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132화 (132/152)

하지만 여기서 건넨 촬영 콘티는 이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연기를 해낼 수 있을 만큼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재석은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것도 괜찮다고 느꼈다.

‘여기서 뭔가 한 수 배우는 느낌인데.’

단순히 드라마 촬영이지만, 재석은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당장 봉도준 감독에게 연락을 해야겠어.’

재석은 사전 미팅 후 집으로 돌아와 한국에 있는 봉도준 감독에게 연락을 취해, 이곳으로 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봉도준 감독은 그 촬영장에 쉽게 갈 수 있겠냐면서 의문을 표했지만, 재석이 한 마디 했다.

“형님, 다 방법이 있습니다. 운전수로 들어오는 거죠, 운전수.”

(운전수?)

“뭐가 됐든 들어와서 어떻게 촬영을 진행하는지 볼 수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요.”

(알았어. 비행기표 끊어서 최대한 빨리 갈게.)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봉도준은 갑작스럽게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재석과 만나서 정말 운전수라는 직함을 받았다.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 마.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그리고 나 캔자스시트 비평가 협회에 참석해야 해.”

“그런 스케줄은 언제 생긴 겁니까?”

“나한테 개인적으로 연락이 왔어. 거기에 지금 놀고 있으니까.”

“작품 쓰셔야죠. 놀고 있으면 됩니까.”

“작품은 쓰고 있어. 좀처럼 좋은 게 없어서 그렇지.”

봉도준 감독은 결국 진짜 운전수가 되었다. 그리고 민경의 첫 촬영날 운전을 해서 촬영장에 도착했다.

민경의 첫 촬영장은 세트장이었다.

“흐음.”

봉도준 감독은 세트장을 한 번 쓰윽 보더니 한국 촬영 현장과 차이가 뭔지 단숨에 잡아냈다.

‘오호, 이런 방식이 새로 나왔나.’

촬영 기법이 크게 변화한 건 아니지만, 세트장 환경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형님, 너무 티 납니다.”

“커흠, 그런가.”

봉도준은 최대한 그냥 운전수처럼 보이려고 행동했고, 다행히 다른 이들이 의심하진 않았다.

거기에 민경에게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움직이면서 매니저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진짜 매니저는 재석인데 말이다.

첫 촬영이 끝난 뒤에 봉도준 감독은 오늘 촬영한 부분에 대해 재석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 이 장면이라고?”

“예, 형님.”

“이거 상상만 해도 대박의 냄새가 솔솔 풍기는데.”

역시 감독이라서 그런지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이 확 온 거다.

“그렇죠?”

“하긴, 재석 동생이 선택한 작품인데 어련하겠어.”

“근데 이거 영화가 거의 벽보고 연기하는 거라 힘들더라고요.”

“나도 놀랐어. 촬영장에 아무것도 없어서. 그래도 이상한 장비를 보고 알았지. 대충 뭔지 말이야.”

“형님, 다음 작품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마 대단히 큰 도움은 안 될 거야. 어차피 한국과 사정이 다르잖아. 몇 가지 새로운 기법을 찾아낸다면 다행이지.”

봉도준 감독은 그런 새로운 걸 찾아내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모든 걸 다 따라 하는 건 어렵다. 한국 촬영 상황과는 차이가 있어서 더더욱 말이다.

“내일도 촬영이지?”

“네, 운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 좋은 거 보는데 운전쯤이야.”

봉도준 감독은 촬영장에 다녀오고 나서 재석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내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 이왕 왔는데 제수씨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음…… 걱정인 부분인 장면이 하나 있긴 해요. 1회에 냇가에서 빨래하는 장면인데, 제가 생각할 때는 이 부분이 민경이 자신을 가장 임팩트 있게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거든요.”

“냇가라면 조선시대처럼 돌아가서 빨래하는 장면이겠네.”

“그렇죠. 세탁기 없이 오로지 손빨래만 하는 곳이죠.”

“빨래통으로 뭔가 해 보는 건 어떨까?”

봉도준 감독의 의견에 재석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타타!”

재석은 류태룡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연주를 떠올린 것이다. 류태룡은 별거 아닌 도구들로 엄청난 음악을 만들어 냈었다.

