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요?”
“잠 많이 안 잤을 때 쓰는 응급 처방 쓸 거니까.”
그 말에 김종석은 에너지 드링크를 조금 들이켰다.
재석은 살짝 줄어든 에너지 드링크를 건네받고는 서랍에서 영양제를 하나 꺼내 그 안에 부었다.
그리고 잘 흔들어서 다시 돌려줬다.
“이거 먹으면 피곤한 건 좀 사라지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배우는 자기 몸 관리 못하면 빵점입니다. 다음부터는 몸 관리에 신경 쓰세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김종석은 그걸 한 번에 들이켰다.
그는 30분쯤 지나자 머리가 상쾌해지는 걸 느꼈다.
“대표님 이거 뭡니까?”
“응급 처방 피로 회복제. 하지만, 자주 쓰시면 안 됩니다. 피로 회복에 최고는 잘 먹고 잘 쉬는 것입니다.”
“그래도 궁금합니다. 어떤 걸 썼는지.”
“비밀.”
재석은 말해 주지 않았다.
이걸 알면 배우들은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려고 간혹 사용하려고 한다. 이건 강제로 몸의 피로를 억누르는 임시 조치에 불과했다.
김종석은 재석에게 더 묻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건 피로 회복제가 아니라 당장 있을 홍 피디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오늘 홍 피디와 만나 연기를 펼쳐야 했다.
“흐음, 뭐랄까 겨우 턱걸이?”
열심히 연습했어도 결과는 겨우 턱걸이다. 그나마 대본을 주고 그 연기만 하라고 하니까 이 정도다.
“홍 피디님, 신인이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맞지만…….”
“마스크가 이렇게 좋은데 이건 얼굴 빨로 밀어붙여야죠. 그리고 연습은 제가 책임지고 더 시키겠습니다. 나중에 대본 리딩 때 만족 못 하시면 교체하셔도 좋습니다.”
“뭐, 전 대표가 그렇게 말하신다면 믿고 맡겨 보죠. 턱걸이 수준이지만, 리딩까지는 시간도 있고…… 그때 봐서 결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급박하게 일을 치렀지만, 어쨌든 시간은 번 셈이다.
‘꼭 민경이 데뷔시키는 것 같네.’
정말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재석은 종석에게 한마디 했다.
“연기 학원에 등록시킬 테니까 내일부터 그곳에서 연습하세요. 위치는 여기에 나와 있어요.”
“예, 대표님.”
김종석은 재석에게 명함을 건네받았다.
뒷면을 보니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오늘 당장 찾아갈 생각으로 약도를 유심히 바라봤다.
“배우는 몸이 재산입니다. 오늘은 푹 자고 내일부터 가세요. 그리고 헬스장 끊어 줄 테니까 단 하루도 빠지지 말고 운동해서 덩치부터 키워요.”
재석은 김종석이 또 무리를 할까 봐 내일부터 찾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김종석은 그 뜻대로 내일 찾아갔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학원에 찾아가 연기 훈련을 받았다. 재능도 재능이고 본인도 열정이 넘치니 대본 리딩에서 좋은 결과를 볼 것 같았다.
“후우, 이걸로 한 건 해결이고. 하루빨리 매니저도 구해야겠어.”
당장은 로드들이 돌아가면서 마크해 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김종석은 어찌 되었든 재석이 하라는 대로 했다.
집, 연기 학원, 운동으로 하루를 마무리했고, 한동안은 이런 사이클로 일상을 보내야 했다.
아무리 바빠도 꾸준히 운동으로 몸을 키워서 남자 냄새가 나게 만들어야 했다. 지금의 몸은 너무 야리야리해서 곤란했다.
한편 문자영은 새로운 드라마 때문에 고민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민경을 찾았는데 때마침 재석도 함께하고 있었다.
“두 분이 같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괜찮아, 자영아. 우리 집에 처음이지? 어서 앉아. 그래, 뭐가 그렇게 우리 귀여운 자영이를 괴롭히고 있을까?”
“다른 게 아니라 이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문자영은 나름 연기로 노하우가 쌓였는데도 불구하고 민경을 찾았다. 이건 그녀가 안 해 본 연기를 한다는 거다.
“자영아, 대본 좀 줘 볼래?”
