분들에게 열려 있으니까요.”
재석은 시치미를 뚝 때고 그와 마주했다.
“뭐, 그쪽 회사에서 불안에 떠는 이유는 모르지만, 저희 회사는 기본적으로 배우 소속사입니다. 연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받습니다. 물론 다른 회사들과 문제를 일으키며 받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크흠, 그 말 믿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이고, 물론이죠. 서로 상부상조하며 지내는 세상인데, 어떻게 제가 독식을 하겠습니까.”
재석은 그를 좋게 설득시켜 돌려보냈다.
다음 날 모델들 중에서 연기에 뜻이 있는 이들이 회사를 찾아왔다.
모델들은 프로필을 제출했고 연기력 테스트는 물론 카메라 테스트까지 마치고 돌아갔다.
재석은 테스트 영상을 모두 살펴보고는 딱 한 명을 지목했다.
“12번에게 연락해서 내일 점심때 오라고 해요.”
직원은 바로 연락을 취했다.
다음 날, 12번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반가워요, 내가 이 회사 대표예요.”
재석은 악수를 하면서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김종석 씨, 저희 회사 오디션에 합격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오디션에 합격은 했지만, 혹시 몰라 질문드립니다. 저희 회사와 계약하실 겁니까?”
“물론입니다.”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재석은 계약서를 내밀었다.
“일단, 오디션 영상을 봤는데 연기가 꽤 괜찮더군요. 완벽한 건 아니지만.”
“감사합니다.”
김종석은 재석 앞에서 바짝 얼어 있었다.
“미래의 스타가 그렇게 얼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재석은 슬쩍 웃으며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김종석은 훗날 ‘너의 목소리’, ‘키오’, ‘이방인’ 등 조금 독특한 설정의 드라마에서 활약하며 스타가 될 테니까.
“아, 하하, 하하.”
김종석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살짝 걱정이었지만 잠시 접어 두었다.
‘누구나 저럴 때는 있는 법이니까.’
재석은 김종석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연기 훈련을 시켜야 했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계약서 작성하시고 저화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가, 가야 할 곳이요?”
계약서를 쓰기 무섭게 움직인 곳은 바로 방송사 드라마국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제가 영입한 신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재석은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방송사 피디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안녕하십니까. 김종석입니다.”
계약서 쓰기 무섭게 달려와서 인사를 시켜 대니 김종석은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회사 대표가 가자는 데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눈도장을 찍고 다니는데, 한 사람이 다가왔다.
“오, 새로 키우는 신인입니까?”
“예, 홍 피디님,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밀고 있습니다.”
“이야, 마스크 좋은데?”
홍 피디는 김종석 얼굴을 이리저리 보더니 위에서 아래로 쭉 한 번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거의 모델인데.”
“맞습니다. 모델 하다가 넘어온 친구입니다.”
“허허, 그럼 연기는 좀 곤란하겠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마스크만 보고 아무나 신인으로 받은 줄 아십니까.”
재석의 말에 홍 피디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 그래요?”
눈빛을 달리한 홍 피디는 갑자기 재석에게 대본을 건넸다.
“이번에 조연 하나 필요한데, 여기 나와 있는 역할 한번 맡겨 보고 싶네요. 내일 봅시다.”
“아이고, 이거 인사만 드리려고 했는데 대본까지 주시다니.”
“전 대표님 사람 보는 눈 탁월하단 소문 이 바닥에선 파다합니다. 그러니 그 눈썰미 믿고 한번 맡겨 보는 겁니다.”
“뭘, 그렇게까지. 어쨌든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종석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감사함을 보였다.
계약한 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역할 하나 따낸 거다.
‘역시, 이 회사 오디션에 붙길 잘했어.’
제이이브에 들어간 배우 중에서 한류 스타보다 한류 스타 아닌 사람 찾는 게 더 어렵다는 소문이 있다.
회사 창립 이후 딱 한 사람만 회사에서 나갔는데, 그 사람은 지금도 회사에서 왜 나왔는지 두고두고 후회를 한다고 한다.
재석과 김종석은 방송사를 돌면서 인사를 돌린 후 회사로 돌아왔다.
“매니저는…… 차차 구할 거니까 당장은 임시로 돌려 막는 식으로 매니저가 붙을 겁니다. 그리고 배역은 이겁니다.”
재석은 대본에 어떤 배역이 그의 배역인지 확인해 줬다.
그러자 김종석은 눈빛이 바뀌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바로 배역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 솔직히 운이에요. 내가 담당하는 임민경도 바로 배역 못 땄어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김종석은 열심히 대본을 숙지했다.
집에 가서도 대본을 놓지 않았고 다음 날에는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길 정도로 배역을 연습했다.
그렇게 회사에 찾아가자 재석은 김종석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잠은 잤습니까?”
“세 시간 정도 잤습니다.”
“에휴, 거의 날 샜구먼.”
재석은 에너지 드링크를 하나 꺼내서 줬다.
“이거 위에 조금만 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