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늙어서도?”
“응.”
민경과 재석은 신혼의 뜨거움을, 런따이화는 노년 부부의 은은함으로 애정을 과시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면서도 서로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식사가 끝나고 나서 다음 날이 되자 다른 배우들에게도 연락이 왔다.
출연을 하겠다는 거였다.
재석은 홍콩에서의 캐스팅을 순조롭게 끝낸 채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제야 전지민에게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출연이 어렵겠다고 하는데요.”
“어렵다?”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하지만 회귀 전에는 분명 이 영화에 출연했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재석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안 되면 민경이 넣으면 된다.”
하지만 궁금했다.
‘왜 거절했을까?’
민경을 그 자리에 넣으면 되지만, 인간적인 호기심이 생겼다.
“한번 알아봐야겠어.”
재석은 더 이상을 미련을 두지 않고, 곧바로 최동훈 감독을 만나 전지민 캐스팅이 어려울 것 같다고 전달했다.
“아, 정말 곤란한데요. 이 캐릭터는 전지민 씨를 생각하고 준비한 거라서…….”
“전지민만큼 연기력 있고, 티켓 파워도 있는 다른 배우는 어떤가요?”
“물론,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만…… 그 이상으로 몸값이 높으면 곤란합니다.”
“그 부분은 나중에 고민해 보기로 하고, 감독님께서 생각하신 다른 배우는 있습니까?”
“차선책이야 있긴 한데, 몸값이 너무…….”
“일단 말씀해 주시죠. 바로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최동훈 감독은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표님 사모님입니다.”
“아…….”
민경의 인기와 몸값은 국내 최고다. 최동훈 감독이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배우의 출연료만으로 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재석으로서는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내색하지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흐음,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이야기해 보죠.”
* * *
그날 저녁, 재석은 집에 가서 민경에게 최동훈 감독의 캐스팅 제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몸값을 좀 깎자고?”
“들어가는 제작비를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아.”
“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어? 나야 상관없어. 공짜로도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어. 오빠, 회사 일인데 뭔들 못해.”
민경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정말 돈 한 푼 안 받고 연기를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돈 받는 게 여러모로 편해.”
“근데 최 감독님 영화에 출연하면 대충 얼마나 받아야 해?”
“5억 정도는 받아야지.”
“이거 내부 거래 아니야? 결국 출연료도 오빠 돈으로 받는 거잖아.”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럼 해야지. 열심히 오빠 돈 빼먹어서 알거지로 만들어야지.”
민경의 농담에, 재석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화답해다.
“그런 말하면 못 써.”
“알거지 만들어서 나만 바라보게 할 거야. 내가 주는 용돈 받고 살면서 셔터맨 시킬 거야.”
문득, 듣고 보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아, 내 미래의 로망.”
“진짜야?”
“회사 팔고 지금이라도 셔터맨으로 돌아설까?”
그 말에 민경이 재석의 가슴을 툭 쳤다.
“농담하고 진담도 구분 못해?”
“네 농담이 너무 진지해서.”
“일단 영화 출연할게. 돈 문제도 오빠가 알아서 결정해. 난 한 푼도 안 받아도 되니까.”
“에이, 그건 안 되지.”
다음 날 재석은 감독과 상의한 뒤 민경의 출연료를 5억으로 결정했다.
그 이상 올리면 제작비가 부담되니 그게 적정선이었다.
이후 다른 배우들 섭외도 착착 진행됐고, ‘맘피야’라는 역할에 김조현이 섭외됐다. 맘피야는 역할상 몸이 아주 좋아야 했는데, 김조현은 그동안 꾸준히 관리하여 상당히 몸을 키운 상태였다.
그리고 최동훈 감독이 민경의 역할의 이름을 고민하고 있자, 그에 재석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뽀카리 어떻습니까?”
“큭! 크크크!”
재석이 정한 새로운 캐릭터 이름에 웃기기도 했다.
“그 이름 과거에 찍은 임민경 씨 CF 말이죠?”
“예,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CF죠.”
민경이 찍은 레전드 CF 중 하나로 순식간에 광고주의 매출이 5배가 뛰었던 전설의 작품이었다.
