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님, 이 바닥 좁습니다. 그 소식이 제 귀에 안 들어올 줄 아셨습니까? 손목에 못 보던 비싼 시계가 있네요.”
순간 피디는 손을 뒤로 감췄다.
“이 사실을 국장님이 아시면 징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내가 받았다는 증거 있습니까?”
“증거, 증거라……. 굳이 필요 없죠. 소문만 있어도 방송사 이미지 무너지고, 언론사 통해서 기사가 퍼지면 보직 해임은 충분할 것 같은데요.”
방송사도 연예계의 한 부분이다. 이미지에 타격을 받으면 한동안 시끄러워질 게 뻔하다. 징계가 가볍지 않을 거다.
“아무리 피디라고 하지만, 방송사에 타격을 줘서 살아남는 사람 못 봤습니다.”
“큼.”
“돌려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다시는 이 방송사에 제 소속사 연기자들이 발을 들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한류스타 중 대다수를 손에 쥔 제이이브다. 그런 회사와 등을 돌린다는 건 방송사에게는 큰 피해다.
“그리고 유진석 씨 여기서 예능하시죠? 당장 하차 준비하겠습니다.”
“네?”
갑자기 드라마국에서 예능국으로 불길이 옮겨붙게 만들 수 있다. 그가 프로그램에서 빠지면 예능국 국장이 가만 안 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유진석은 대체 불가능한 국민 MC다. 그 사람이 빠지면 예능국장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니, 당장 드라마국에 찾아와서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겨우 로비 하나 때문에 드라마국과 예능국이 뒤집어질 판이니.
“아니, 왜 그러십니까.”
재석의 손을 붙잡으려고 하자 그는 손을 뺐다.
“그 시계를 찬 손으로 절 잡지 마십시오.”
“당장 빼겠습니다.”
시계를 곧바로 풀고 주머니에 넣더니 재석의 손을 다시 잡았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럼, 이전 상태로 되돌리십시오.”
“예, 물론이죠.”
그 피디는 곧바로 물건들을 돌려주고 그쪽에 미안하다며 답신했다. 상대방이 이유를 묻자, 제이이브 사장이 화를 내며 찾아왔다는 것 말고는 그 이상 이야기할 수 없었다.
배우 쪽에서 제이이브의 영향력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에 있는 한류스타 절반을 제이이브가 손에 쥐고 있다. 또한 다른 한류스타들도 제이이브가 닦아 놓은 해외 지사를 이용하는 배우들이 있다.
거기서 태클이 들어가면 한 발 빼야 한다.
재석은 다시 회사로 돌아오자 민철이 물었다.
“방송국에서 뭐라고 합니까?”
“원래대로 돌려준다더라.”
“이야, 놀랍네요.”
“내가 협박 좀 했어. 유진석 뺀다, 언론에 흘린다, 다시는 그쪽 드라마국에 내 배우들 안 들어갈 거다. 이랬지.”
“이야, 초강수 두셨네. 피디가 벌벌 떨었겠는데요.”
“그러더라.”
“이야, 역시 소속 배우들이 짱짱하니까 피디 정도는 껌이네요.”
“됐다. 이런 것도 한 번이지 다음에는 안 통해.”
“왜요?”
“한류스타 빨로 밀어붙인 거지 한국 방송계가 더 커지면 지금보다 더 많은 한류스타가 나올 거야. 그럼 점점 의미가 없어져.”
“선배는 해외로 진출하는 배우들이 계속 나온다는 거예요?”
“맞아. 과거에 잘나갔던 이들도 나갈 거고, 신예들도 나갈 거야. 그럼 너도나도 한류스타가 되는 거지.”
“그건 저희만의 무기가 사라지는 거라 좀 아쉽네요.”
“그래도 이렇게 한 번 위협해 놓으면 우리 회사를 만만하게 보진 않을 거야.”
“근데 한류스타라고 하지만, 연기 잘하는 배우는 언제나 인기 좋잖아요.”
“그거야 한때지. 영원히 그러진 않잖아.”
“뭐, 그렇죠.”
“그리고 여배우는 결혼하면 사람들 찾지도 않아. 남자와 달라.”
“그럼 형수님 일거리?”
“민경이는 몸값이 너무 올라서 그런 거고.”
“아…….”
“그 몸값 감당하려면 미국으로 가야 할걸. 세금 무지하게 떼이겠지만.”
미국만큼 몸값을 세게 부르는 곳도 없다.
물론 인기 없는 연기자는 별로 대우를 못 받지만, 미국 톱스타들의 몸값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이다.
“에이, 어디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 쉽게 캐스팅되겠어요.”
“쉽지는 않지.”
