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얼굴에 철판 한번 깔고 원하는 걸 얻었으니 남는 장사였다.
피디가 말한 날짜에 맞춰 재석은 오디션장을 찾아왔고 찾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부터 했다.
“어디 보자.”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키가 큰 여자를 찾았다.
‘역시 신체 비율 하나는 끝내주네.’
재석은 그 여자에게 다가가 명함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전재석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아주 좋은 인상을 하고 있어서요. 혹시 생각 있으시면 저희 회사를 찾아주세요.”
“근데, 이 회사, 배우 소속사인가요?”
“맞습니다. 소속된 배우들이 몇 명 있습니다. 임민경, 송근석, 김명진, 장강호 그 외에도 많죠.”
명함을 받은 그녀는 재석이 말한 배우들의 이름을 듣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재석이 말한 배우들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었다.
“Oh, my god!”
너무나 충격을 받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영어로 감탄사를 토해 냈다.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재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본론을 말했다.
“생각 있으시면 오디션 끝나고 보죠. 물론 오디션도 잘 보시고요.”
재석이 그렇게 물러가자 그녀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오디션.”
그녀의 이름은 김소현이었다.
흔한 이름이지만 소현은 그 이름을 활동명으로 삼아 미국에 진출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위상을 달리했다.
그녀는 머블 영화에서 닥터 지라는 배역을 받았고, 그 역할로 한국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 줬다.
한국계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미국에 진출해서 제대로 성과를 낸 거다.
“몇 년 안 남았네.”
머블에 투자한 돈 때문에 기억난 인물이었다.
꾸준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배우라서 꼭 붙잡아야 했다.
그럼에도 재석이 강하게 어필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람이다. 분명 자신이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녀는 정말 오디션을 보고 나서 재석의 회사에 바로 달려왔다.
명함 한 장 들고 찾아와서는 그 명함을 보여 주고 재석을 만났다.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네요.”
“오디션 끝나자마자 왔습니다.”
“그래요.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제대로 저희 회사와 계약을 하시겠다는 거죠?”
“예, 물론이죠. 꼭 이 회사와 하고 싶습니다.”
재석의 회사는 스타 발굴에 상당한 재주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소속된 배우들은 스타이거나, 곧 스타가 될 이들이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
일단, 민경을 성공시켰고 김명진을 이끌었으며 한때 국민 여동생 타이틀을 단 문자영도 있었다.
거기에 반보영과 박신연, 송근석은 현재 해외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 있어서 한동안 국내 일정이 없을 정도다.
‘이곳은 들어와서 뜨면 해외 진출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믿음이 아니었다.
“일단, 이번에 드라마 조연 오디션을 보셨죠.”
“네.”
“거기서 꼭 합격할 것 같습니까?”
“그건, 잘…….”
소현은 아직 확신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3년간 연예계를 떠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연기 연습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감이 떨어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뭐, 합격 여부 확인은 어렵지 않죠.”
재석은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바로 전에 만났던 피디에게 걸었다.
“아이고, 피디님. 오디션 결과 좀 알고 싶어서 전화드렸는데요. 누가 뽑혔는지 말이죠.”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무슨 소리가 들리며 재석이 미소를 지었다.
“아, 어떤 배역이 알고 싶냐고요.”
전화를 받는 와중에 재석이 소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현이 입을 열었다.
“박 형사 역이요.”
“혹시 박 형사 역에 캐스팅 확정됐나 해서요.”
(어디……. 확정됐네. 박 형사 역에, 김소현. 근데, 이 친구 아까 명함 준 친구 아니었나?)
“예, 맞습니다.”
(아이고, 신인 잡는다더니 배역 따낸 신인 용케도 잡았네.)
“하하, 제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거든요. 그럼 다음에 한잔하시죠.”
(하하하, 그러지.)
피디와 전화를 끊고 재석은 소현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름이 뭐죠?”
“김소현이요.”
“연예계에 그런 이름은 흔합니다. 성은 빼고 소현이란 예명을 활동명으로 하는 건 어떤가요?”
“아, 괜찮아 보이네요. 그냥 성만 빼면 말이죠.”
“그리고 캐스팅에 관해서는 합격이랍니다.”
“끼야야야!”
합격이라는 말에 그녀는 정말 좋아했다.
키가 170이 넘는 여인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이 조금 신선하기도 했다.
“그럼, 합격도 했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네!”
소현과의 계약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미 오디션에 붙은 상황이라 달고 다닐 매니저만 구하면 된다.
한국에서는 한국 매니저를, 미국에서는 주명진이 매니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재석이 주명진을 미국으로 보내려 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다음 날 주명진은 재석에게 미국에 가겠다고 했다.
“힘든 결정 감사합니다.”
“아니, 힘든 결정 아니야. 큰딸이 미국 유학 꼭 가고 싶다 하더라고. 벌써 혼자서 SAT 준비도 하고 있었어. 나만 몰랐지 뭐야.”
“공부 잘하는 거야 이미 알고는 있었는데, 벌써 준비까지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뭐, 덕분에 잘됐지. 그래서 일단 딸이랑 둘만 가려고.”
“형수님은요?”
“아직 아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안 될 것 같아.”
“아들도 공부 잘하죠?”
“뭐, 좀 해.”
“그럼, 아들이 유학 가겠다고 하면요?”
“그럼, 나보고 거기서 10년 가까이 있으라는 말이야?”
재석은 회귀 전 주명진 자식들의 유학 생활은 10년이 넘게 계속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드님 유학 가면 형수님도 같이 가실 거고. 그러면 네 가족 함께 있는 건데요?”