“뭐, 그때 받은 돈 정말 저렴했죠.”
“일단, 사장님이 말씀하신 이름 참 적절해 보입니다. 다른 이름들도 다들 하나 같이 본명이 아닌 과거의 경험에서 나오는 별명들이니까요.”
최동훈 감독은 흔쾌히 민경의 캐릭터 명을 뽀카리로 정했다.
민경은 뽀카리란 이름을 듣자 오히려 좋아했다. 그만큼 과거에 찬란했던 CF였기 때문이었다.
“아우, 그때가 그립다. 지금보다 얼굴 훨씬 탱탱하고.”
“지금도 충분히 예뻐.”
“정말?”
“응, 그러니까 걱정 마.”
“걱정돼요. 이렇게 늙다가 꼬부랑 할머니 되면 어떻게 해요?”
“괜찮아, 늙어도 내가 너보다 더 빨리 늙을 거야. 애초에 남자들 기대 수명이 여자보다 더 짧은걸? 그리고 늙어도 내 눈엔 항상 예쁠 거야.”
“그래도요!”
민경은 재석의 품에 안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내일부터 유명한 한의원 찾아가서 몸에 좋은 약 좀 먹어야겠어요.”
혼잣말하던 민경은 급하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돌리면서 어디 좋은 한의사 아는 사람 없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일찍 죽는 게 그렇게 두렵나?’
한 번 죽어봤던 몸이고 제 수명 다 살고 죽는 게 뭐가 그리 문제인가로 생각되지만 민경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전화할 필요 없어.”
“됐어요. 이건 아주 중차대한 문제에요.”
민경은 고집대로 일을 진행했다.
그리고 채 일주일이 지나기 전, 재석은 흔히 말하는 명의라고 소문이 난 사람에게 진맥을 받게 되었다.
“흐음, 간에 기력이 쇠했고, 위장이 상했네요. 보통 술 많이 마시는 분들께 나타나는 증상인데. 혹시 접대 자주 하시나요?”
재석은 한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먹는 것부터 조절하셔야겠네요. 너무 기름진 걸 먹어서 그래요.”
“그래도 최대한 조금 먹으려 합니다.”
“애초에 접대라서, 적당히가 어렵겠죠?”
민경도 재석의 매니저 일이 어떤지 알고 있다.
감독과 배우들을 만나, 밥도 사 주고 잘 봐달라고 하고 같이 일해 보지 않겠냐면서 영업을 뛴다.
그게 회사 사장이 되어도 변함은 없다. 애초에 대상도 크게 바뀌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래도 아직 몸이 젊으니까 버틴 것 같네요. 일단, 몸의 기력을 회복시켜 주고 약을 한 달분 지어 드릴게요. 그리고 옆의 분은 사인 한 장만 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며칠 뒤 한약을 받고 돌아온 재석에게, 민경은 꼭 챙겨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집에서야 내가 줄 거지만, 회사에서는 꼭 먹어야 해. 비서한테 일러둘 거야.”
“알았어.”
그리고 최동훈 감독은 얼마 있지 않아서 첫 크랭크 인에 들어갔다.
“액션!”
* * *
휘이잉!
재석은 뒤에 앉아서 오고 있는 한국 배우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영화 찍으면서 다 같이 홍콩 가기는 처음이네.”
재석이 사람들을 이끌기 시작한 뒤로, 영화 제작을 위해 홍콩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이번 이렇게 대인원이 가는 것도.
제작비를 아끼기 위한 제작사와 배우들의 협력 덕분이었다.
재석의 소속사 뿐만 아니라 타 소속사 배우들 또한 사전에 제작진과 합의를 마친 상황이었다.
“오빠, 이번 촬영 며칠이야?”
“보름만 촬영해.”
“음? 나랑 다르네.”
“넌, 보름 촬영하고 중국 쪽 광고 촬영 스케줄이 잡혀서 다르지.”
“그래서 다르구나.”
“어차피 너 감당하는 곳이 몇 곳 안 돼서. 요즘 일 편하긴 하다.”
