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이요?”
도중기는 그 말에 정말 놀랐다.
그간 조연 정도만 해 왔는데 주연으로 드라마 제의가 들어왔다는 말에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일단, 대본은 여기 있습니다. 한번 보시고,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대본 숙지는 확실히 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사장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제 기대에 부응하고 말고는 상관없습니다. 중기 씨, 이제는 스타 돼서 돈 많이 벌어야죠. 중기 씨가 스타 되는 게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입니다.”
재석의 말에 도중기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도중기에게 재석은 꿈을 이루게 해 준 은인이었다.
데뷔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주연이라는 자리에 앉게 해 줬으니 말이다.
“중기 씨, 이번 작품에서 연기 한번 확실히 보여 주세요. 그래야 다음에도 좋은 작품을 만나지요.”
“예! 확실히 하겠습니다.”
아직 도중기는 확실한 스타라 말하기엔 애매한 위치였다.
하지만, 방송 관계자들에게는 스타가 되기 위한 가능성들을 충분히 보여 줘 왔다.
재석은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첫 주연작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겁니다.”
봉투에는 한자로 금일봉(金一封)이라 적혀 있었다.
“이,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금일봉…….”
“이런 거 처음 받아 보는 것 같네요.”
“예, 뭐, 받을 일이 없어서.”
“매니저랑 연락해서 같이 소고기라도 사 드세요. 저는 이제 집에 가야 해서.”
“사장님, 살펴 가십시오.”
재석은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도중기는 다음 날 바로 캐릭터 연구부터 시작해서 대본을 파악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재석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 * *
어느덧 영화 아재가 개봉했다.
입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영화 ‘아재’로 인해 아저씨의 구분이 둘로 나뉘어졌다.
오빠 같은 아저씨, 그냥 아저씨.
이렇게 말이다.
나이 들었어도 멋지면 오빠 같은 아저씨였고, 나이만 먹었으면 평범한 아저씨인 거다.
영화 ‘아재’의 파급력은 새로운 구분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덕분에 원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영화가 흥행하고 있는 가운데, 원진은 이제 일본 활동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영화도 끝났고 이제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때라는 거다. 물론 원진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소속사는 재석 회사의 일본 지사였다.
원진으로서는 재석의 일본 지사가 최고의 선택이었다.
계약 조건은 한국식으로 되어 거부감이 없었고, 직원들 모두 한국어를 잘해서 의사소통을 비롯한 일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이 없었다.
“역시 일본 지사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다, 거위야.”
물론, 지사가 너무 잘나가도 좋지 않을 수가 있었다.
으레 그렇듯 돈이 생기면 딴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오미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재석을 철처하게 회사의 주인으로, 자신은 그 밑의 직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참 충성심 높은 지사장인 것이다.
때문에 재석은 나오미의 연봉도 확실히 챙겨 줬다.
* * *
재석이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금은방이 눈에 들어왔다.
“흐음.”
재석은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진 모습에 가만히 금은방을 바라봤다.
‘오래까지 하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금은방의 불이 팍 하고 꺼졌다.
“문 닫는 시간인가 보네.”
금은방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벌써 그렇게 됐나.”
재석은 홀로 뭔가를 다짐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재석이 집에 도착해 벨을 누르려는데, 채 누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민경이었다.
재석의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마중한 것이다.
재석은 덥석 안기는 민경을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다녀왔어요?”
“네, 다녀왔습니다.”
“엇, 수상한데요? 평소에 안 쓰던 존댓말을 쓰고.”
“아니, 그냥 한번 해 봤어.”
“오늘 뭐 했어? 수상해.”
민경은 재석을 살짝 째려봤다.
흘겨보는 민경의 눈빛이 귀여워 재석은 웃음이 나왔다.
“그럼, 일평생 반말만 써야겠네.”
“아니지, 그건 아니지. 오빠가 나한테 잘못했을 때는 존댓말 써야 하는 거야. 근데 지금은 수상해. 다른 여자 만나고 왔어?”
당돌하게 물어보는 민경이었다.
재석은 당황하지도 않고 민경을 꼭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너만큼 예쁜 여자가 어디 있다고, 내가 딴 여자를 만나냐.”
“피, 말 이쁘게 잘해서 넘어간다.”
둘은 그렇게 집으로 들어갔다.
재석은 조용히 민경이 차려 준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제 해야지.’
홀로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재석의 모습에 민경이 물어 왔다.
“오빠, 오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내일 일 생각했지.”
“오빠, 고민 있으면 이야기해. 우리 둘 사이에 서로 못 할 말이 뭐 있겠어.”
그 말에 재석은 자리에 일어나 민경에게 다가갔다.
“밥 먹다 말고 뭐야.”
“그냥 네가 너무 예뻐서.”
“그럼, 밥 먹고 하세요.”
재석은 자리로 돌아가 식사를 마저 끝냈다.
다음 날, 재석은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며 조금 일찍 회사를 나섰다. 그 사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직원들은 묻지 않았다.
며칠이 더 지나고 재석은 민경과 함께 외식을 했다.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재석은 민경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민경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오빠, 내가 아는 오빠는 꽤 직설적이거든. 그런데 요 며칠 오빠 하는 행동을 보면 뭔가 감추는 게 있어.”