하지만 영어 잘하고 연기도 잘한다면 캐스팅될 수 있다. 그걸 보여 준 배우가 한둘이 아니다. 물론 영어를 못해도 발음을 죽어라 연습해서 그 대사만 확실히 소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도전해 볼 만하지.”
민경 정도면 충분하다. 거기에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깨야 한다.
‘일단 지금 미국에 어떤 드라마가 있는지, 영화는 어떤 게 있는지 파악하고 난 뒤에 봐도 늦지 않으니까.’
거기에 민경이 아니더라도 미국 진출을 하는 이가 한 명 더 있으니 말이다.
재석은 제작사 쪽에서 보낸 영화 시나리오가 예전보다 부쩍 늘어난 것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이거 너무 많이 들어오는데.”
제작사가 단독으로 제작하고 배급까지 할 수 있는 곳은 좀 있지만, 자금력까지 빵빵한 회사는 재석의 회사가 유일했다.
덕분에 감독들도 그런 건실한 회사를 좋아하는지, 시나리오가 마구 밀려들어 온다.
“일이 오는 건 좋은데 순서 정하는 게 일이네.”
재석은 고민에 휩싸였다. 거기에 제작비도 생각해야 했다.
“일단, 싸니 촬영은 끝났고……. 다음은 이거다.”
재석은 조심스럽게 작품 하나를 들었다. 이제 류태룡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감독에게 연락해서 내일 찾아오라고 해요.”
다음날 아침 일찍 회사로 찾아온 한 남자와 마주 앉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주신 시나리오가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김한진 감독님.”
“제 작품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좋은 작품에 흥미가 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걸 채 가기 전에 하는 게 중요하죠. 한데 작품을 준비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배경이 병자호란이어서 사전 답사도 필요해 보이고 말이죠.”
“물론입니다. 그걸 위해서 저도 이리저리 찾아보며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할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었습니다.”
“뭡니까?”
“제 영화인 궁극의 활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당시 언어인 만주어입니다. 예산 부족으로 할 줄 아는 사람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거라면 충분히 지원해 드리죠. 어차피 제가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 이상 말이죠.”
“감사합니다.”
“그럼, 계약하시죠.”
둘은 곧바로 계약을 했고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완성된 각본을 만들고 배우 캐스팅 작업을 진행했다.
여기서 재석은 류태룡을 중요 악역으로 해줄 수 없냐는 부탁을 감독에게 했다.
“연기력에 문제가 없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그럼, 연기를 직접 보시고 선택하시죠.”
일단, 류태룡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 그는 재석의 제안을 받자 정말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여보! 사장님이 이거 준 거야?”
“응, 열심히 해야 해. 이번 영화 출연료도 1억 준데.”
“어머, 세상에 진짜야?”
갑자기 1억이라는 돈을 챙겨 준다는 말에 류태룡은 목숨 걸고 시나리오 캐릭터를 연구했다. 집에서 하루 종일 연기 연습을 해서 시끄러웠지만, 그의 아내는 그 소리도 기분 좋은지 연신 웃고만 있었다.
그는 준비한 걸 감독에게 보여 줬고 훌륭히 해냈다. 이후 다른 배우들에게 캐스팅 제안을 보냈는데 전부 너무 쉽게 OK했다. 감독은 배우 캐스팅이 이렇게 쉬운 건가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았다.
“이 영화 확실히 뜨는 거지?”
“예, 형 확실해요. 제이이브에요, 제이이브. 여기 캐스팅 거절하면 영화판에서 미친놈 소리 들어요.”
이 소리를 들은 감독은 꽤나 상심이 컸다.
“회사 이름만 보고 들어오다니.”
수년간 재석의 행보는 연예계에 전설이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성공의 행보. 거기에 풍부한 자본력과 소속 배우들의 이름값.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봉도준 감독의 소속 회사.
최근 작품은 전작에 비해 약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래도 미래가 기대되는 감독이었다.
“어휴.”
“감독님.”
어디선가 김한진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사장님이 뵙자는데요.”
재석의 부름에 그는 곧바로 달려갔다.
며칠 뒤, 김한진은 중국에서 만주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사람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찾은 후 필요한 단어만 기록하고 녹음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연락처까지 받았다.
원하는 걸 얻은 감독과 제작사는 빠른 속도로 일을 추진했다.
류태룡은 긴장하고 있었다.
“후우, 후우.”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하지만, 긴장되네요. 이전 영화에서도 비중 있는 역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류태룡 씨가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죠.”
“정말 사장님 아니었으면 제 인생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 어렵네요.”
“그렇게 말하니 제가 다 민망하네요. 그런데 만주어 어렵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사어(死語)라 걱정 없습니다. 중국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건데요.”
연기라서 열심히 하긴 하지만, 사용하지 않는 언어라 누군가 지적하진 않을 거라는 얘기다.