“그래서 불러주는 데 없어서 핑핑 놀고 있죠.”
“비싸서 그래.”
“그래서 몸값 낮췄잖아요.”
“한국이야. 그렇지. 꾸준히 활동해야 하니까 일본은 몇 년 전부터 맥시멈이고 중국은 아직도 올라가고 있고.”
최근 중국의 업체들은, 민경을 한 번 부르려면 진짜 얼마를 불러야 할지 평범한 이라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몸값을 부르곤 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그녀가 출연했던 여인심계가 중국 사극 드라마 시청률 TOP4에 들어간 것이 컸다.
“근데 중국 일거리는 얼마에요?”
“50억짜리.”
“역시 통 크네요.”
“네 몸값이지만, 나 같아도 부담스럽다. 아마 한 번 촬영하는데 아주 뽕을 뽑으려고 할 거다.”
“돈 받은 만큼 값을 해 줘야죠.”
민경은 돈 받은 만큼 일할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콩에서 영화 촬영이 시작하면서 홍콩 쪽 배우들과 만나게 되었다.
다들 인사를 나누면서 자리도 함께했다. 그리고 다음날 촬영까지 진행되었다.
정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서 전문 통역사를 고용해 진행했는데 통역사가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통역을 해대서 나중에는 턱이 아프다면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할 정도가 되어서 촬영이 끝났다.
그리고 채 이틀이 지나기 전에 통역사는 재석에게 찾아와 진중하게 물었다.
“한 명 더 고용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돈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럼, 일 절반만 하시고 돈도 절반?”
“네,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그러죠. 하지만, 제가 아는 사람이 없는데.”
“제 지인을 추천해 드리죠.”
“그럽시다.”
다음날 통역사는 오전 오후로 나뉘어 현장 통역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최동훈 감독은 더 신나게 통역사를 이용해 지시했다.
배우들은 그 지시에 따라 연기를 했고 촬영에 임했다.
그래도 배우들 사는 게 거기서 거기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다들 감독의 지시에 잘 따라줬다.
그래도 홍콩 배우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배우는 다름 아닌 민경이었다. 정말 연예인 오브 연예인이라 외국 배우들의 관심을 독차지할 정도였다.
“진짜 스타는 스타다.”
최동훈 감독과 전작을 같이 했던 김혜진 또한, 방송계에서는 대선배로 불렸다. 웬만한 원로 배우들과 연기 경력이 맞먹을 정도로 오랜 기간 배우로서 살아왔고 살아남은 배우.
그런 그녀조차 민경을 보고 조금 부러워하고 있었다.
“나도 민경이 회사에 들어가면 한류 스타 되나?”
더구나, 한국에서는 대단한 배우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해외로 나오면 배우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기에 더욱 아쉬움이 컸다.
그때였다.
“그래도 몸이 워낙 건강하셔서 아직도 젊음을 유지하시고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들려온 재석의 목소리에 김혜진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머나, 제 말을 엿듣고 있었어요?”
“음, 사람들한테 이걸 나눠주고 있는데 엿듣게 됐네요.”
재석의 손에 들린 건, 한국산 에너지 드링크였다.
“이걸 또 보네요.”
재석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알고 있는 거다. 제이이브의 상징과도 같은 에너지 드링크.
“제가 직접 나눠 준 기억은 좀처럼 없는데요.”
“제작진을 통해서 받았죠.”
“그런데 아까 저희 회사로 오고 싶다고요?”
“으흠! 못들은 걸로 해 주세요.”
“그러죠. 죽을 때까지 비밀로.”
재석은 그 말을 하고 에너지 드링크를 넘겨줬다. 그리고 다른 배우에게 다가갔다.
홍콩 첫 촬영이 끝나고 김조현을 만나서 물었다. 오늘 촬영 어땠는지 말이다.
“사장님, 너무 꿈만 같습니다.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과 함께 연기를 해서요.”
아직 김조현은 대선배들을 보고 하루하루가 신선하고 놀라운 순간들이다. 거기에 홍콩 배우들과 연기 호흡을 하는 건 그에게도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