“그렇게 되나.”
결국 주명진은 재석에게 설득당해 버렸다.
“그럼 언제 가면 되는데?”
“음, 큰딸 학교 맞춰서 하세요.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요.”
“알았다. 그럼 내년에 가야겠네.”
당장 급한 건 아니니 차근차근 준비하는 편이 좋았다.
얼마 뒤, 재석은 ‘미남이네’ 4회가 방영된 직후 중국의 반응을 확인했다.
‘확실히 박신연이 통하고 있어.’
보고서에 따르면 박신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송근석이 일본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머리긴 남자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탓에 송근석이 중국 땅을 밟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일본에서도 충분히 돈 많이 버니 문제는 없고.’
재석은 바로 박신연의 중국 진출을 준비시켰다.
곧바로 중국어의 회화를 준비시켰고, 중국 현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전 작업을 시작했다.
‘미남이네’ 방송이 계속될수록 박신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중국 지사를 통해 일거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 좋았어.”
재석은 흐름을 놓치지 않고 박신연을 곧바로 중국으로 보냈다.
당장의 중국 일정은 이틀, 잡지 촬영 스케줄이었다.
물론 박신연의 일정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미남이네’의 파급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박신연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미남이네’가 끝날 때에는 인터뷰만 3일 내내 해야 할 정도였다.
그게 끝나고는 광고를 세 개나 찍었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광고를 좀 찍어서 돈을 짭짤하게 벌어들이고 있었다.
“나 왔어.”
“오빠!”
재석이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민경이 재석을 맞이해 줬다.
신혼의 재미를 즐기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한편 민경도 걱정은 있었다.
“오빠, 나한테 들어온 일 있어?”
“하아, 그게 말이야. 요즘 뚝 줄었어.”
“에휴,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없을 줄이야.”
결혼했다고 이렇게 일거리가 싹 사라질 줄은 예상치 못했던 민경이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없지만, 중국은 달라.”
“중국?”
“네가 출연한 여인심계, 그거 덕분인지 중국에서 작품 하나 더 하자고 하던데.”
“진짜?”
중국에서 작품 하나 더 하자면 할 수 있는 민경이다.
“어떤 거야?”
한국에서는 일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해외에서는 파워 있는 그녀였다.
“그래도 다행이네. 중국에서라도 불러 줘서.”
“그리고 한국에서도 너 결혼했다고 안 찾는 거 아니야.”
“응? 그럼 뭔데.”
“출연료 이야기하면 그쪽에서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런다.”
이제는 민경의 몸값이 한국에서는 감당이 안 되는 거다.
“아, 몸값을 떨어트려야 하나.”
민경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실 돈은 지금까지 많이 벌어 놓았고 돈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몸값이 국내 방송사의 한계치를 넘긴 상황이라면 그 한계치에 맞춰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오빠, 나 그냥 상황에 맞게 받을게. 좀 가격 떨어져도 어쩔 수 없고.”
“진짜? 그렇게 하면 네가 너무 없어 보이잖아.”
“오빠가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민경은 정말 아무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흐음, 그럼 중국 쪽 드라마는 한번 출연해 보고, 연극 한번 해 볼래?”
“연극?”
민경은 연극을 할 일이 없었다.
드라마만 해도 불러 주는 곳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가격을 못 채우면 공짜로 연기하면서 이미지 관리하는 거야. 난 돈보다 연기에 더 관심 있다. 그렇게 하면 가격이 자연스럽게 떨어져도 없어 보이지 않고 좋지.”
“그럼, 연극은 한 번만 해?”
“아니, 몇 번 더 해야지. 그래야 소문이 나지. 일단 일이 많은 건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니 하나만 해도 충분해.”
“흐음, 좋아.”
재석은 민경의 몸값을 자연스럽게 떨어트리는 계획은 곧바로 진행되었다.
물론 어떤 연극을 할지는 전적으로 민경에게 맡겼다. 재석은 그저 연극 대본을 손에 쥐여 주며 고르게 했다.
그리고 결정이 되자 곧바로 그쪽과 연결을 했고 돈 안 받고 연극에 출연하고 싶다는 민경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쪽이 어찌나 좋아하는지, 전화상으로도 환호성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그렇게 재석은 민경을 데리고 극단으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연극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이들이 있었다.
“세상에, 임민경 씨가 이 자리에 오시다니.”
“와, 빛이 난다. 빛이 나.”
무보수로 하는 일이라 조금 의욕이 떨어지는 민경이었지만, 연기 실력을 갈고닦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순 있었다.
그렇게 민경은 대학로 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자 의외로 재미가 붙었다.
연극은 연극만의 재미가 있었다.
민경은 연기를 절대 허투루 하지 않았고, 덕분에 금세 연극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재미 붙였네.’
민경은 연극 연습하러 회사 출근하듯이 그곳에 도장을 찍었다.
재석은 민경을 출퇴근할 때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결혼 후 일거리가 뚝 떨어졌다고 의기소침하던 민경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오빠, 거기 사람들 너무 재미있어.”
“아이고, 아주 푹 빠지셨네.”
“응, 돈 안 받아도 이렇게 기분 좋게 연기할 수 있을 줄은 전혀 몰랐어.”
“그쪽 연극은 언제 시작한데.”
“이주 뒤에.”
“이런저런 질문들 안 해?”
“아주 많이 해 어떻게 만났냐. 방송 쪽은 어떠냐. 혹시 그 회사에 들어갈 수는 없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