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믿을 수 없어요.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게.”
심사위원들은 민경의 연기에 몰입하면서도 미묘하게 미국인이 아닌 느낌을 받았다.
“잘 봤습니다. 혹시 미국인이 아닌가요?”
“한국인입니다.”
한국인이라는 말에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인상적이네요. 아시아에서 여기까지 오시다니.”
그들은 호기심이 생겨 관심을 보였다. 그녀에게 배우로서 관록을 느꼈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에 동양의 신비함마저 느껴졌다.
잠시 심사위원들이 뭔가 속닥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민경은 한국식의 정중한 인사를 하고 난 뒤 밖으로 나왔다.
“오빠, 끝났어.”
“그래, 가자.”
어차피 결과는 한국에 돌아간 뒤 소식이 전해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보름 뒤 그녀는 합격 메일을 받았다.
“좋았어!”
메일에는 신비한 매력을 가진 배우와 함께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래, 너희들한테는 동양의 신비겠지.”
다음 날, 회사에서는 민경이 오디션에 덜컥 붙어 버려서 재석과 주명진은 상황이 급박해졌다.
“아, 급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네.”
“오디션에 덜컥 붙어 버릴 줄은 몰랐어요.”
재석의 말에 주명진은 예상보다 빠르게 미국행을 해야 했다.
“아, 이거 혼자 미국에 있어야 하다니.”
“초반에는 민경이도 있고, 저도 있습니다. 드라마 촬영이 하루 이틀 걸리는 일도 아니고, 적어도 몇 개월 걸리는 일인데 바로 되겠습니까.”
“그럼 한동안은 같이 있겠고, 나머지는 딸이 미국으로 오는 것만 기다리면 되겠네.”
“어차피 계획보다 서너 달 정도 빨리 됐을 뿐이죠.”
결국 급하게 민경과 함께 급하게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민경은 급하게 구한 숙소에서 연기 연습에 몰두했고, 재석과 주명진은 사무실과 집을 구하느라 바쁘게 보내야 했다.
그리고 재석과 민경이 드라마 제작진을 만나고 나서는 제작진 쪽에서 하나 제안을 했다.
“오디션 봤던 역할 말고 다른 역을 맡아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다른 역이요?”
“네, 원래 안드레아 역 오디션을 보셨지만, 워낙 신비한 느낌이 강해서 다른 캐릭터가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습니다.”
재석은 제작진의 이야기를 듣자 뭔가 직감했다.
“그냥 바꿀 수는 없죠. 뭔가 좋은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데요.”
“흐음.”
재석의 말에 제작진이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이번 시즌1에 죽지 않게는 해 드리는 겁니다.”
생존 드라마에서 죽지 않게 해 준다는 건 시즌2에 출연 확정이라는 거다.
“좋습니다. 그런 제안이라면 받아들이죠.”
민경은 역이 바뀌긴 했지만, 시즌2에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 중에서 당시 최고 시청률을 찍은 드라마에 시즌2까지 출연하는 쾌거를 이룩하게 된 거다.
‘이제 진짜 미국 진출이다.’
“어떤 배역입니까?”
재석의 물음에 워킹 데스 제작진이 입을 열었다.
“젝키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 이름이 어울리진 않네요.”
“젝키라면 그 공무원 역할 아닙니까?”
“예, 설정상 10년 넘게 일한 공무원이죠.”
“그 설정을 조금 바꿀 수 있습니까?”
“설정을 바꾸다뇨?”
“이 얼굴을 보세요. 10년 일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재석이 민경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제작진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조정해야겠네요.”
“그럼, 공무원 생활 3년 차 정도가 적절할 듯합니다.”
재석은 그 자리에서 적절히 협상을 하고 있었다.
‘하필 젝키라니.’
재석도 워킹 데스 드라마를 알고 있었다.
현지에서 시즌2가 종영된 뒤 한국에 수입될 정도로 시기가 늦었음에도 괜찮은 인기를 누릴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드라마였다.
‘시즌 1 마지막에 폭사당하는 캐릭터를 주려고?’
물론 제작진이 시즌1에서 안 죽이겠다고 했으니 죽이진 않겠지만, 시즌 2에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살얼음판이군.’
민경을 미국에서 좀 이름 있는 배우로 만들려면 적어도 시즌4까지는 출연해야 한다.
‘보아하니 이번 역을 주는 건…… 반쯤은 시험 같은데.’
재석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시즌 1에서 안 죽는 건 확실합니까?”
“그건 약속드립니다. 나중에 수정된 대본을 보내 드리죠.”
“감사합니다.”
어찌 되었든 민경의 출연은 확정 지어졌고, 여기서 잘해야 다음 시리즈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다.
민경은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야 재석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봤다.
“오빠, 그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고 얼굴 표정이 안 좋아 보여.”
“걱정이 있어서 그래.”
“걱정?”
“아무래도 이 드라마, 한 시즌마다 살아남는 게 너무 힘들 것 같다.”
“힘들어?”
“방영 이후 인기 없는 캐릭터는 칼같이 쳐내질 거거든.”
그 말에 민경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정도야?”
“딱 오늘 이야기를 하고 나서 감이 올 정도야. 오디션 합격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야.”
“그럼 심각한데.”
“이번 드라마가 6회 정도 하는 거니까 계약대로 널 죽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살아야 해. 저쪽 사람들은 좀비나 다름없어. 걸리면 다음 시즌에 가차 없이 가는 거야.”
