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133화 (133/152)

“그냥 운전수인데 이름을 올려도 되나요?”

“네, 물론이죠. 조금이라도 촬영에 도움이 된 분이 있다면 무조건 이름을 올려야 합니다. 그게 저희들의 암묵적인 규칙입니다.”

“아, 네…….”

규칙이라면서 하는 말에 재석은 다시 그 남자를 붙잡지 못하고 봉도준 감독에게 말했다.

“뭐! 운전수로 엔딩 크레딧에 올라간다고?”

봉도준 감독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호호호!”

민경은 그 옆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봉 감독님이 운전수로 이름이 올라가다니,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요?”

아무도 상상 못할 거다.

“형님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할 겁니다.”

“그래, 다행히 얼굴은 안 들어가니까.”

얼굴이 안 들어간다는 걸로 위안을 삼았지만, 한국에 워킹데스가 방영을 시작하면 네티즌들이 의심을 할 거다.

‘어차피 2년 뒤다. 설마 봉도준 감독이 여기에서 운전수를 했다고는 생각 안 하겠지.’

재석은 잠깐의 해프닝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봉도준 감독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지금 이건 우리 셋이 죽을 때까지 비밀이야. 나중에 내가 감독인 거 알려지면 스파이짓 했다고 욕먹을 거야.”

“흐음, 그것도 있겠네요.”

천하의 봉도준이 당당하게 오지 못하고 숨어들었다고 말이다. 그러니 동명이인으로 남아야 했다.

“그럼 촬영도 끝났는데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거지?”

“네, 돌아가야죠. 그런데 형님은 이제 뭐 하시려고요.”

“캔자스시티 비평협회에 참가한다니까. 거기 가서 얼굴 비춰야 해.”

“그럼 나중에 오시겠네요.”

“그래 봐야 하루 이틀이지. 난 푹 쉬었다가 돌아갈 테니까 먼저들 가.”

그렇게 재석과 민경은 미국 일정을 끝내고 조용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민경이 미국 드라마를 찍었단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워낙 해외를 다녀오는 사람이라 이제는 어딘가 다녀왔겠지 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워킹데스 방영이 되면 한바탕 뒤집어질 거다.

*  * *

강형진 감독의 싸니가 개봉하며, 영화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싸니는 영화 자체도 큰 인기를 끌었지만, 출연했던 젊은 배우들이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특히 강소정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강형진은 재석과 면담을 했다.

“예, 감독님 저한테 조용히 면담을 하신 이유가 뭡니까?”

“저, 아무래도 다음 작품은 제이이브랑 어렵겠습니다.”

“어디서 좋은 제의가 들어왔나 보군요. 그럼 그쪽으로 가세요. 감독님 잘되셔서 가는 게 무슨 문제 있겠습니까. 저랑 한 계약도 끝난 마당에 뭘 걱정하십니까.”

재석은 쿨하게 그를 보내 줬다. 계약도 없는데 붙잡을 이유도 없고 말이다.

“다음에 좋은 작품 있으면 그때 같이하죠.”

영화 싸니로 벌어들인 수익은 대략 100억이었다.

숫자만 보면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총 제작비가 50억에 달한 것을 고려하면 그리 엄청나다고 보긴 어려웠다.

그래도 과속삼대 같은 작품에 비해 적을 뿐, 대박은 대박이었다.

“아우, 기분 좋다.”

일이 잘 풀리면 뭐가 어떻게 되던 간에 기분이 좋다.

그러던 와중에 최동훈 감독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며칠 뒤, 재석은 약속 장소에서 최동훈 감독을 만나게 되었다.

“어이구, 감독님. 신수가 훤하십니다. 작품이 잘돼서 돈도 많이 버셨겠네요.”

“아하하. 사장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최동훈 감독은 웃으며 손사래를 치고는 조심스럽게 본론은 꺼내 들었다.

“이번에 제가 만들고 싶은 영화입니다. 한번 검토해 주시죠.”

“왜 하필 저한테 주시는 거죠? 다른 회사에서도 감독님을 많이 찾을 텐데 말이죠.”

최동훈 감독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들을 지목한 상태로 영화 제작사에 이야기하니 전부 다 거부하더군요.”

“이유는 뭡니까?”

“지출이 너무 크다는 겁니다.”