그는 곧바로 인터넷으로 타타 영상을 검색해 민경에게 전달했다.

그 영상을 본 민경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게 통할까?”

“그 장면이 네가 유일하게 자신을 마음껏 어필할 수 있는 장면이야. 어떻게든 활용해야 해.”

“알았어. 근데 좀 어려운데.”

“이 정도는 해야지 사람들 관심이 쏟아지지.”

민경은 촬영 전까지 빨래통을 열심히 두들기며 연습했다.

그리고 손이 뻘게질 정도로 두드린 결과, 어느 정도 영상을 보고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  * *

“아, 세탁기가 그립다.”

“옛날에 이렇게 일일이 손빨래를 했다는 게 대단하긴 해.”

“그놈의 좀비 때문에 다 망했어.”

사람들이 한숨을 쉬며 수다를 떨었고, 살짝 투덜거리고 있을 때 민경이 끼어들었다.

“이럴 때는 신나게 놀면서 해야 덜 힘들죠.”

민경은 통에 담긴 빨래를 한쪽에 다 쏟고, 빈 양동이를 뒤집었다.

두둥! 타닥! 퉁 타닥!

완전히 리듬이 살아 있었다. 거기에 맞춰 민경이 노래했다.

“헤이, 헤야, 니나노!”

정말 노래 못 부르는 티가 확 나는 순간이지만, 그게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푸하하하하!”

“하하하!”

배우들은 다들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감독은 NG 선언을 하지 않았다.

어두웠던 분위기가 확 바뀌었고, 그 상황이 적절하다 느낀 거였다.

“아, 미안해요. 노래는 잘 못해요.”

“괜찮아요.”

배우들은 NG가 났다고 생각하고 한 말이었지만, 감독은 아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이미 신이 끝났는데 감독은 가만히 화면을 보고 있었다.

“잠시 쉽시다.”

그때 감독이 쉬자는 말에 연기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경은 재석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조금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어떡하죠? 일단 마음대로 해 버리긴 했는데.”

유일하게 민경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부분이라 그렇게 했지만, 감독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형님, 어떻게 될까요?”

“흐음, 이건 반반이야. 넘어가든가, 다른 걸로 다시 찍든가.”

봉도준 감독도 미국 감독의 마음이 어떨지 확신하지 못했기에 답을 쉬이 내리지 못했다.

“반반이면 하늘에 맡겨야겠군요.”

잠시 후 감독이 찾아와서 민경에게 말을 걸었다.

“방금 한 거 어떻게 생각한 겁니까?”

“그냥 우울한 분위기를 바꿔야 하니까, 좀 화끈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화끈하게라…….”

드라마 전반에 걸친 생존 투쟁과 어두움만이 가득한 상황에 단비 같은 부분이다.

그래서 감독은 고민한 거다. 계속 드라마는 어둡지만, 그 분위기에 간간이 변화를 줘서 너무 어둡지 않게 하려는 거다.

그 정도를 계산하는데, 민경의 행동이 그에 적합한지 본 거다.

“흐음. 그럼 좀 더 가볍게 두드리며 다시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배우들에게도 진짜 웃음이 아닌 연기로 가볍게 웃는 걸 지시했다.

민경은 빨래를 한쪽에 좋게 내려놓고 가볍게 두둥탁! 하는 수준으로 바꿔서 했고, 다른 배우들도 가볍게 웃으면서 넘어갔다.

“컷!”

이번에는 진짜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재석이 봉도준에게 한 번 더 물었다.

“형님, 통과된 건가요?”

“됐다. 저 감독이 지금 장면이 더 좋다고 인정한 거야. 말을 안 했을 뿐.”

어찌 통과가 되자 이제 확실히 민경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촬영이 끝나고 모두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거기에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고, 조금 수위가 높은 대화들이 이어지면서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다가 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그 순간 여자들의 수다가 뚝 끊어졌다. 방금까지 즐거웠다가 바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한순간이네, 분위기 반전되는 거.’

“무슨 일이죠, 에셔.”

“그냥 와 봤어.”