민경은 제대로 된 생존물에 걸리고 만 거다.
드라마도 드라마지만, 촬영 역시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생존 촬영을 해야 한다.
“그럼, 다른 사람도?”
“아마 그러겠지. 첫 시작을 했다고 오래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연기 못하고 인기 없으면 주연급 캐릭터라도 훅 가는 거지.”
“오빠 감이 너무 좋아서 불안할 때도 있네.”
“민경아, 어떻게 보면 마치 신인 때 같지 않아?”
“신인 때?”
“그때도 그랬잖아. 항상 연기 삐끗할까 봐 매일같이 나랑 연습하고.”
“호호호.”
재석의 말에 민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땐 걱정 많았는데 오빠 덕분에 내가 끝까지 할 수 있었잖아.”
민경은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재석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가 어디로도 도망 못 가게 꽉 붙잡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오빠, 그거 알아?”
“뭐?”
“이제 도망 못 가. 늦었어요.”
“하하하!”
재석은 그 말에 크게 웃었다. 일이든 사랑이든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이번 미국행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자.”
하지만 대본 수정까지 시간이 걸리고, 촬영 준비 작업 때문에 재석이 다시 올 때까지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 * *
한국으로 돌아온 재석은 서둘러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분간 한국과 미국을 오가야 하는 이상, 밀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 보자……. 다들 일은 잘하고 있군.”
보고받을 내용을 서류로 정리해 둘 것을 지시해 두었기에 배우들이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주유가 영화에 캐스팅이 됐군.’
‘도와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영화가 된 작품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줄 목적으로 과감하게 충격적인 장면을 집어넣었다.
그로 인해 영화는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꽤 흥행하게 된다.
실화라는 점이 사람들을 더욱 자극했고,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까지 한다.
“주유는 잘 크네.”
군대 다녀와서 복귀작도 이미 했고, 이번 영화를 통해 ‘나 부활!’ 이렇게 외치는 작품이 된다.
한국 내의 일을 처리한 재석은 미국에서 올 대본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대본 초반부는 거의 고칠 게 없긴 하다. 고친다면 중반 이후, 빨라도 3회부터다.
결국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서야 수정된 대본을 받을 수 있었고, 민경은 맹연습에 들어갔다.
재석과 민경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주명진이 집을 구해 놓은 상태였다.
“이 집이에요?”
“어.”
주명진이 구한 집은 주택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재석과 민경이 살 집과 주명진이 살 집이었다.
“주 이사님 따님 상황은 어때요?”
“일단 말은 해 놨어. 될 수 있으면 이쪽 주변 대학으로 유학을 오라고. 멀면 어쩔 수 없고. 그런데 이렇게 집을 사도 괜찮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하루 이틀 쓸 집도 아니고요.”
앞으로도 미국에서 활동할 것을 염두에 둔다면 집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사님 혼자 고생 많으셨어요.”
“아이고, 고생은요. 괜찮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동안은 혼자 드시지 마시고 이리 오세요.”
“그런 민폐까지 끼칠 수는 없습니다.”
“주 이사님, 괜찮아요.”
민경은 사모님 마인드가 아니라 가까운 지인을 대하는 마음으로 신경을 써 줬다.
주명진은 회사를 차릴 때부터 함께한 창립 멤버다.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냥 같이 식사해요. 촬영 나가면 해 주고 싶어도 못 해요.”
재석의 말에 약간 머쓱해진 주명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럴까…….”
민경은 재석의 아내이지만, 동시에 회사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이다. 한류 스타이며, 지금은 미국 진출까지 한 스타인 것이다.
이런 스타에게 식사 대접을 받는 게 상당한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자주 먹는 건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촬영은?”
“일단 대본은 받았고, 장소도 알려 줬어요. 이제 사전 미팅에 참석해야죠.”
“그럼 난 이곳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미국에서 길을 닦는 거고?”
“예. 여기서 미국으로 진출하고 싶은 한국인, 반대로 한국에 진출하고 싶은 한국계 미국인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실력만 있다면 받아서 활동할 수 있게 준비해 주십시오.”
“하루 종일 뛰어다녀야겠네.”
“그래도 영어 되니까 문제없잖아요.”
“너 때문에 영어도 배우고, 미국에서 일도 하고 별걸 다 한다.”
“이러려고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라고 한 겁니다.”
“아이고, 됐다.”
꼬르륵.
주명진은 배에서 소리가 울리자 민망하단 표정을 지었다.
“식사 준비할게요. 잠시 기다리세요.”
민경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준비해서 내왔고, 주명진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음식을 없애 버렸다.
민경은 주명진이 너무 잘 먹어서 깜짝 놀랐다.
“많이 배고프셨나 보네요.”
“하, 하하하…….”
주명진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 * *
재석과 민경은 촬영 전 사전 미팅 회의에 참석했다.
‘생각보다 CG가 많이 들어가.’
재석은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을 들으며 할 말을 잃었다.
‘거의 벽 보고 연기하는 수준이야.’
대사를 주고받는 상대가 없다면 정말 벽보고 연기하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민경도 곤란함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쉽지 않겠는데.’
배우에게 있어서 연기를 할 때 상대역이 있느냐 없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제작진은 달랑 몇 장의 그림만 건넸다. 즉, 이 그림을 보고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연기하라는 거다.
‘생각보다 상세해.’
그런데 촬영 콘티가 생각보다 상세했다.
한국에서 촬영을 할 때도 콘티가 존재하긴 했으나, 대부분 개요만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