“지출이 크다? 지목한 배우들이 다들 스타 배우들이군요.”

“뭐,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렇습니다.”

“그 배우들은 전부 허락한 상태입니까?”

“아닙니다.”

배우가 허락한 상태도 아니라는 말에 갑자기 험난한 여정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목하신 배우들이 출연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래서 사장님을 찾아온 겁니다. 제이이브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거라 믿고 있습니다.”

최동훈 감독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재석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참 어려운 요구를 하시네요. 일단 배우들보다 시나리오부터 보고 결정하죠.”

“당연히 그러셔야죠.”

최동훈 감독은 자신만만하게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이미 어느 정도 완성형에 이른 시나리오였다.

“흐음, 딱히 손볼 건 없네요. 같이합시다.”

“그럼 배우 섭외도 같이 진행해 주시는 겁니까?”

“그렇게 하죠. 그거면 됩니까?”

“그 외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배우 섭외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재석과 최동훈은 서로 악수를 하며 계약하게 되었다.

“후우. 이거 뭐 힘드네, 힘들어.”

최동훈 감독이 내민 시나리오는 바로 ‘도적들’이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대박 작품이지만, 이 작품 또한 제작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다 캐스팅에 성공했을 때 이야기겠지.”

최동훈 감독이 지목한 스타급 배우들을 캐스팅하지 못한다면, 이번에도 천만 관객을 찍으리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흐음…….”

재석은 그중에서도 흥행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배우를 한 명 찍었다.

“전지민.”

알아주는 스타임은 물론이고, 이때에는 아직 최동훈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적 없는 배우이기에 신선함을 주는 배우였다.

“일단 건드려 보자.”

덥석 물어 주면 고맙겠지만, 쉽진 않을 듯했다.

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지민의 소속사를 찾아갔다.

그가 직접 회사를 방문하자, 직원들은 다들 깜짝 놀랐다. 임민경과의 결혼으로 현재 연예계에서 가장 핫이슈인 당사자의 등장으로 난리가 난 거다.

그에 황급히 직급 있는 인물이 재석을 맞이했다.

“아이고, 여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제가 운영하는 제작사에서 영화를 한 편 찍게 됐는데, 배우 캐스팅으로 상의할 게 있어서 온 겁니다. 그냥 시나리오만 보내도 되지만, 캐스팅할 배우가 전지민 씨라 그래도 예우는 차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이고, 그렇다고 대표님이 직접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어떤 감독님이 하시는 작품입니까?”

“최동훈 감독님이 이번에 저희와 함께하십니다.”

“아, 최 감독님! 그럼 일단 시나리오를 검토한 후에 전지민 씨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거대 소속사답게 자체적인 검토부터 진행하는 듯했다. 배우들에게 엄선된 작품만을 전달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느려.’

하지만 재석은 최대한 빨리 일이 처리되길 원했다.

“바로 전지민 씨에게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이이브에서 야심차게 준비하는 작품입니다. 가능한 일정을 앞당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재석이 야심차게 준비했다는 말은, 이 바닥에선 흥행을 보장하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직원은 선뜻 대답을 하질 못했다.

“그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그쪽을 곤란하게 만들었군요. 나중에라도 윗분에게 말씀드려 주세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재석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이틀 뒤에도 답은 오지 않았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그는 우선 홍콩 배우들부터 섭외하기로 했다.

홍콩에 도착하자 중국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와아, 베이징과 전혀 달라.”

재석이 출장을 가는데 같이 따라온 민경이었다.

“당연히 다르지. 그것보다 왜 따라왔어.”

“왜긴. 오빠는 출장이지만, 난 그걸 따라온 와이프야.”

재석은 절대로 민경이 그냥 따라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 여기 온 김에 너 놀려고 온 거잖아.”

“뭐, 그것도 없지 않아 있지. 그리고 이 예쁜 아내를 두고 출장을 가려 하다니 못됐어. 결혼하기 전에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더니, 결혼하고 나서는 이미 잡은 물고기처럼 날 내버려 두다니. 실망이야.”

실망이 아니라 그냥 민경은 재석과 함께 있고 싶은 거다.

“알았다. 그럼 나 일 보고 올 테니까 그동안 놀고 있어.”

“알았어. 일 잘 다녀와.”