“여기요.”
먼저 민경은 대본을 한 번 살폈다.
그리고 대본을 본 후 생각에 빠져들었다. 반대로 재석은 그 대본을 쭉 보더니 한마디로 요약했다.
“이 독한 년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하냐는 거지?”
“예, 사장님, 정말 모르겠어요.”
“걱정 마라, 민경이가 잘 보여 줄 거다.”
민경은 첫 장면부터 드라마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을 했는지 혼자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연기를 시작했다.
“오빠, 이거 상대역 해 줘.”
“알았다.”
“누나 내 밥은?”
“지금 저 소리 안 들려? 이게 지금 마지막 밥이 될지도 몰라.”
대본상에는 옆방에서 부부가 죽이네 살리네 하는 소리가 적혀 있었다.
“누나, 집 나갈기가?”
“아마도.”
“누나 없으면 누가 내 밥 차려 주는데.”
“알아서 해 먹어.”
민경의 연기는 그야말로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우와, 역시 대단해요.”
문자영은 민경과 재석의 연기가 놀라웠다. 둘이 서로 호흡을 맞춰 하는 연기가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사장님은 정말 연기 그만두신 거예요?”
“안 해. 이렇게 연기자 상대역은 하겠지만, 부업으로도 안 할 거야. 힘들어.”
한 번 해 봤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니 안 할 거다.
“아쉽네요. 나중에 같은 작품에서 저랑 같이할 수도 있는데.”
“아니, 됐어. 상대역만 하면서 생긴 연기 실력이다. 그게 뭐 대단하다고.”
“오빠, 실력은 상대역이라면 세계 제일이야.”
“크흠.”
민경이 재석을 추켜세워 줬다. 그만큼 신뢰 가는 사람이라는 증명이었다.
“저도 언니 같은 매니저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런, 매니저 만나면 힘들어.”
“왜요?”
“이렇게 되니까.”
민경이 재석의 팔짱을 끼자 재석이 깜짝 놀랐다. 다만, 문자영은 별로 놀란 기색이 없어졌다.
“에이, 그건 별로네요.”
이미 문자영은 재석과 민경이 사귀는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제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민경이 이야기한 것 같았다.
“태국 여행 온 뒤로 비밀이 없어지네.”
“뭐, 어때요. 이제 좀 알려진다고 해도 상관없잖아요.”
벌써 수년이 지난 상황에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이제 공개를 당하든 안 당하든 그대로 가는 거다.”
이미 태국 여행 때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황이다.
“혹시 신지경도 알아?”
“알아요. 좀 늦게 알았지만.”
재석은 배우들 사이에 좀 퍼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철저하게 비밀이 유지될 사이였다.
‘회사 여자들은 비밀은 철저하게 유지할 테니까.’
의리 넘치는 여자들만 계약을 했고 벌써 계약도 한 번 갱신했다.
적어도 재석이 있는 동안에는 회사를 바꿀 마음이 없을 거다.
“사장님, 걱정 마세요. 절대로 비밀로 해 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밝혀진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은 재석이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비밀을 지켜 준다고 동조해 주는 사람이 많다면 더 좋았다.
‘그럼, 아재 촬영장이나 한번 가 봐야겠네.’
아직 그쪽은 한참 일이 진행 중이었다.
재석과 민경이 보여 준 연기를 보고 문자영은 뭔가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인지 곧바로 연습을 한다면서 집으로 급하게 돌아갔다.
“빨리도 가네.”
“뭐가 급히 떠오르는 게 있는 모양이죠. 어차피 급조한 연기인데 이걸 참고할 만할까요?”
“다음에 확인하고 이야기해 봐야지.”
재석은 다음 주간 보고를 통해 문자영이 연구한 결과를 보기로 했다.
다음 날, 재석은 신지경의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다. 바닥 깨고 로우킥에 출연하면서 인지도가 올라 여러 가지 제의가 들어온 탓이었다.
“들어온 광고가 몇 개라고?”
“10개가 넘습니다.”
“시트콤 마지막 촬영은?”
“다음입니다.”
“그쪽에서 포상 휴가 보내 준대?”
“이미 일정 잡혀서 여권 사본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럼, 휴가 일정 하루 지나서 일정 잡아. 그리고 그사이에 최종 가격 조율하고 진행해!”