“커흠.”
재석의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은 민경에게 확신을 줬다.
“딱 걸렸어. 뭐야, 빨리 말해.”
“아니, 내가 뭘 숨겼다고.”
“오빠를 본 게 몇 년인 줄 알아? 햇수로 10년이야, 10년! 이제는 오빠 얼굴만 뭔가 감추는 게 있구나, 지금 거짓말을 하는구나 딱 알거든?”
재석은 민경의 말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거봐, 행동하는 게 티가 팍팍 나잖아.”
“그냥 기다려 주면 안 되냐. 꼭 그렇게 초를 쳐야겠어?”
“10년을 기다렸는데 초를 치다니, 오빠. 난 급해 죽겠는데.”
민경은 뭐가 그리 급한지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한껏 분위기 좀 잡으려고 했건만.”
“어서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
민경의 재촉에 결국 재석은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할 말은?”
민경은 그 상자의 정체가 뭔지 알아차리고 곧바로 재석의 말을 기다렸다.
“에휴, 그래. 이왕 이렇게 됐으니 할 말 해야지. 민경아, 나랑 결혼해 줄래?”
재석의 말에 민경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지 끼워 주세요.”
“안 돼. 대답부터.”
재석도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민경의 답을 꼭 들어야 했다.
“쪼잔하게. 반지 좀 끼워 주고 답을 듣지.”
“너도 분위기 좀 잡으려는데 초를 쳤잖아.”
“알았어, 내 대답은 ‘좋아요’야. 그러니까 어서.”
재석은 결국 반지를 꺼내 민경의 손에 끼워 줬다. 근데 민경은 반지를 끼우자 인상을 찡그렸다.
“반지가 너무 커.”
헐렁헐렁해서 빠지게 생겼지만, 반지를 빼진 않았다.
“어디서 맞췄어? 이거 사이즈 줄여야겠어.”
“아, 눈대중으로 했는데 안 맞네. 민경아, 미안.”
“그래도 고마워.”
어딘지 감성 부족한 커플이었다.
결국 재석은 다음 날 금은방으로 가서 반지를 다시 맞췄다.
민경이도 함께 갔는데, 직원은 민경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머, 어머, 세상에! 임민경 씨, 아니에요?”
“네, 안녕하세요. 이 사람이 준 반지 다시 맞추려고 하거든요. 사이즈가 좀 안 맞아서.”
“어머나, 세상에. 걱정 마세요. 저희가 다시 해 드릴게요.”
직원은 민경의 손가락 사이즈를 확인했다.
민경은 재석에게 말했다.
“오빠, 다음부터는 그냥 같이 와요. 혼자서 가서 고생하지 말고.”
민경의 말에 재석은 할 말이 없어졌다.
며칠 뒤, 민경은 반지를 다시 받았고 그걸 한번 껴 보고는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아니, 왜?”
“이거 프러포즈 반지잖아. 잘 모셔 놔야지. 그리고 비싼 거 차고 다니면 부담이야. 잃어버릴까 봐.”
민경을 위해서 큼지막한 다이아가 박힌 물건을 준비했는데, 그걸 항시 차고 다니기에는 확실히 부담이었다.
“이제, 프러포즈도 받았으니 다음 계획도 착착 진행하자.”
착착 진행한다는 말에 재석은 조금 의아해했다.
재석이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민경이 말했다.
“오빠, 그럼 우선 가족들한테 정식으로 인사하러 가자.”
“아, 음, 그래 가야지.”
재석은 그제야 민경이 말한 ‘계획’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부모님, 광주에 계시다 했지?”
“어, 그쪽에 계시지. 친구들도 다 거기 있고.”
“그럼, 얼른 시간 만들어요. 광주에 가게.”
민경은 활짝 웃어 보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진행하려는 것이다.
“벌써?”
“그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빠를수록 좋지요. 만나야 할 분들도 많고요. 가족들뿐만 아니라 결혼식 초대하는 분들도 만나야 하잖아요.”
민경은 반지를 받은 순간부터 뭔가가 바뀌었다.
‘태세 전환 정말 빠르다.’
사람이 저렇게 확 하고 바뀔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부터 일정 빠듯하게 짤 거니까 오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아요. 제가 다 할게요.”
“알았다.”
재석에게는 열심히 하던 일만 하라는 거였다.
그리고 정말 민경은 홀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뭔가를 알아보고 다녔다.
민경이 연기 말고 다른 일에 이 정도까지 열정적으로 매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바빴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다니는 민경은 항상 웃고 있었다.
행복감에 가득 찬 미소가 그녀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재석은 민경과 함께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민경의 입장에서는 시댁으로 찾아가는 거였다.
“후우.”
민경은 긴장으로 떨리는 마음을 심호흡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민경아, 우리 가족들 너 안 잡아먹어.”
“어머, 오빠. 모르는 소리 마세요. 여자들한테 시댁으로 찾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르면서.”
알 리가 없었다.
회귀 전에는 혼자 살았으니 결혼할 여자를 부모님께 소개시켜 드리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결혼을 하겠다고 하는 게 처음이라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