민경은 손을 흔들며 재석을 보내고 곧바로 홍콩 번화가로 달려갔다.

이미 그럴 거라 예상했기에 재석은 그것을 크게 탓하진 않았다.

홍콩에는 수많은 유명 배우들이 살고 있지만, 그중에서 그가 찾아갈 배우들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중국 지사에 연락을 넣어 그들과 약속까지 잡아 놓은 상태였다.

가장 먼저 만난 배우는 이번 캐스팅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배우인 런따이화였다.

“안녕하세요.”

런따이화는 한국어로 재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국 인사를 아시는군요?”

재석이 영어로 말하자, 런따이화도 웃으며 영어로 대답했다.

“하하하, 각 나라의 인사 정도는 할 줄 안답니다.”

“외국인에게 그렇게 한국어로 인사를 받는 건 몇 번이고 들어도 신기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뭘요. 그것보다 절 캐스팅하고 싶으시다고요?”

“예. 한국에서 영화를 하나 제작하려 하는데, 거기에 출연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석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중국어로 번역된 시나리오입니다. 한번 읽어 보십시오. 답은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출연료 문제는 어떻습니까?”

“아쉽지만 출연료 책정은 한국을 기준으로 하게 될 겁니다. 그 부분은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런따이화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그걸로 대화를 끝마쳤다.

재석은 이후에도 다른 배우들을 만나며 똑같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국을 기준으로 출연료가 책정된다는 건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중국과 한국은 시장의 크기가 다른 만큼 출연료에서도 그 차이가 컸다. 한국을 기준으로 하면 출연료가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소프트파워는 중국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한 번이라도 한국 영화에 출연한다면, 그 외에 다른 아시아권에도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재석도 그걸 알기에 배우들에게 그러한 딜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재석이 홍콩을 떠나기 전에 런따이화에게서 연락이 도착했다. 일 이야기가 아닌, 그냥 식사나 한번 함께하자는 거였다.

재석은 그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제 아내도 함께 데려가겠습니다.”

런따이화는 재석이 아내와 함께 오겠다고 하자, 자신도 아내를 데리고 올 테니 부부 동반으로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는 재석의 아내가 민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야 언론을 통해 화제가 됐었지만, 해외에서는 그다지 큰 이슈가 되지 못한 탓이다.

재석과 민경은 한껏 꾸민 후 약속 장소인 미슐랭 투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허!”

런따이화는 민경이 나타나자 놀란 얼굴로 재석을 보았다.

“당신 부인이…….”

“맞습니다. 제 아내입니다.”

재석이 민경을 소개하자 런따이화는 크게 웃었다.

“깜짝 놀랐습니다.”

“중국에는 제 사진이 안 돌아다니나 봅니다.”

“당연하죠. 임민경은 알아도 그 남편에게는 관심 없으니까.”

런따이화의 말에 재석도 웃었다. 그게 진실이니 말이다.

“자기, 인사해. 내가 출연할 한국 영화의 제작사 대표야.”

“안녕하세요.”

런따이화의 아내는 정말 조신한 모습으로 재석에게 인사를 했다.

재석도 그 인사를 받았고, 민경도 같이 인사를 했다.

런따이화 부부는 영국 조차지 시절에 태어난 사람이라 영어를 기본적으로 아주 잘했다.

그래서 재석 부부와도 막힘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민경의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재석의 도움이 있어야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저희 영화에 출연하신다고…….”

“맞습니다. 고민을 했지만, 지금의 중국 영화는 너무 검열이 심합니다. 자유스럽게 뭔가를 표현하지 못하죠.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영국 조차지 시절의 홍콩 영화가 그리워서 이번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겁니다.”

런따이화는 중국의 검열이 싫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알겠습니다. 런따이화 씨의 옛 추억을 얼마나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런따이화의 결정을 확실히 하고자 나중에 계약서를 보내겠다고 했다.

두 부부의 저녁 식사는 꽤 즐겁게 이어졌다. 런따이화는 생각보다 아내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로맨티스트였다.

“사랑하는 자기,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워.”

“호호호, 다 늙어서 무슨 주책이에요.”

재석과 민경에게 보란 듯이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어머, 부럽다. 나이 들어서도 저렇게 사랑해 주면 참 좋을 텐데.”

“나도 민경이 널 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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