“예!”
신지경은 정말 떴다.
뜬 장면은 연기력이 아닌 몸으로 뜬 거지만, 그래도 기회가 찾아왔다.
신지경은 청순 글래머의 대명사로 인터넷상에서 화재가 된 상태였다.
재석은 조심스럽게 신지경을 찾아갔다.
“지경아, 일단 넌 뜨긴 떴다. 조금 아쉬운 형태긴 하지만.”
“괜찮아요, 사장님.”
신지경은 쿨하게 인정했다. 연기로 뜨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로우킥 끝나고 더 혹독하게 연기 연습을 하는 건 어떨까 해.”
“진짜요?”
“그래, 그러지 않아도 너한테 들어온 작품이 하나 있다. 시트콤에서 네 연기를 제대로 봐 준 드라마 제작사가 있었거든. 그쪽에서 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기를 원해.”
신지경은 너무나 좋아했다. 시트콤의 인기 덕분에 여주인공 자리까지 섭외가 왔으니 말이다.
“지경아, 이제는 진짜 시험대에 올라온 거야.”
시험대라는 말에 신지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시험대라면…….”
“네가 그저 그런 연기자에서 멈출지 아니면 저 위로 솟아오를지가 결정되는 그런 시험대. 주연이란 자린 그런 자리야. 능력 없으면 쫓겨나는 그런 자리.”
신지경이 활발히 활동할 시기가 찾아오긴 했다.
이전까지는 아역만 했지만, 시트콤을 통해 성인역으로 데뷔한 상태.
여기서 얼마나 올라가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
‘전보다 더 끌어올려야 한다. 신지경의 연기력만큼은 말이야.’
“내일부터 대본 리딩까지, 그리 많은 날이 남지 않았어. 그리고 아직 제의에 대해 확실히 대답해 주지도 않았고. 너의 의사에 맡길게. 어떻게 할래?”
“할게요.”
“그럼, 내일부터 바로 연습 시작하자. 연기로 인정받는 것만 생각하며 달리는 거야.”
“꼭 인정받는 연기를 보여 드릴게요.”
신지경은 다시 한번 다짐을 하면서 의지를 불태웠다.
‘지경이 입장에서도 열 받을 만하지. 그렇게 노력했는데 연기가 아닌 다른 걸로 떴으니.’
사람의 의욕에 불을 지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재석은 신지경의 의지에 불을 지폈다.
언젠가 다가올 때를 위해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신지경은 미래의 스타다. 해외에서도 어느 정도 반응이 있었다. 그래서 재석은 훗날 신지경을 해외로 진출시킬 생각도 하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어.’
그녀의 연기가 부족하다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배우는 항상 연기를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했다.
“연기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지금 너한테 10건의 광고 제의가 들어왔어. 비록 시트콤 영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지금은 그쪽과 협의 중인 단계야.”
“어머, 10건이나요?”
신지경은 10건이나 되는 광고가 자신에게 들어왔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많은 제의가 들어온 적은 처음이었다.
“이 정도면 민경이가 인기 끌던 시절과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야.”
“네? 민경 언니요?”
민경은 그녀에게 롤 모델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민경과 비슷한 수준이라니.
신지경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경아, 배우는 항상 연기가 최우선이다. 광고는 부가적인 것에 불과해. 그러니 정신 차려라.”
재석의 말에 신지경은 놀란 감정을 빠르게 수습했다.
“네, 사장님.”
“그럼, 대본은 여기에 놓고 가마. 연기를 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민경이 지금 한가해. 자영이도 드라마 때문에 한 번 왔다 갔다.”
재석의 말에 신지경은 자신도 한 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본을 다 파악하고 난 뒤에 찾아가는 거야.’
신지경이 바로 대본을 펼쳐 들자 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
“예, 사장님 살펴 가세요.”
“그래.”
재석이 사라지고 난 뒤, 신지경은 다시 대본에 집중했다.
밖을 나온 재석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경이도 슬슬 많이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네.”
며칠 뒤, 신지경은 문자영과 마찬가지로 민경을 만나고 돌아갔다. 신지경은 민경에게 연기에 대해서 물었고, 민경의 조언을 참고하며 자신의 배역을 연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