“뭐, 그건 편하긴 하겠네요.”
영화가 크랭크 인에 들어가자 촬영 일정은 정말 빡빡했다.
실내에서 찍는 게 거의 없었다. 산속에 들어가거나 찬바람이 몰아치는 상황에 찍은 것도 있었다. 스튜디오 촬영도 있었지만, 그건 영화 후반부였다.
재석은 이런 현장의 열악함을 생각해 촬영하는 동안 배우나 스탭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천막을 촬영장 한쪽에 상시 설치해 두도록 했다.
촬영이 겨울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는 거라 날씨는 쌀쌀했고 야간 촬영 때는 더 심각했다.
그래서 감독은 촬영 순서를 정하는 게 큰일이었다.
한편, 김조현에게 드라마 주연으로 섭외가 들어왔다. 재식은 섭외 결정 회의를 열었다.
“걱정입니다. 연기자들이 있긴 하지만, 다들 조연이고 주연으로 배정된 배우는 가수 출신입니다. 연기력부터 걱정입니다.”
“이슈는 확실히 보장할 수 있지만, 처음에만 반짝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주연으로 발탁됐는데 도전해 보는 것도 좋죠.”
“아니죠. 주목도 못 받을 주연이 무슨 소용입니까. 사람들이 안 볼 텐데.”
회의는 부정적인 내용만 오가고 있었다. 김조현의 출연은 불발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그럼, 결정권을 김조현에게 넘기죠.”
재석의 한마디에 김조현에게 최종 결정권이 돌아가게 되었다.
이날 오후, 김조현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제 의견을 듣고 최종 결정을 한다는 거죠?”
“그래.”
재석은 오전 회의의 내용을 직접 알려 주었다. 김조현은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할게요.”
“바로 대답했는데 그 이유가 뭐지?”
“어차피 제가 잃어야 할 인지도가 있나요?”
“어차피 바닥이라 이거지?”
“완전히 바닥은 아니지만, 거의 차이가 안 나니까요.”
“정말 ‘꿈의 계단’에 출연하고 싶은 거야?”
“네, 합니다. 그리고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도 확인하고 싶습니다.”
김조현은 결국 드라마 출연을 확정지었다. 주인공이지만, 다들 불안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최종 결정자의 결정에 회사 사람들은 순순히 수긍했다. 이제는 잘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꿈의 계단’은 가수가 중심이 되어서 연기를 펼쳤지만, 그나마 좋은 연기를 펼친 건 가수 수진과 유아이였다. 특히 유아이는 가수 활동 명이 아니라 지은이라는 이름으로 드라마 촬영에 임했다.
하지만, 이미 노래로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 연기까지 노리는 모습에 다른 이의 시선이 조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본 리딩 때 시작은 다들 비슷한 비중이었다. 이 드라마를 기획한 피디도 마음에 안 들면 갈아 치울 생각으로 했지만, 최소한의 기준점은 넘었다.
‘꿈의 계단만 극복하면 김조현은 하늘로 날아오른다.’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 리가 없으니 이렇게 회의를 계속 하는 것이다.
김조현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걸 계기로 차기작, 차차기작에서 연타석 홈런을 친다. 그 뒤에 영화도 아주 잘나가서 괜찮은 성적까지 낸다.
“그럼, 계약을 위해 나랑 같이 내일 제작사로 가자.”
재석은 다음날 외주 제작을 하는 회사에 가려 했지만, 이 계약은 방송국에서 진행했다.
제작사는 두 곳으로 나뉘어 있었기에 한곳에서 중재를 할 필요가 있었다.
계약을 마치고 대본 리딩을 위해 캐릭터 연구 작업을 했다.
김조현은 대본을 보면서 뭔가 적어 댔다.
‘진지하게 캐릭터 연구를 하는 자세야.’
역시 될 놈은 된다는 게 맞는 말인 모양이다.
그 뒤에 김조현은 대본 리딩 때 캐릭터에 어울리는 역을 선보였다. 하지만, 피디는 김조현보다 가수들 쪽에 시선이 가 있었다.
‘그래, 곤란하겠지.’
현직 가수들의 연기는 정말 한심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후우.”
피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가수들의 연기를 조금씩 지적해 나갔다. 물론 그 가수들 뒤에 있는 거대한 소속사를 생각하면 함부로 말하긴 곤란하다.
‘다들 잘나가는 가수들이지.’
현직 아이돌을 대놓고 나무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피디의 연기 지적은 그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부분이었기에 성심성의껏 받아들였다.
‘받아들인다고 당장 고쳐질 부분은 아니지만…….’
이게 시간이 걸리는 문제라 피디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피디의 종료 선언에 서로 인사를 했다. 이내 피디는 조용히 재석에게 다가왔다.
“저랑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