몇 마디 대사를 나누지 않았지만, 즐거웠던 분위기를 점점 무겁게 진행시켰다.

그 뒤에 이 장소에서의 신이 끝나자, 민경은 촬영이 그대로 끝났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 같이 모여 다음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라면 다음 촬영은 분명 없는 대사라도 만들어서 주목도를 높일 거야.”

“하지만 스토리에 너무 어긋난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긴 힘들 텐데요.”

“아니야, 재석 동생, 감독으로서의 감이야. 한번 치고 나가서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인다고 느껴지면 간단한 대답이라도 넣어. 그게 더 인기를 끄니까.”

“그럼 전 어떻게 연기해야 하죠?”

“어디까지나 예상인데, 위치 선정부터 바뀔 겁니다. 좀 더 앞으로 나오겠죠.”

“진짜요?”

“대사가 많진 않아도 지금 시리즈에선 이게 최선이니까요.”

민경의 위치가 바뀐다는 건, 대사가 없어도 표정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노출이 높아지고, 진짜 대사가 급하게 추가될 수도 있다.

“물론 확률은 낮아요. 지금 촬영하는 건 사전 제작이니까.”

“형님, 그렇다고 정해진 대로 흘러가진 않을 겁니다.”

재석은 지금 이 드라마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민경을 돋보이게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재석 동생 말대로 바뀔 수도 있어. 하지만 쉽진 않아. 이미 계획된 게 있으니까. 그나마 다음 회에 가능성 높은 곳은 여기 야간 촬영할 때야.”

“야간 촬영이요?”

“좀비 습격 신에서 전투 장면에 변화가 일어나거나 아니면 끝이야.”

봉도준 감독이 가장 가능성 높은 부분을 찍었다. 그것 말고는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다음 촬영을 할 때 알게 되겠네요.”

*  * *

야간 촬영을 위해 다들 좀비 분장을 하고 있었고, 배우들은 감독의 지시대로 동선을 맞추기 시작했다.

“민경은 여기 서고, 저쪽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좀비가 달려들면 이렇게 하는 거고.”

감독의 지시에 따라 동선을 파악하는데, 봉도준 감독은 전체 동선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차렸다.

“재석 동생, 좋은 소식이야.”

“바꼈나요?”

봉도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변했어.’

민경이 제작진 사이에서 높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거다.

좀비들의 분장이 다 끝나고 민경이 분장을 받자, 다른 배우들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근데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라면서요?”

“뭐, 한국에서는 인기 있어요.”

민경이 한국에서만 있기 있는 배우는 아니다. 아시아에서 알아주는 배우가 된 지 오래됐다.

“근데 한국은 어떤 나라예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요.”

여기 있는 배우들은 다들 미국인이다. 한국처럼 저 멀리 있는 동아시아 국가에 놀러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흐음, 도시는 미국 대도시와 다를 바 없고, 시골이 많이 달라요. 그리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죠.”

민경은 분장을 받는 동안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설명했고, 그들은 그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나중에 드라마 끝나면 한국으로 놀러 와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준비가 끝나고 촬영이 시작될 때쯤 다른 사람들도 준비가 끝났다.

배우들은 최종 리허설까지 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민경은 대사는 없었지만 열심히 뛰어다니며 연기했다. 위치가 괜찮게 잡힌 덕에, 대사가 없어도 카메라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듯 보였다.

봉도준, 재석, 민경은 촬영이 다 끝나면 모여서 다음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감독은 감독 나름대로, 연기자는 연기자 나름대로 이곳에서 배우는 게 많았다.

재석도 이곳 상황을 보면서 굴러가는 방식을 파악하여, 다음에 다른 사람을 진출시킬 때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어느 날 스태프 한 명이 재석에게 운전수의 이름을 물었고, 재석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봉도준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름은?”

“엔딩 크레딧에 지금까지 함께하며 고생했던 이들의 이름을 넣으려고요.”

“네?”

순간 재석은 멍해졌다. 봉도준 감독이 운전수로 엔딩 크레딧에 당당히 이름이 올라가게 생긴 거다.

‘젠장. 감독도 아니고, 운전사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자 재석은 그 사람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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